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170. 장인과 처형 4
* * *
모두가 잠든 한밤중.
끼이익
조금 피곤한 모습의 리젤다가 러셀의 방에서 나오며 옷매무새를 여몄다. 리젤다는 방안에 잠든 러셀을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끼익
삐그덕
리젤다는 최대한 조심해서 목재로 된 마루 위를 살금살금 걷고 있지만 한밤중, 고요한 가운데 울리는 목재 바닥의 삐거덕대는 소리는 마치 천둥같이 삼 층 전체를 울려대고 있었다.
리젤다가 눈을 질끈 감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목적지로 향했다.
로리엘은 이런 바닥도 소리 없이 잘 지나다니던데. 나중에 꼭 로리엘에게 꼭 방법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리젤다가 목표로 삼은 곳은 이실리엘의 방. 러셀의 방, 바로 옆의 방이다. 이실리엘의 방앞에 도착한 리젤다가 손을 들어 조심히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달카닥
그러자 조심스럽게 방문이 열리고, 무엇인가로 가린 마력 등불의 희미한 빛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새빨간 머리카락의 발레리였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미안합니다. 발레리. 러셀이 놓아주질 않아서요. 이제야 잠이 들었네요.”
“아니에요. 고생하셨어요. 어서 안으로.”
리젤다가 안으로 들어서자 잠옷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았던 이실리엘이 리젤다를 환영했다.
“어서 오세요. 리젤다. 피곤할 텐데.”
“아뇨, 이실리엘님, 당연한걸요. 저도 러셀의 아내니까요.”
침대에 걸터앉은 이실리엘을 중심으로 발레리와 리젤다가 침대 앞에 높여있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실리엘이 각자의 자리 잡은 둘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며 둘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실리엘이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침대 위에 있던 자기의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좀 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세계수의 가지 앞에서 생명과 진실을 존중하며, 아내 의회의 문을 열겠습니다.”
이실리엘의 말이 끝나자 세계수의 가지가 아주 천천히 녹색으로 반짝였다. 리젤다와 발레리가 멍하니 그 불빛을 바라보자. 이실리엘이 나직이 말했다.
“자 어서 가지에 손을.”
워낙 엘프의 문화와 전통을 동경했던 리젤다는 망설이지 않고 가지로 손을 뻗었다. 언제 이런 신비한 엘프의 문화를 접해본단 말인가.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실리엘이 러셀과 세계수에 방문할 때 자신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그때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신비한 경험을 직접 눈앞에 두자 세계수의 가지가 뿜어내는 빛에 빨려들 듯 손을 가져다 댄 것이었다. 리젤다가 가지에 손을 대자 가지에서 시작된 빛이 리젤다의 손끝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곧 리젤다의 손끝에서도 녹색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시, 신기해요!”
“쉿!”
리젤다가 그 신비로움에 큰 소리를 내었다 이실리엘에게 바로 제지당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부디 들키지 않게 조용히. 자, 다음은 발레리.”
이실리엘이 발레리를 호명하자. 잠시 망설이는 모습의 발레리도 조심스레 가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발레리의 손에서도 녹색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시, 신기합니다. 이실리엘님.”
녹색 불빛 아래 발레리의 상기된 얼굴이 드러났다 사라지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자,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이제 설명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손의 불빛을 가리고 있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가린 손을 치우고 손을 들어 불빛을 높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발언권을 드리지요. 기억하셨습니까?”
“예!”
리젤다가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발레리는 조금 이상한 마음에 이실리엘에게 물었다.
“저 이실리엘님 저희 셋밖에 없는데 그냥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분명 평소에도 셋이 이야기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이런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 발레리로서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의 그 말에 이실리엘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발레리의 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셋이 은밀한 비밀 이야기를 한다는 데만 정신이 팔려 엘프 의회의 전통을 따라 하긴 했지만, 확실히 번거로운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 그것이….”
이실리엘의 발레리의 지적에 난처해할 때. 이실리엘의 머리 위로 녹색의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실리엘이 눈을 들어보니 리젤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리젤다가 매서운 눈매를 더 매섭게 하며 발언권을 요청하고 있었다.
“리, 리젤다 마, 말씀해 보세요.”
“예! 이실리엘님 발언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레리! 지금 그 말은 무례한 말이었습니다. 우리 러셀 아내들의 수장은 이실리엘님. 이실리엘님은 높은 엘프. 그러니 당연히 저희도 높은 엘프들의 전통을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리젤다의 입장에서는 엘프의 전통이라는데 왜 이것이 번거로운 일이 된다는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려 ‘높은 엘프의 전통’이라는데 말이다.
