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179. 높은 엘프 보호구역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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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나는 수정통신이 끝나자 안락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남부의 왕과 머리싸움 없이 이야기가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에게 약간의 압박과 겁을 주었으니 아마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헬로나가 직접 나서 남부의 왕을 압박한 이유는 얼마 전 시트라가 올린 보고 때문이었다.
시트라가 마을로 쳐들어온 남작의 대가리를 깨트렸다고 보고해온 것. 그 보고에 성국 수뇌부는 비교적 빠른 결정을 내렸다.
결정은? 당사자인 아베느 왕국을 이 일에 끌어들이자는 것.
자꾸만 일어나는 불상사를 아베느 왕국 모르게 성국의 인원으로만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뭐 도적이나 용병, 부랑자들이 벌이는 일이야 시트라 하나면 해결할 수 있겠지만 요번처럼 남작 같은 자가 군대를 끌고 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
인원을 더 파견하기에는 대륙에 혼재한 문제들이 너무 많고, 상급 이단 심문관이 한군데 정착했다는 그것만으로도 성국에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 북부의 왕녀가 왜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트라와 둘이 처리했으니 다행이었지만 이다음에도 똑같이 운이 좋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사자인 아베느 왕국을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비밀로 할 수 없으면 군대를 주둔시켜서라도 일대를 안정화해야 혹시라도 일어날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테니.
뭐 일단 제안은 던져 놨으니 결과는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잠시 후 헬로나는 의자에서 허리를 세우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이번에는 북부 에삭스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헬로나 추기경.”
헬로나는 옆에 있던 마법사에게 다시 한번 수정통신 연결을 부탁했다. 북부 왕녀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에삭스의 왕에게 감사함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왕녀가 왕위에서 밀려나 남부로 떠난 것 같은데, 감사함을 북부에 전한다면 처우도 나아질 테니, 성국은 도움받은 일에는 확실히 은혜를 갚는다는 원칙이 있으니 말이다.
수정구가 몇 번 번쩍인 후 잠시 후 반대편에서, 에삭스의 수정구 통신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핑크 머리 수리아 왕녀가 침대 위 얌전한 모습으로 앉아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히고 있었다.
“러, 러셀님. 저는 마, 마음의 준비가….”
“눈치가 보여서 아내들 몰래 찾아온 것이니 어서요.”
“하, 하지만…”
“어차피 한번은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나는 왕녀를 살살 달랬다. 어차피 한번은 해야 하는 것인데 부끄러워하기는. 아내들 앞에서는 그렇게 용감하게 외쳤다면서…
“그, 그럼 알겠습니다.”
핑크색 머리가 위아래로 간신히 끄덕여졌다.
아니, 결혼하고 싶다는 분이 단둘이 이야기 좀 나눠보자니까 이렇게 부끄럽다고 빼시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방에서 아무 짓도 안 합니다. 이야기만 할 거라니까요?’
시트라 씨는 또 며칠 잠에 빠진 것 같으니 나중에 찾아가 봐야 할 것이고, 플로라 처형은 일단 보류, 사람의 도움 없이는 여관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수리아 왕녀가 제일 만만한 것이었다.
다만 왕녀가 묵는 방에서 단둘이 이야기해야 했는데, 그 부분에서 왕녀가 부끄러워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만 한참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저와 결혼하고 싶으시다고 아내들에게 말씀하셨다면서요.”
“예…”
수리아 왕녀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녀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아내가 셋이나 있어요. 뭐 무슨 축복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만 해도 감사 한데 셋이나 있으니, 저는 엄청나게 만족하는 상황입니다. 더 아내를 늘리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요. 제가 왕족이나 귀족도 아니고 셋도 무척이나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중이거든요.”
“그, 그것은 저와 결혼하시면 왕, 왕족이 되시니 자연스럽게 해결될…”
“왕녀님도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아시잖아요?”
내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하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고개가 들썩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눈물.
생전 처음 여자한테 이런 말을 해보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내가 여자에게 이렇게 직접 거절의 의사를 전달하는 날이 오다니. 세상에.
“제, 제가 아내들보다 못한 건 알아요. 그 머리카락도 이런 이상한 색이고, 제대로 거동도 못 하는 환자 같은 처지. 저따위가 현자님을 욕심낸다는 게 저도 우습긴 한데….”
“아뇨! 머리카락 정말 마음에 듭니다. 생긴 것도 마음에 들어요! 그렇지만…”
눈물 가득한 눈으로 급하게 화색 하며 말하는 왕녀.
