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86화 (186/352)

〈 186화 〉 184. 높은 엘프 보호구역 8

* * *

“러셀님. 이쪽입니다.”

한밤중 나를 데리러 온 것은 뜻밖의 인물 에우로라 씨였다. 분명 결혼 전, 그 사건 이후에 조금 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나 먼저 찾아오다니.

거기에 로리엘의 심부름을 왔다니 조금 신기할 지경.

엘프랑 다크 엘프는 서로 앙숙지간, 사이가 상당히 나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에우로라 씨가 로리엘의 심부름해주다니 신기한 일인 것이다. 엘프들의 말을 듣는 것조차, 자존심 상해할 것 같은데? 더군다나 나를 데리러 와서 처음 한 소리가.

“로리엘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가시죠.”

라는 말이었으니.

마치 부하라도 된다는 듯한 말이 아닌가?

나는 신기함을 느끼며 에우로라 씨의 안내를 따라 여관 밖으로 나섰다. 아마도 은밀히 이야기해야 하니 여관 밖 한적한 곳에 자리를 만든 모양. 그런데 고위 귀족과 대화한다면서 에우로라 씨가 이끄는 발걸음은 목책 밖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혹시 사람들이 들을 수도 있을까 봐 그런 건가?’

“이, 이쪽이 맞나요?”

나는 에우로라 씨에게 목적지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마을에서 너무 멀어지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예, 저희가 갈 때쯤이면 다 준비가 끝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에우로라 씨의 안내를 따라 목책 너머 마력 등의 불빛 몇 개가 반짝이는 평원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저 위치는? 마을로 쳐들어왔던 남작과 병사들의 시체를, 구덩이를 파 태운 위치인데?’

이상했다. 설마? 남작의 시체를 같이 확인하고 있는 건가? 하긴 남작 때문에 왔으니 남작이 어찌 되었는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

애써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포장하며 조금씩 목적지로 다가갔다. 그렇게 구덩이로 점점 다가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쩌죠? 그냥 여기서 처리하고 없던 일로 할까요?”

“조금 겁을 준 것에 불과한데. 설마? 그 정도에 앙심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러셀 씨가 아직 모르는 상태니, 일단 정리하고 되돌아간 것으로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수리아, 시트라, 로리엘의 뭔가 속닥거리는 목소리. 나한테 뭔가를 숨기려는 모양인데? 이제는 확실해졌다. 분명 뭔가 사고를 친 모양. 뭘 정리한다는 것이지? 불안감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뇨 잠시만요. 고위 귀족이라고는 생각했지만 ㅇㅇ이라뇨. 살기 위해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긴 기사 넷만 대동하고 ㅇㅇ이 직접 찾아온다? 확실히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그러면 정직하게 입을 열 때까지 조금 겁을 더 주어야겠습니다.”

­쏴아아아

바람에 나부끼는 풀 소리에 상대방의 신분에 관한 내용을 정확히 듣지 못했지만, 넷의 말에 뭔가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조금 더 빠르게 걸으며 외쳤다.

“이야기 준비는 다 된 거야!?”

마력 등 주변에 모여있던 넷이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가가니 삽시간에 조용해지는 분위기. 넷의 얼굴을 바라보자 왠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넷의 모습.

이상했다.

‘이야기 나눌 사람들은 어디 갔단…. 설마?’

화들짝 놀라 구덩이로 뛰어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불빛이 흘러나오는 구덩이 아래에는 온몸을 묶여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정신을 잃은 상태, 나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넷에게 물었다.

“왜? 이야기가 잘 안된 거야? 쳐들어오기라도 하겠대? 왜 묶어서 구덩이에 던져둔 거야? 말이 안 통해?”

“그, 그것이…”

내가 이해 못할 상황을 접하고 질문을 쏟아내자.

아우로라의 등에 업혀있는 수리아 왕녀의 입에서 난처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내가 다른 사람의 대답을 요구하듯 시트라 씨를 바라보자. 시트라 씨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주,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혀, 협상 전에 이, 이야기가 잘될 수 있게 조, 조금 분위기를 만들었달까요? 이, 이제 말씀하시면 됩니다.”

무슨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었기에 시체 태운 구덩이에 던져두고 대화를 시작한단 말인가?

“하하… 아!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구덩이는 대화를 시작하기에는 좀… 근데 안에 계신 분은 누구라고?”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질문하자 왠지 다 같이 입을 다무는 사람들. 할 수 없이 본인에게 직접 물어야 했다.

“아하하… 상황이 좀 이상하고 장소가 좀 그렇긴 하지만, 마을의 치안을 맡고 있고 동시에 여관의 주인인 러셀이라고 합니다. 아래 계신 분의 성함과 직책을 알 수 있을까요?”

구덩이 아래 남자 또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 높은 엘프의 반려이신가요? 저는 아베느의 수도 그란 올에서 온 그란 올 라페스빌 5세 구, 국왕입니다.”

나는 남자의 말에 대답도 잊은 채 삐거덕거리는 목을 천천히 뒤로 돌려 넷을 바라보았다.

전생에 심각한 고통을 느끼면 체내에서 엔도르핀이 폭발적으로 분비되어 고통이 사라지고 갑자기 웃음이 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내 웃음도 그런 것일까?

