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69화 (169/352)

〈 169화 〉 167. 장인과 처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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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정이었다.

서부의 모레 사막을 지나 중서부의 불모지와 협곡, 젊을 때는 몇 번이나 오가던 곳인데, 이제는 나이 때문인지 깊은 피로감이 쌓이고 있었다.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마차 바퀴의 진동에 따라 움직이는 노구는, 마차라면 응당 느껴질 이런 평범한 진동마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넉 달에 가까운 긴 여정의 상행은 노구인 발로란 루테니아에게 이제 힘에 부치는 일인 것이다.

은퇴를 생각할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직접 노구를 끌고 상행에 나선 이유는 그의 막내딸 때문이었다.

늘그막에 본 마지막 아홉 번째 딸. 어미를 닮아 사막의 태양 노을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름답고 예쁜 딸. 더군다나 재산만 밝히는 다른 자식들과는 다르게 순수하고 순종적이며, 장사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는,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막내딸이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물건 대금의 볼모로 잡혀있는 것이었다.

발로란은 모든 자식이 소중하다는 말은 헛소리라 생각한다. 자기 집에는 소중한 막내 하나와 철부지 여덟 명이 있으니까 말이다.

여덟을 다 준다 해도 결코 발레리 하나와 바꾸지 않을 그런 소중한 딸인데, 그런 발레리가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은 발로란의 가슴을 찢어지듯 아프게 했다. 그래서 발로란은 자식 중 가장 소중한 막내딸을 직접 데려오기 위해 노구를 끌고 긴 여정에 나선 것이었다.

마차 뒤에 누워서라도 가면 될 것인데 이렇게 발로란이 친구인 멜빈과 제일 앞좌석에 탄 이유. 그것은 그들이 목적지로 하는 장소가 곧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목을 빼고 강줄기를 따라 난 길을 바라보길 한참.

“이 친구야 그러다 목 빠지겠네.”

“허허, 우리 발레리가 있다는 곳이 곧 나온다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친구인 멜빈이 마부석에서 자신을 놀려왔지만, 발로란은 그 소리에 아랑곳 앉고 이젠 숫제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발로란의 노안에 저 멀리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좁은 길 끝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둘, 솟아오르는 연기가 많아지며 그것이 누군가의 야영지가 아닌 마을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자리에 일어서 좀 더 멀리 보려던 발로란의 시야에 이런 외진 곳에 있기에는 조금 큰 마을 하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저곳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곳에 내 귀여운 딸이 있는 것이로구나!’

발로란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고 있었다. 마부석의 멜빈이 그런 발로란에게 웃으며 물었다.

“이 친구 막내딸이 그렇게 좋은가?”

“자네도 딸 낳아보게 궁금하면 말이지.”

“아니, 자네 발레리 말고도 딸이 많지 않은가?”

“이 친구 다른 것들은 자식이 아니고 다 원수네 원수!”

멀리 보이는 마을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로란의 가슴도 가까워지는 마을만큼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발로란은 여정의 끝에서 처음 이 여정의 시작을 떠올려보았다. 자기 친구가 상행에서 돌아왔던 때를 말이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부터 다른 귀족 가에 들어갈 물품들을 챙겨서 내보내고, 집무실에서 서류정리를 하고 있던 그때. 멜빈이 발레리와 먼 남부로 떠난 상행이 되돌아왔다는 연락이 도착했다. 발로란은 곧장 마차를 타고 상단의 창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마차를 달려 도착한 곳에는, 멜빈이 하역 물품을 확인하고 있었다.

발로란의 앞으로 질 좋은 생가죽들이 마차에서 연신 내려지고 있었고, 내려지는 생가죽들은 화살 구멍, 창구멍 하나 없는 아주 상등품의 가죽이었다. 어디서 저런 가죽을 구했을까? 궁금함도 잠시.

그 후에 내려진 것은 단단해 보이는 곤충 같은 것의 껍질. 부식성 개미산을 상대해야 하는 서부에 가장 필요한 재료로 보였다.