“그, 그럼 저를?”
“아니, 마음에 들고 말고가 아니라니까요? 저 개인적인 마음의 기준이랄까? 아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요.”
“왜죠?”
“예?”
“왜 미안한 거죠?”
수리아 왕녀가 도리어 질문 해왔다. 그녀는 내가 아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
“당연히 미안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째서죠? 다른 아내들은 허락하셨다면서요?”
‘뭐지?’
도리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왕녀.
“그야, 양심상 다른 아내들을 배신하는 느낌도 들고….”
“그렇지만 그 아내들이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시잖아요?”
우로보로스. 그래, 이것은 꼬리에 꼬리를 문 뱀.
우리 대화는 아까부터 같은 곳을 맴돌고 있었다. 애초에 몬스터나 마물들과 끝없이 싸우는 이 세계에서는 당연히 인간의 숫자가 중요하고, 그렇기에 아이를 많이 낳는다.
결혼관도 남녀가 결혼하는 것이지 그것이 무조건 한 명과 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결혼은 출산과 관련된 것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느슨한 것이다. 아내가 많으면 많이 낳을 수 있으니.
물론 느슨하다고 불륜이나 혼외 자식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렘이나 다수의 아내 정도야 서로 간의 합의만 있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데.
내가 전생의 감성으로 양심이나 배신 같은 이야기를 하니, 당연히 먹혀들지 않는 것.
어떻게 거절해야 왕녀를 떨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왕녀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저, 저한테도 기회를 주세요!”
“무슨 기회 말이죠?”
“제가 러셀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말이죠!”
음…. 확실히 매몰차게 거절하면 또 달라붙을 테니, 어느 정도 기회를 주고 거절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전생에서는 소개팅을 받아도 세 번은 만나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왕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요. 그럼 한 달 동안 제가 열린 마음으로 같이 산책도 하러 나가고, 뭐 같이 사냥도 나가보고 그러도록 하죠. 이야기도 나눠보고 대신에 꼭 약속해 주셔야 합니다. 왕녀님도 제 껍데기를 얻고 싶은 게 아니라 제 마음을 얻고 싶은 것이잖아요?”
“그, 그렇죠. 마음…”
“그러니 제가 그 후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깔끔히 포기하시는 겁니다. 아셨죠?”
“예! 물론입니다. 저는 일국의 왕녀 절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
왕녀가 기쁨에 차 내 품으로 매달렸다. 핑크색 머리가 시야에 어른거려, 깜짝 놀라 예전 기억에 코가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왕, 왕녀님. 신체접촉… 아니, 애정 표현은 천천히. 저, 저희 아직 손도 안 잡았는데, 포옹은 좀 이르네요.”
내가 왕녀의 행동을 지적하자 왕녀는 빠르게 물러나다 침대로 미끄러져, 부끄러웠는지 이불을 뒤집어써 버렸다.
라페스빌은 이제부터 자신은 꼭 늙은 행정관의 조언에 항상 귀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수정통신이 끝나고 조언을 구했을 때. 늙은 행정관이 아주 놀라운 지혜를 뽐냈기 때문이었다.
“군대나 사절. 둘 다, 절대 안 됩니다.”
“대, 대체 왜? 엘프의 왕족이며, 용 같은 분이라지 않았던가?”
용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라페스빌이 행정관을 바라보자. 역시나 연륜의 행정관은 자신이 잠시 망각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성국의 기밀이라고 하신 것 잊으셨습니까? 성국에서 이것을 기밀로 한 것은, 그분께서 자신의 위치가 드러나지 않는 걸 희망하신다는 것. 그러니 저희도 밀사를 보내듯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라페스빌은 전율했다. 어쩌자고 이런 행정관의 말을 무시했었단 말인가! 자신이 어리석었다.
만약에 휘황찬란한 사절단과 군대를 이끌고 갔으면 성국에서 무슨 꼴을 당했을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성국의 기밀을 자기가 자기의 손으로 만천하에 까발린 것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아, 아버지 때부터 행정관으로 일했지 호버든?”
“예, 전하.”
“네, 결코 자네를 앞으로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야. 내가 어쩌자고 자네 말을 안 듣고 그년한테 그걸 팔아서는…”
다음 날 아침.
라페스빌은 왕실의 마법사와 행정관, 호위 기사 넷만 대동한 채 남쪽으로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모두 두건을 푹 눌러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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