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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in 여관-177화 (177/352)

〈 177화 〉 175. 3 다음에 왜 6 이지? 5

* * *

이실리엘은 왕녀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트라에게 물었다.

“그럼, 시트라 씨는 어떤 이유입니까?”

“저, 저는 그게….”

시트라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저하자 분노에 가득 차 시트라를 다그쳤던 발레리가 나서서 시트라를 달래보기로 했다.

“이실리엘님 제가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관에서 시트라를 구출해 온 후 발레리는 지속해서 시트라와 교제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가끔 식사도 같이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아마 여기서 시트라와 가장 친한 사람이 자신일 테니 비교적 좋게 이야기해 보려 하는 것이다.

물론 좀 전에는 무척 화가 나긴 했지만, 왕녀의 이야기에 화가 좀 가라앉기도 했고, 시트라도 왕녀처럼 혹시 슬픈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시트라는 사제인데 앞뒤 없이 결혼하고 아내가 되고 싶다고 하진 않았을 테고, 그동안 보여줬던 모습에 비추어 볼 때 시트라가 그렇게 막무가내인 사람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발레리가 시트라를 살살 달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트라 씨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트라 씨는 순결의 이단 심문관 이잖아요? 결혼을 한다고 해도 순결이 더럽혀지는 순간 신성력을 잃고 지금까지의 신앙이 다 사라져버리는 것 같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자기 발끝만 바라보던 시트라가 고개를 들어 발레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을 시트라 씨가 이겨낼 각오가 있다고 해도 성국에서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 상급 이단 심문관이 누군가의 아내가 되겠다는 것을 과연 허락할까요? 이 마을에 괜찮은 남자가 러셀밖에 없어서 잠시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저희가 허락해도 시트라 씨가 걱정이에요. 파문이라든지 그… 화형…”

­꿀꺽

발레리도 자신이 말하고 너무 끔찍한 생각이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시트라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런 발레리의 말과 행동에 시트라가 입을 열었다.

“빨간 가슴… 아, 아니, 발레리 씨 따듯한 말씀 감사합니다. 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예,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해보세요. 저희가 납득할 만큼. 키스하려 했다는 건 이제 사소한 문제니까요.”

이실리엘의 시트라의 물음에 대신 대답해 주었다.

시트라가 키스 이야기가 나오자 몸을 움찔하고, 엎드려 훌쩍이던 왕녀도 몸을 움찔 떨었다.

“먼저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제가 왜 여기 있는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여기 있는 이유는 이실리엘님 그리고 러셀 때문입니다.”

“네? 저요? 제가 왜?”

이실리엘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시트라에게 되물었다.

“엘프 중 가장 강한 세계수의 궁수가 남부에 자리를 잡았으니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생길까 싶어서 감시하는 것이 저의 임무. 그리고 이실리엘님의 남편인 러셀도 저의 감시 대상입니다. 혹시라도 다른 인간들이 무례를 저질러 큰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고 문제가 생기면 성국에 보고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그럼 이실리엘님과 제 남편인 러셀을 계속 감시했다는 건가요?”

리젤다가 뾰족하게 소리쳤다. 몰래 자신들을 감시했다는 말에 화가 난 것.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이실리엘은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것을 저에게 말씀해 주시는 이유는? 임무는 비밀이 아니던가요?”

자신도 엘프의 숲에서 러셀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실리엘은 그녀의 임무가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던 것이다. 러셀이 처음 자신들의 숲으로 들어와 엘프보다 더 뛰어난 궁술을 선보였을 때, 자신들도 러셀을 감시하자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가?

당연히 이실리엘 자신 같은 강한 엘프가 인간들의 왕국에 살고 있으니 감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피해도 끼치지 않았고 그건 그냥 그녀의 임무일 뿐이니 말이다.

“그, 그런데 말입니다. 그, 러셀 씨를 계속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꾸 생각이 나고, 보, 보고 싶고 그렇다고나 할까요? 아, 아무래도 러셀 씨를 어느샌가 조,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리젤다가 말도 안 된다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실리엘에게 바로 제지당했다.

“리젤다? 괜찮아요. 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긴 합니다. 감시할수록 사랑하게 된다. 확실히 그건 어쩔 수 없죠.”

리젤다가 멍하니 이실리엘을 바라봤다. 마치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그러자 이실리엘이 리젤다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저도 처음에는 엘프의 숲에 들어온 러셀을 감시하던 입장. 감시하면 할수록 사랑하게 된 건 저도 마찬가지라서요… 러셀은 지켜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운… 어머.]

예전 생각이 났는지 이실리엘이 볼을 붉게 물들였다.

그렇다 이실리엘도 엘프에 숲에 들어온 러셀을 감시하다 사랑에 빠졌던 입장. 같은 남자를 감시했다는 묘한 동질감과 같은 입장에 편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

리젤다가 화들짝 놀라 이실리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그랬지요. 죄,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야기나 더 들어보죠.]

“좋습니다. 자 다음 이야기를.”