“하하… 하… 하…”

이건 대체 어떤 의미의 분위기 조성이란 말인가?

잠시 정적이 흐른 후.

그제야 시트라 씨와 수리아 왕녀가 나를 한쪽으로 끌고 가 번갈아 가며 상황을 설명했다. 한참의 설명 후 나는 대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잔뜩 겁이든 상대를 구슬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한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했다.

구덩이에 처박은 것이 국왕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렇게 처음에는 별로 나쁘지 않은 생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시트라 씨는 마족의 끄나풀이나 인간 사이에 숨어든 마족을 골라내 고문, 심문하는 것이 전문.

수리아 왕녀도 북부에서 몬스터, 마물, 마족의 머리통을 깨고 지능이 있는 포로를 잡으면 한 놈씩 처단하며, 다른 놈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 전문이었기에 그녀들의 생각은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비슷한 성향의 둘이 붙으니 시너지를 일으켜 재생력 뛰어난 마족을 고문하듯 손가락 이야기부터 시작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

또한 추가된 인원인 로리엘은 자주 접하는 자신 이외에는 다른 인간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는 아니, 감정이 없다기보다는 오크나 고블린과 차이를 두지 않는 정도랄까?

거기에 로리엘을 따라왔던 두 다크 엘프 아우로라, 에우로라는 당연히 피와 고문에 별다른 느낌 없는 성정이 비교적 잔혹한 다크 엘프니 그나마 왕이 목숨을 부지하고 자신의 신분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일 지경이었다.

해가 진 어두운 밤 평원의 풀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쏴아아’ 하는 소리가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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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우리는 비교적 조용한 평원 엘프들의 구역에 있는 빈집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눠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손님이 있는 여관이나 한나 아주머니 댁에서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문제가 생겨도 대처하기 쉬운 곳. 우리 편이 많은 곳을 찾다 보니 여기가 제일인 것.

한밤중에 부탁이었으나 에밀을 비롯한 수인들과 평원 엘프들은 귀찮은 기색 없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처음에는 이 난감한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당연히 국왕의 발바닥을 칼로 쑤시고 행정관을 기절시키기까지 했으니, 이야기를 좋게 끌고 갈만한 여지가 없다랄까?

하지만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조금 이야기를 나눠보니 국왕은 도리어 우리 눈치를 살피는 상태. 우리 여자분들이 큰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분노하거나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상황에 남겨진 마지막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좋아하실 분들이 몇 분 계시지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없던 이 아니라 없애는 일이 될 것이지만.

결국 마지막 선택지는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것.

구덩이에 처넣고 발바닥 쑤신 걸 되돌릴 수도 없고,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으니, 이 상태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애초에 내가 그녀들에게 ‘상식’이라는 걸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다.

애초에 상식이란 무엇인가?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이나 일반적인 견문,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같은 것을 말하는데, 이쪽 세상은 종족이나 지역에 따라 가치관이나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전혀 다르니, 수리아 왕녀나 시트라 씨 본인들의 ‘상식’은 사람 하나 구덩이에 처넣고 발바닥 정도 쑤시는 건 상식선에서 용납될 수도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큰 테이블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 국왕과 시트라 씨의 정신 정화를 받고 깨어난 행정관이 자리를 잡고, 내 옆에 앉은 것은 이실리엘과 리젤다, 발레리를 비롯한 아내들과 플로라였다.

그리고 뒤에 시트라 씨와 수리아 왕녀, 로리엘이 자리를 잡았다.

‘뭐야 플로라는 누가 데려왔어! 또?’

아내들 옆에 자리 잡은 플로라의 모습에 머리가 아파졌지만 일단 지금은 플로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 대화의 물꼬를 먼저 열었다.

“좀전의 무례에 대해서는 일단 사과드립니다. 파텔의 남작이 제 소중한 아내에게 자신이 아끼는 노예라며, 내어달라는 억지를 쓰며 쳐들어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다들 예민해진 상태라서요.”

내 말에 이실리엘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아무래도 그때의 불쾌함을 떠올리니 기분이 별로였던 듯.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왕이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사, 사과라뇨 아, 아닙니다. 그 무례한 년이! 아니, 남작이 감히 그런 망발을! 제, 제가 다 부덕한 탓입니다. 제 신하들의 잘못은 다 저의 잘못. 부디 노여움을 푸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응 너희 남작이 사고 쳐서 그런 거야. 어쩔 거야? 이해해. 라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돌아온 것은 정중한 사과.

‘발바닥을 찔렸는데 다행이라고요?’

말한 내가 더 놀랄 지경.

“예?!”

“행정관! 높은 엘프님께 바치기 위해 가져온 공물 아니, 선물을 어서 가져오게!”

왕은 도리에 눈치를 계속 보며 뭔가 오버액션을 취하듯 행정관에게 소리쳤다.

왕의 말이 끝나자 행정관이 달려 나가고 수인들의 도움을 받아 잠시 후 오두막 바닥에 고급스러운 궤짝 여러 개가 놓였다. 행정관이 상자를 열 때마다 안에는 금화와 보석, 몰약, 향유, 염색한 천들이 가득 찬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의 발바닥을 쑤시니 금은보화가 생겨난 것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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