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174. 3 다음에 왜 6이지? 4
* * *
리젤다와 이실리엘이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며 처형을 한번 봤다가 다시 둘을 바라보자. 둘은 어디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 가고 싶은지 고개를 돌리고 붉어진 목덜미를 한껏 움츠리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키스하려고 했다는 말은 빠졌지만, 저것 또한 팩트.
“확실히 이건 그냥 넘어가기 힘든 문제군요! 리젤다! 아내 의회를 개최하겠어요! 발레리를 어서 불러오세요!”
‘뭐? 뭘 개최해?’
의회라는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이전의 엘프 소의회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또 어딘가 끌려가서 대중 앞에서 아내들을 위한 사랑 고백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
분노한 이실리엘의 단호한 음성 후에, 나를 향한 약간 수줍은 듯한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러, 러셀은 밖에서 좀 기다려 주시겠어요?”
잠시 후. 나는 결국 안에서 한마디도 못 한 채 이실리엘과 리젤다의 손에 이끌려 한나 아주머니의 집 밖으로 끌려 나왔다.
처형이 원하는 대로 뭔가 착착 진행되는 느낌에 불안감을 지울 수 없는 상태였는데, 쫓겨나기까지 하자 불안감이 극대화되었다.
“아니, 나도 말은 하게 해줘야지. 이실리엘, 갑자기 쫓아내면…”
‘내가 없는 곳에서 무슨 말이 있을 줄 알고?’
나는 이실리엘에게 소심하게 항의했다.
“러셀, 이제부터는 여자들의 일입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아니, 당연히 이실리엘은 믿지만 나도 당사자잖아?”
“러셀의 아내로서 아내끼리 할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들 몰래 남편을 탐하려고 한 여자들은 아내들의 권한으로 ‘응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응징이라는 단어에 뭔가 뼈가 느껴지는 기분.
그리고 몰래 탐하려고 한 사람 중에 처형이 있음에도, 나의 우려와는 상관없이 이미 처형은 아내 의회 정회원이 된 느낌이었다.
아내 의회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내들끼리 하고픈 이야기가 있을 때 여는 작은 회의 같은 것인 모양인데, 피고인 아니, 남편의 방어권 따위는 인정치 않는 치사한 아내 의회였다!
내 불만과 우려 섞인 목소리에 이실리엘이 내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무엇을 결정해야 한다면 당연히 러셀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알겠죠? 그러니 기다려 주세요.”
나는 그렇게 한나 아주머니 댁 밖으로 쫓겨나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여관으로 달려갔던 리젤다가 발레리를 데리고 한나 아주머니 댁으로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왜 러셀에게 둘 다 키스하려 하신 거죠?”
이실리엘 대신 날카로운 눈매의 리젤다가 수리아 왕녀를 노려봤다.
왕녀는 저번에도 아내들이 있는 남자인 러셀에게 멋대로 입맞춤했던 전적이 있었다. 당시 둘의 표정을 본 벨이 중재해서 간신히 참았는데, 이제는 마치 러셀이 자신의 것인 양 마음대로 키스하려 했다는 말이 리젤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제님이 러셀에게 키스하려 했다는 말도 쉽게 넘길 수 없는 말이군요.”
자신이 그 더럽고 냄새나고 끔찍한 여관에서 구해온 사제가 은혜를 이런 식으로 되갚으려 한다는 사실에, 발레리는 자기의 새빨간 머리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시트라를 노려봤다.
구해준 은혜를 남편 도둑질로 갚으려 하다니? 그것도 사제가! 그것도 순결의 사제가!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누구보다 순결해야 할 순결의 사제가 부정! 그것도 불륜이라니!
러셀의 세 아내가 맹렬히 분노하며 둘을 다그치고 그 뒤에서 플로라가 신난다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볼 때.
수리아와 시트라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로 침몰했다.
그리고 조금 후 테이블에서 머리를 든 수리아가 아랫입술을 꾹 물더니 떨리는 입술로 절규하듯 외쳤다.
“저, 저희 아니, 저도! 러셀님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행복하고 단란한 러셀의 가정에 폭탄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또 다른 폭탄이 장내에 떨어져 러셀의 세 아내의 정신을 가루로 만들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뭐, 뭐가요?”
시트라의 외침에 놀란 발레리가 되묻자. 들려오는 우렁찬 목소리.
“저도! 러셀님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용기를 얻기 위해 축복까지 빌렸는지 시트라의 손에서는 신성력까지 번쩍거리고 있었다.
혼란이었다. 발레리의 언니까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둘이 더? 이실리엘은 황당한 눈으로 자리에 주저앉았고 플로라는 너희들이 진짜로? 라는 표정으로 둘을 바라봤다.
“왕녀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죠?!”