리젤다의 말에 멈췄던 시트라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신성력이 발현되어 성국 안에서 지금까지 자라왔습니다. 연애나 결혼 같은 건 모르는 몸이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는 순결의 이단 심문관. 누군가와 교재나 결혼은 힘든 몸이지요. 그러니 저도 당연히 포기를 하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아…”

포기하려고 했다는 말에 이실리엘이 안타까운 음성을 내뱉었다. 자기와 같이 러셀을 감시했다면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았을 텐데, 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상황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것이다.

이미 둘이 러셀에게 키스하려고 해 분노했던 것은, 이실리엘의 기억 속에 사라지고 이실리엘은 시트라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요?”

발레리가 참지 못하고 채근했다.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에.

“축젯날 제가 쓰러진 것은 아시지요?”

발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러셀도 몇 번이나 병문안을 갔으니까. 그게 병은 아니었지만, 시트라가 며칠을 깨어나지 못하자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그녀를 찾았으니 말이다.

“그날… 그분을 뵈었습니다.”

“그분이라면?”

시트라가 하늘 위를 쳐다봤다.

“세상에! 맙소사!”

발레리와 다른 모든 아내. 심지어 엎드려 흐느끼던 왕녀까지 놀라 외쳤다.

“그분께서 그러시더군요.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영원히 자신의 사제로 순결의 종이 되어도 좋겠느냐고…”

“예?!”

시트라의 말에 러셀의 아내들은 경악했다. 그래 분명 그건 사제로 무한한 영광이겠지만. 과연 그것이 축복이 맞을까 심히 고민되는 제안이었을 테니 말이다.

“여, 영원히 말인가요?”

신의 제안을 믿기 힘들었던 발레리가 시트라에게 되물었다.

“예… 영원히, 아주 쭉, 끝없이, 말입니다.”

“그, 그래서 바, 받아들이셨나요? 아니지, 그런 제안을 받으셨는데, 러셀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시, 신벌이? 시, 신의 분노가!”

“시트라 당신 미쳤군요! 어서! 어서 신전으로 가서 속죄를!”

발레리가 경악하고 엎드려있던 수리아가 버둥거리며 시트라에게 기어가 시트라의 다리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수리아는 시트라가 얄밉긴 해도.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사이인데. 자기랑 경쟁하느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어 혹시라도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만. 한가지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피, 피할 길이라면?”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단 한 남자. 러셀과는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러셀 씨와는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시트라의 말이 끝나자 수리아가 부여잡고 흔들던 시트라의 다리를 툭 밀더니 말했다.

“아니, 요즘은 사제도 거짓을 말하나요? 전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러셀님이 좋다. 사랑한다. 제발 첩이라도 좋으니, 아내의 말석이라도 좋으니, 러셀님 옆에 머물게 해달라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인데. 사제라고 그런 식으로 사기를 치다니, 여기 모인 분들이 무슨 다 바보인 줄 아나요? 시트라, 정말 실망입니다.”

수리아의 말이 끝나자 우호적이었던 이실리엘의 반응도 발레리의 반응도 아주 싸늘하게 변해있었다.

아니, 어느 정도 말이 되어야지. 무슨 순결의 여신이 자기 이단 심문관을 결혼시키겠다는 것도 믿기 힘든데, 러셀을 콕 찍어서 결혼해도 괜찮다고 했다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어떻게 해야 믿어주시는 거죠?”

시트라가 물었다.

그러자 수리아 왕녀가 콧방귀를 뀌며 비아냥댔다.

“흥… 뭐 저기 저 창으로 성스러운 빛이 쏟아져 들어와서 시트라를 비추며, 등 뒤에 무지개라도 뜬다면 믿어드리겠네요. 내 참…”

수리아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리아가 가리킨, 한나 아주머니 집 홀의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창 틈으로 흘러들어오던 빛이, 쭈욱 늘어나며 천천히 시트라를 향하기 시작했다.

수리아가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쭉 늘어난 빛이 시트라에게 멈춰 그녀를 비추더니, 시트라의 머리 위로 주먹만 앙증맞은 무지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섯이 그 모습에 경악하며 시트라를 바라보자. 시트라가 떨리는 입술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요전번에 사고를 치셔서 무지개는 이 정도가 한계니. 만족하라고….”

­털썩

말을 끝낸 시트라가 그 자리에서 짚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진, 진짜라고?”

수리아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

아내 의회의 결과를 밖에서 기다리던 나는 리젤다의 등에 업혀 실려 나오는 시트라 씨의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

“죽? 죽였어!?”

아까 응징하겠다던 이실리엘의 말이 떠올랐다.

리젤다의 등에 축 늘어진 시트라 씨의 모습이라니. 강제로 입맞춤 한번 하려 했다고 시트라 씨를? 그렇게 놀란 마음에 신전으로 달리는 리젤다를 따라가려 할 때 이실리엘이 나를 붙잡았다.

“안 죽었습니다. 러셀.”

왠지 섬뜩한 말.

“그, 러셀?”

나직이 나를 부르는 이실리엘의 목소리가 왠지 섬뜩하게 다가왔다. 나는 한 걸음 다가서는 이실리엘에게서 한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으, 응?!”

“혹시 한 가문과 한 영혼을 구원하는 데 관심이 있을까요?”

‘아, 안 믿어요!’

전생의 이단, 사이비들의 단골 멘트가 떠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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