매서운 눈빛을 빛내는 리젤다의 말에 발레리는 흠칫하며 곧바로 이실리엘에게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실리엘님 제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아, 아니에요. 발레리, 발레리는 에, 엘프의 전통이 처음이니. 그, 그럴 수 있습니다.”
이실리엘은 리젤다에게 마음속으로 큰 고마움을 느꼈다. 역시나 자기와 가장 오래 함께했던 둘째 아내다웠다.
‘고마워요. 리젤다.’
그리고 재빨리 주제를 바꿔 본론을 꺼내 들었다. 부끄러움을 재빨리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오늘 저희가 여기 모인 진짜 이유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하죠.”
주의를 환기한 이실리엘의 말에 리젤다도 발레리도 이실리엘에게 집중했다.
그래, 그녀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아주 중요한 일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발레리의 언니 플로라에 대한 것 말이다.
어제 발레리는 양가에 다 축복받는 완벽한 혼인 상태가 되었다. 그간은 분명히 러셀의 아내였지만 반쪽뿐인 느낌이었다면 아버지께 허락받는 순간 몸으로나 마음으로나 사회적 전통으로나 완벽한 러셀의 아내로 인정받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쁘고 축복받은 날이었지만 발레리의 아버지가 마지막에 했던 한마디에 셋 아니, 넷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일곱째 딸 플로라까지 넘겨준다는 말.
넷 다 그 엄청난 말에 충격을 받아서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멍해지긴 했지만. 곧 정신을 차린 러셀이 현장을 수습하려 발레리의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다.
“자, 장인어른 무슨 그런 농담도! 하하하….”
러셀은 발레리의 아버지가 좋은 날이라 재미있는 농담을 한다면서 웃었지만, 발레리의 아버지는 정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 아니네, 사위. 뭐 다른 건 모르겠지만 외모는 발레리보다 나을 거야. 다들 그렇다고 하니까 말이지…. 어휴 내 이렇게 되었으니 솔직히 말함세. 원래는 높은 엘프의 남편이라는 자네와 가족이 되고 싶어서 저 녀석을 데려온 거라네, 내 딸 중에 미모로는 제일이니 말이야. 뭐 다른 문제는 좀 있지만…. 저 녀석을 자네에게 내어주고 발레리는 다시 데려가려 했는데, 이미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니 어쩌겠나. 내가 포기해야지. 그리고 어차피 자네를 위해 데려온 거니 자네가 그냥 데려가게. 뭐 백단목 가격으로는 부족하긴 하지만, 뭣하면 내 다섯째도…”
“지, 진정하십쇼 장인어른!”
얼떨결에 넘겨받으라 압박 받는 발레리의 일곱 번째 언니를 거절하려 했다가 다섯째까지 떠맡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넷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 때. 자기를 자기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던 발레리의 언니 플로라의 입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솟아 나왔다.
“뭐야! 영감탱이! 다 그런 꿍꿍이였어? 같이 상행 갔다 돌아가면, 무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앞으로 신경 안 쓰겠다던 이유가 다 그런 것이었다니! 쳇…”
언니가 짜증을 낼 때 발레리는 조금 희망을 품었었다. 언니는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 서부의 전통대로 아버지가 혼처를 마음대로 결정하더라도, 언니가 싫다고 난리를 치면 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이 자라면서 언니는 항상 그랬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뭐든지 했으면 자기보다 잘했을 일곱째 언니인데, 언니의 특징은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언니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순히 순종한 적이 한 번도 없는…그런 언니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뭐 평생 하렘에 속에 처박히거나 아무도 것도 모르는 놈의 집에 시집가는 것보다 좋은가? 발레리랑 서로 의지도 할 수 있으니? 아니야, 생각해보니까 좋은 점만 있잖아? 여긴 남부니까 물이 흔해서 아까 저녁에 했던 목욕도 실컷 할 수가 있고?”
발레리의 언니가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짝’하고 치더니 말을 이었다.
“여관이니까 발레리가 노래 부르고 내가 춤을 출 수도 있잖아? 세상에!”
그녀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난다는 것인지 혼자 연신 기뻐하더니, 어느새 러셀의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자기, 앞으로 잘 부탁해요!”
“네엣?!”
러셀이 어느새 낀 팔짱을 빼며 화들짝 놀라 소리치자. 발레리의 언니 플로라가 어이없다는 투로 러셀을 보면 말했다.
“아니, 결혼 한두 번 해보는 사람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놀라요. 자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