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79화 (179/352)

〈 179화 〉 177. 높은 엘프 보호구역 1

* * *

드넓은 평야, 고개가 무거워 꺾어질 것같이 영근 보리와 밀들이 황금빛으로 대지를 물들이고 있고, 이 축복받은 땅을 위대한 강 라벨이 가로지른다.

이 축복받은 대지의 중심. 위대한 강이 잠시 쉬어가며 호수를 이루는 곳, 그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도시.

붉은빛이 감도는 남부의 특산품인 황혼석으로 쌓아 올린 성벽과 성이 일품인 이 도시의 이름은, 아베느 왕국의 수도. 황금의 들판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는 도시 그란 올 이었다.

그 위대한 도시 그란 올의 주인 아베느의 정당한 통치자 라페스빌 5세의 취미는, 따듯한 차 한잔을 마시며 노을처럼 붉은 자신의 성과 끝도 없이 이어진 황금의 들판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오후의 따사로운 태양을 맞으며 차 한잔을 즐기고 있던 라페스빌 5세에게 비보가 날아들었다.

“전하! 성국에서 급보가 도착했사옵니다.”

행정관이 달려와 라페스빌 5세의 유일한 취미를 방해하며 말했다. 아직 30대의 젊은 왕은 눈썹을 한번 꿈틀거린 후. 행관을 따라 수정통신이 가능한 회의실로 향했다.

남부 늪지대와 가까운 도시 그란 폴에서 가져온 허브차가 아직 남았지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통신 수정으로 연락해온, 성국의 늙은이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

라페스빌은 빠르게 회의실로 이동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마법사가 내미는 수정구를 바라보자, 건너편에는 성국 추기경 중 하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아뿔싸,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자애와 순결의 추기경 헬로나, 더럽게 깐깐한 추기경 중 하나였다.

“헬로나 추기경님 안녕하십니까.”

“아베느의 정당한 통치자 라페스빌 5세를 뵙습니다.”

보통 헬로나 추기경은 서큐버스 같은 음마족이 등장하지 않는 한. 비교적 외부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적은 편인데, 이렇게 수정통신까지 연락할 정도면. 왕국 내부에 서큐버스같은 음마족 이라도 침입한 것인지 하는 생각에 라페스빌이 다급히 물었다.

“헬로나 추기경께서 어쩐 일이신지?”

하지만 헬로나 추기경의 입에서 들려온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성국에서는 아베느 왕국에 정식으로 항의를 표하려 합니다.”

“예? 그게 무슨!?”

­콰당

라페스빌이 성국의 항의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큰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리고 회의실에 있던 왕실 행정관도 항의라는 말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보통 왕국 간의 항의 서한이라는 것은 ‘내가 이런 것 때문에 화나니까’ 어서 빨리 해결해 달라는 일종의 독촉장. 그리고 독촉이 먹히지 않으면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는 반협박이지만 성국의 항의장은 그 결을 달리한다.

성국의 항의장은 이단 심문관이 직접 배달한다. 그리고 도착한 이단 심문관이 초법권적으로 도착한 왕국의 법보다 성국의 법을 우선시해 모든 것을 처단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는 것이었다.

통치자의 통치 권한 위에서 성국의 권한을 마음껏 휘두르니 항의 서한은 양피지 한 장일 뿐이지만 그것을 받은 왕들은 면전에서 똥이 뿌려지는 것과 마찬가지인 모욕을 당하는 것.

다른 나라에 알려지는 날에는….

라페스빌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가 짧은 나라라 무시당하는데 성국의 항의장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더군다나 이미 얼마 전에 정신 나간 남작 새끼 하나 덕분에 경고까지 받은 상태가 아닌가?

“대, 대체 무슨 일 때문입니까? 무슨 일인지 알려주셔야!”

라페스빌은 어떻게든 독촉장이 도착하는 사태만은 막고 싶었다. 그렇기에 사정할 수밖에 없는 것. 주변국 국왕들의 웃음소리가 귓가로 들려오는 듯했다.

“임무를 위해 남부에 파견 중인 저희 상급 이단 심문관을 남부의 남작이 살해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수정구 너머의 그 깐깐한 헬로나 추기경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대체 어느 놈이! 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놈을 직접 잡아들이겠습니다!”

대체 어떤 새끼란 말인가? 남부의 풍요롭고 따듯한 땅에서 나는 곡식이나 배부르게 처먹고 본인들 영지에서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될 것인데, 무엇이 부족하다고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친단 말인가?