비교적 빨리 혼란에서 회복된 리젤다가 왕녀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그래 저번에 용서한 키스가 문제였다. 다른 귀족들도 있고 후계문제로 복잡한 상황에서, 연회장에서 키스한 것으로 분란이 일어나면 왕녀에게 불리하다는 벨의 조언 때문에 참은 것이 문제였다.
그때 따끔하게 경고했어야 했는데, 작은 도둑질이 큰 도둑질이 된다고 입술로 시작한 도둑질이 이제는 러셀을 전체를 탐하고 있었다.
“리젤다님, 리젤다님도 북부 출신이니 아시겠지요?”
왕녀의 조용한 목소리.
“무엇을 말입니까!? 남편을 도둑질하려는 것 아니면, 몰래 키스를 하려는 것?”
리젤다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하지만 왕녀에게서 나온 것은 일종의 호소.
“북부 다섯 왕가의 운명을 말입니다. 얼마 전 저의 마지막 핏줄인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수리아의 아버지인 에삭스의 왕이 병석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결국은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모질지 못한 리젤다는 그 말에 조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왕녀는 이제 남은 핏줄이 아무도 없는 오롯한 혼자가 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 그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래서요?”
“북부 다섯 왕가는 인간의 세계를 북에서 몰려오는 마물, 몬스터로 부터 지키는 인류의 방패. 오라버니들도 아버지도 전장에서 또는 전장에서 얻은 병으로 하나둘 쓰러져갔습니다. 제 혈육 중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저 하나. 제 사촌 오라버니가 잠시 왕위를 잇고 있는다고는 하나, 그는 무력이 없는 자. 얼마 되지 않으면 저도 제 사명에 따라 북부의 성벽에서 이 사명을 다해야 하겠지요?”
북부 출신인 리젤다는 그 말에 가슴이 아려 왔다.
왕녀의 말은 자신이 북부 전선에서 죽을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말. 그것이 북부 고위 귀족의 운명이었다.
북부의 땅은 북부의 귀족들이 피로 지켜낸 대지.
북부의 환경은 누구에게나 가혹하지만, 작위가 높을수록 그 가혹함은 더했다. 북부의 귀족 남아로 태어난 자는 어릴 때부터 무기를 휘두르며 무엇인가를 죽이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첫 전장에서 살아남으면 기다리는 것은 죽을 때까지 여러 전장에서 싸우는 것.
지위가 높을수록 당연히 더욱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북부의 격언과 같이, 북부의 전선은 많은 귀족의 피를 대지에 흘리게 했다. 그러니 작위가 높을수록 당연히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
귀족 중에 가장 높은 귀족인 왕족도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법. 아니 어쩌면 더욱더 가혹할 것은 당연한 일.
북부의 아귀 같은 전선은 왕녀의 핏줄에 속한 남자들의 피를 모조리 빨고, 마지막 남은 왕녀의 피까지 요구하고 있었고, 왕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말투였으니. 북부 출신인 리젤다는 그 말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 것.
“그, 그래서요?”
리젤다는 이를 꽉 물었다. 딱한 처지는 알고 있지만 그것과 러셀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이어지는 왕녀의 호소.
“원래 저는 왕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 가혹한 운명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운명에서 도망치려 하는 순간 성벽 뒤 인간의 문명이, 나의 백성이, 수많은 생명이 고통받고 불타오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일깨워 주셨죠.”
왕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운명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쳐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비겁하겠지만 그렇게라도 죽어간 가족들을 생각하며, 남편의 핏줄에 기대어 저희 가문의 남은 핏줄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왕녀는 이제 울먹이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이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는 핏줄을 가진 자. 수리아 나파로아 이 이름에 새겨진, 저의 제 운명이 저를 부르기 전까지. 잠시 현자님 품에서 쉴 수 있게 허락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왕녀는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려 했으나 바닥으로 구르고는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엎드려 버렸다. 왕녀의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리젤다가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려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 그치만 왜, 왜 러셀인가요! 다, 다른 남자도 많은데!”
“리젤다 그만 되었습니다.”
이실리엘의 목소리.
아내 의회의 분위기가 숙연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더 물어서 무엇하겠는가? 답은 나와 있는데. 러셀을 좋아하는 것.
무도회장에 왕녀를 발등에 올리고 춤추던 모습은 아름다웠다. 자신들도 러셀을 졸라 한 번씩 발등에 올라탔으니 말이다.
뭐든지 가장 필요할 때 얻는 것은, 가장 달콤한 것이다. 왕녀도 당연했겠지. 간절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강렬한 기억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겠지.
그리고 운명에서 도망치려던 그녀를 다시 돌려세운 것도 러셀이니, 러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던 것.
한나 아주머니댁의 낡은 창문이 불어오는 바람에 삐거덕대며 흔들리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