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183. 높은 엘프 보호구역 7
* * *
라페스빌이 잠에서 깨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팔을 뒤로하고 꽁꽁 묶인 채 재갈까지 물고 정신을 잃은 행정관의 모습이었다. 머리 위에서 흘러드는 흐릿한 불빛에 라페스빌은 자신들이 어떤 구덩이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주변에 가득한 탄내가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이, 이게 무슨?’
분명히 방에서 이상한 요정이 빛나는 가루를…
라페스빌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마지막 기억을 되짚고 있는데, 재갈을 물고 있던 행정관의 입에서 막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자신처럼 정신을 차린 모양.
“웁… 웁웁…”
행정관은 연신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의 입을 막은 재갈은 행정관에게 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웬 여자의 목소리.
“조용…. 떠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귀찮은 투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웁… 우웁!”
하지만 행정관은 그 여자의 경고에도, 무슨 말인가를 필사적으로 하려 했다. 그리고 행정관의 그런 행동은 결국 여자를 화나게 한 것 같았다. 싸늘한 구덩이 안을 울리는 여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곧 들려왔으니 말이다.
“일단 손가락 하나 자르고 시작할까요? 시트라.”
“음….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말을 하는데 손가락은 필요치 않으니까요.”
아니, 무슨 다짜고짜 손가락부터 자른다는 말인가?
여자들의 말에 라페스빌이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정신을 잃은 후에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이긴 해도 여자들이 자신들을 왜 핍박하는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는 상태.
얼마 전에 남작이 그 난리를 쳤으니 경계하고 의심하는 것.
질문이 시작되면 천천히 의심을 풀어주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손가락이라니?
‘저런…. 여자들이 생각보다 예민하구먼. 행정관의 손가락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게….’
마음속으로 행정관을 위로하며, 행정관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행정관의 손가락이 날아갈 것으로 예상하던 라페스빌의 귀에 믿지 못할 이야기가 들려왔다.
“늙은 놈이 말을 안 들으니 젊은 놈의 손가락을 자르지요. 로리엘님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손가락은 손맛이 별로인데….”
라페스빌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행정관을 바라보았다. 행정관도 자신의 실수로 라페스빌의 손가락이 날아간다는 사실에 경악하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으나, 행정관의 막힌 입에서는 의미 없는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우웁! 우우우웁!”
라페스빌의 몸이 공중으로 천천히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행정관이 더욱 비명을 지르자.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그래도 시끄러우니, 일단 두 개로 시작합시다.”
구덩이 위로 거의 다 끌어올려진 라페스빌은 행정관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그 지혜로운 행정관은 이런 상황에는 익숙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으면 잠든 사이에 죽였다는걸. 이렇게 깨워서 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겁을 주면서 알아내려 하는 것이다. 이곳에 온 목적이나 신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니 적당히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상대방에게 적당한 상황에서 신분을 밝히면 될 일인데.
행정관이 너무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문관 출신이라서 그런가….
무가 출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제법 담대했을 텐데, 뭐 모든 일에 완벽할 수는 없겠지. 라페스빌은 체념했다.
그냥 기분 좋은 상태의 용도 아니고 진노한 용의 둥지에 사죄하러 왔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했는데, 그 각오가 손가락은 아니었지만, 당장 입이 막힌 상태에서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뭐 더 떠들고 난리를 쳐봐야 이별해야 하는 손가락이 더 늘어날 뿐이니.
그래도 손가락 정도면 아프긴 하겠지만, 추기경 정도면 잘린 신체도 재생시킨다고 했으니. 성국의 비밀을 위해 희생한 손가락 정도야….
성국에서 어떻게든 해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라페스빌은 눈을 감았다.
‘왕이 위엄이 있지 행정관 앞에서 울면서 구걸할 수는 없지 않은가?’
꿀꺽
챙
어디선가 단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뒤로 묶인 팔에서 손가락을 잡아채는 힘이 느껴질 때,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로리엘님?”
“아우로라가요? 말씀해 보세요.”
“일단 누군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니 회복 불가능한 고문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좋게 이야기가 끝날 수도 있는데, 손가락이나 팔이 날아간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좋게 끝날 수가 없을 테니까요. 복수심이 생길 수도 있고…. 러셀 님이 맡겨주신 일이니 신중히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확실히.”
“러셀 씨를 편하게 한다는 생각에 그 점을 미처 생각 못했군요.”
비교적 상식적인 말을 하는 한 여자 덕분에 라페스빌의 손가락은 다행히 주인에게 계속 붙어있을 수 있게 되었다.
라페스빌은 가슴속으로 안도했다. 정신 나간 여자들만 모여있는 줄 알았는데 제법 상식 있는 여자가 하나 끼어있지 않은가?
그렇게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고개를 땅에 뉠 때였다. 라페스빌의 안도하는 마음을 산산이 깨부수는 소리가 곧이어 들려왔다.
“그러니, 치료할 수 있는 고문으로 제한하시죠.”
정상인이라 생각했던 목소리는 비교적 덜 미친년이었을뿐 다 같은 미친년이었던 것이다.
뒤에서 어떻게 고문할 것인가 여자들이 한참을 고민하더니 방법이 결정되었는지. 라페스빌은 구덩이 쪽으로 머리를 두고, 행정관을 바라본 상태에서 천천히 신발이 벗겨졌다.