여기가 북부처럼 척박한 곳도 아닌데, 다들 배때기가 부르셔서 그런지 어째서 하루가 멀다고 사고가 난단 말인가?

얼마 전에 파텔인지 페텔인지 하는 영지의 영주 놈이, 엘프들을 잡아다 벌인 엽기적인 사건 때문에 성국에 준엄한 경고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항의서한이라니.

매번 하위귀족 남작 새끼들이 문제였다. 상급 이단 심문관이 대체 무엇인 줄 알고 덤빈단 말인가. 그 인간의 탈을 쓴 도살자들을 하위귀족 새끼들의 무지함이 불러낸 대참사였다.

“대체 어느 영지의 미친놈이기에! 성국의 이단 심문관을! 부디! 부디! 제가 처리하게 해주시지요!”

라페스빌은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수정구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떨떠름했다.

“파텔이라는 영지의 파멜라 필그린이라는 여 남작이더군요.”

“그년이! 아니, 그게 아니고 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할 테니 제발 항의장만은! 헬로나 추기경님!”

파텔이라는 말에 라페스빌이 망연한 표정으로 옆의 행정관을 바라보자 노년의 행정관이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행정관이 저런 시선을 하는 이유.

“전하! 뒷골목에서 몸이나 팔던 여자에게 왕국의 남작 작위라니요. 분명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더군다나 단순한 작위가 아니라 영지까지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당장 우기에 피해를 본 직영지를 복구하고 성국으로 보낼 돈도 빠듯한데, 어쩌겠소? 돈 제일 많이 내는 놈이 최고지. 이렇게나 많이 낸다니 역시나 천한 핏줄 아니겠소. 하하하”

행정관이 반대하는 영지 판매를 자신이 강행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런 대형 사고를 칠지 누가 알았느냔 말이다. 더군다나 파텔 그곳은 왜 그렇게 말썽이란 말인가? 벌써 두 번이나 남작이 죽고 문제가 생겼으니, 통치할 사람을 구하는 것도 일이었다. 아니 그냥 이 기회에 직영지로 만들어 직접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일은 성하께서 직접 관심을 가지고 확인하신다고 하셨기에….”

“아니!?”

라페스빌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들려온 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왜 그분께서 이런 변방에서 일어난 일을….

“아니, 이런 변방 영지에 일어난 사건에 성하께서 어찌하여!”

성국의 교황이 왕들의 위는 아니지만, 존경받는 높은 어른 정도의 위치. 그런 분이 이런 작은 왕국의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시고 살피신다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은 이번 일이 중요도 높은 성국의 기밀정보와 관련된 일이라서 그렇습니다.”

성국의 기밀이라는 이야기에 라페스빌이 경악의 눈으로 수정구 너머 헬로나를 바라봤다. 대체 남작 이년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성국의 기밀 임무를 방해하기 위해서 이단 심문관을 살해하려 한 것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이번에 공격받은 아이가 제 딸 같은 아이인지라….”

라페스빌은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외교적 자리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저 헬로나가 직접 자신에게 연락한 이유를 말이다.

아니, 하필이면 성국의 기밀과 관련된, 순결의 상급 이단 심문관을 건드렸단 말인가? 그것도 하필이면 저 헬로나 추기경의 딸 같은 아이라니.

그래, 남작 그년이 매음굴 출신이라더니, 순결한 처녀를 보고 참을 수 없었던가?

‘이 더러운 년!’

라페스빌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체면도 잊고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 체면을 생각해주셔서 부디…”

“딱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만….”

라페스빌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 깐깐하다고 알려진 헬로나인데 다른 방안을 마련해 준다니. 성하께서 살피신다는데도 불구하고 개망신을 모면할 길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

“그,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국의 극비사항이니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면 물려주시기를 바랍니다.”

헬로나의 은밀한 목소리. 라페스빌이 헬로나의 그 말에 행정관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물렸다.

“행정관을 제외하고 저밖에 없으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성국에 기밀이라는 말에 라페스빌은 항의서한이라는 이야기도 잊은 채 헬로나의 말에 집중했다. 성국의 기밀 이야기가 나오려는 것으로 봐서는, 뭔가 기밀 임무에 자신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미, 항의서한 무마 정도가 아니라 결과에 따라서는 치하를 받을 수도 있는 일.

역시 위기는 항상 기회와 함께 찾아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일단 제 딸 같은 아이가 남부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라페스빌 전하께서는 엘프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는지?”

성국의 기밀을 알려줄 것 같이 말하던 헬로나의 입에서는 도리어 질문이 흘러나왔다.

“엘프라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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