망연한 표정의 라페스빌이 행정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바닥을 달군 쇳덩이로 지지는 것 같은 맹렬한 고통.
“끄흐으으으으응”
그녀들이 선택한 고문이었다. 단검으로 발바닥을 찔러 피가 나오기 전에 치유한다는 것.
라페스빌의 고통으로 부릅떠진 눈에 행정관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고통에 찬 표정을 본 행정관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에 조금 익숙해졌을 때, 반대편 발바닥에 이어지는 또 다른 고통.
“끄우우우우움”
“자 이렇게 뽑기 전에 치유를 시작하면 피를 한 방울도 안 흘리고 치료할 수 있습니다. 상처도 완벽하게 사라지니 러셀 씨도 모를 것이고…”
사제가 있는지 양쪽 발바닥에 꽂혀있던 단검이 빠지며 곧바로 치료되어 고통은 사라졌지만, 처음 느껴보는 생경했던 통증은 라페스빌에게 공포를 선사했다.
라페스빌은 그 고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이제 조용히 할 준비가 되었나요?”
처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서늘하게 들려오자 구덩이 안에서 행정관이 머리가 떨어지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통을 참느라 흘렸던 땀방울이 라페스빌의 머리에서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땀방울과 함께 라페스빌도 다시 구덩이로 떨어져 내렸다.
털썩
라페스빌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다시 구덩이로 처박히자 행정관이 지렁이처럼 기어와 자기 몸을 덮으며 소리죽여 오열했다.
‘자네 실수가 아니네’
라페스빌은 들리지는 않겠지만 행정관을 위로했다. 그냥 저년들이 미친년이지 행정관이 무슨 잘못이겠나? 노년의 나이에 놀라 소리친 것이 잘못은 아니니 말이다.
“이제 저희가 묻는 말에만 대답할 준비가 되셨나요?”
라페스빌과 행정관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두 번은 사양이었다.
‘아니, 이미 두 번인가?’
그리고 여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 이곳을 쳐들어왔던 남작 때문에 온 것인가요?”
행정관과 라페스빌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봐야 또 미친년들에게 트집이 잡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협상하려고 온 것인가요?”
행정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의 조금 밝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이제 늙은 분의 입을 풀어드릴 것인데, 또다시 묻지 않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면, 젊은 분의 발바닥이 어떻게 될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행정관이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행정관의 입을 묶고 있던 재갈이 무엇인가에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하… 크흑….”
행정관이 신음하며 자신이 받은 고문에 대한 마음에 부담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지 울음을 흘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질문이 바로 시작되었다.
“찾아온 목적은요?”
“나, 남작의 실수를 노, 높은 엘프님께 사, 사죄드리기 위함입니다.”
“역시나. 그렇군요.”
위에서는 ‘비교적 다행이군요.’ ‘역시 손가락을 자르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같은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여자의 질문이 다시 들려왔다.
“어떤 식의 사죄인 거죠?”
“저, 저희 방에 높은 엘프님께 공물 아니, 예물로 드리려고 가져온 상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드리고 남작의 신병을 인도받아서….”
“잠시만요. 남작의 신병을 꼭 인도받아야 하나요?”
“아, 아닙니다. 지, 직접 처리하시겠다면 다, 당연히 내어드려야지요.”
“음…. 다행이군요.”
여자의 다행이라는 말에 행정관은 혹시나 해서 남작이 어떻게 돼 있는지를 확인했다. 뭔가 인도 못 할 상태라는 느낌이었기에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저? 혹시 남작은?”
“거기 당신 옆에 있군요… 아마도 다른 것들과 섞여서….”
“예?”
여자의 말과 함께 등 하나가 밧줄에 묶여 아래로 내려졌다. 등이 내려지며 천천히 밝아지는 구덩이 속에서 행정관과 라페스빌은 아까부터 맡아지던 탄 냄새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새카맣게 탄 뼈들이 구덩이 안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히이익”
행정관은 그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연신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버둥거렸다.
“히이익 사, 살려!”
행정관이 연신 비명을 질러대자. ‘칫’ 하는 여자의 소리와 함께 아까의 요정이 구덩이 아래로 뛰어내려 행정관의 얼굴에 반짝이는 가루를 뿌리고 사라졌다.
“샌드맨 고마워. 기분 나쁜 곳에 내려보내서 미안해.”
다른 여자의 요정에게 사과하는 목소리.
아니, 그 기분 나쁜 곳에 라페스빌 자신도 있는데…
그리고 곧 구덩이 위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분이 대화할 수 없어 보이니, 젊은 분께서 대신 해야겠군요. 역시나 묻는 말에만 대답하셔야 합니다. 아시겠나요?”
라페스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또 전의 바람과 함께 라페스빌의 재갈도 무엇인가에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페스빌이 재갈에 눌려있던 입을 우물거리자 들려오는 목소리.
“그럼 이름과 가문, 신분, 어디에서 오셨는지를 말씀해 주시죠.”
“아베느의 수도 그란 올에서 온. 그란 올 라페스빌 5세 구, 국왕입니다.”
라페스빌의 말에 구덩이 위가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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