역시나 자기 친구 멜빈 이었다. 역시나 현장에서 수완 좋은 친구. 발레리도 멜빈에게 많은 것을 배웠겠지? 라고 생각하며 멜빈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나눴다.

“다녀왔는가? 멜빈, 수고했네.”

“허허, 발로란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나 이거 지치는구먼.”

오랜만의 본 친구의 얼굴은 마지막 보았을 때보다 더 늙어 보이는 듯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이제 친구도 쉬어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멜빈이 상행을 다녀온 마차에 짐꾼들이 달려들어 연신 물건을 내리고, 내려진 물건들이 창고로 옮겨지고 있는 모습을 살피던 발로란은 이상함을 발견했다.

물건이 옮겨지는 것을 감독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발레리가 보이지 않는 것.

“그런데 발레리는 어디 있는데 물건 확인도 안 하고 아비도 보러 오지는 않는 건가?”

“아, 발레리가 그것이….”

발로란이 발레리에 대해 언급하자 멜빈이 말끝을 흐리며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이 발로란의 눈에 들어왔다.

‘서, 설마? 바, 발레리에게 무슨 일이?’

“설마! 상행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내 아가! 소중한 내 막내딸 발레리가!”

발로란은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막내딸이 자신이 보낸 상행에서… 발로란은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 사람 놀라지 말고 이야기를 들어보게 발레리는 무사하네”

멜빈이 주저앉은 자신을 부축하며 발레리가 무사함을 알려왔다. 그런데 그렇다면 대체 발레리는 어디 갔단 말인가?

“그, 그럼 발레리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이…”

발로란을 멜빈을 데리고 집무실로 이동했다. 밖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했으니 마음이 급했지만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

그리고 멜빈이 이야기의 시작과 꺼낸 물건 하나에 발로란은 발레리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순간보다 더 놀라고 말았다.

“이, 이것이 대체! 내, 내가 보는 것이 그것이 정녕 맞는가?”

“허허, 이 사람아 맞지! 당연히 맞지! 허허…”

“아니, 대체 무슨 돈으로 이걸 구해왔단 말인가? 아니, 분명 남부로 간 것이 아니었나? 북부에서나 가끔 나오는 물건을 대체 어떻게?”

그래, 백단목이었다. 아니 북부 왕국에서나 가끔 흘러나오는 물건이 대체 남부로 상행을 떠난 멜빈의 손에 들려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귀족들을 위한 사치품만을 취급하던 루테니아 상단에서도 몇 년 전, 단 한 번 취급해본 그런 물건. 백단목을 취급하기 전의 루테니아 상단은 지금의 절반 정도의 규모였다. 그때 취급한 백단목은 이것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크기.

발로란은 장갑을 끼고 백단목을 조심스럽게 들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천으로 감싼 후, 가장 좋은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이걸 대체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상행에 들려 보낸 돈은 백단목을 사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금액. 대체 부족한 돈은 무엇으로 충당했단 말인가?

“이것은 다 발레리가 구한 것이라네.”

멜빈의 말은 발로란을 충격에 빠트렸다.

‘설마! 이것을 구하기 위해서 발레리가? 아니, 나한테는 소중한 발레리지만 발레리를 팔아도 이것을 사지는 못할 것인데?’

물론 자신에게 발레리는 수천 대 금화의 가치이지만 상인의 감각은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함을 일깨워주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함에 미치고 싶을 때.

“자네 정말 막내딸 하나 잘 키웠더군!”

쏟아지는 멜빈의 칭찬. 멜빈의 입에서는 발레리의 칭찬만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남부에 도착할 때까지는 긴 상행이 처음이라 지치고 힘든 모습이었는데, 남부에 도착하자마자 기운을 회복한 발레리가 작은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더니, 그곳 여관주인과 그 아내인 높은 엘프에게서 신임을 얻어 백단목을 거래해냈다는 말에 발로란은 전율했다.

그래! 그 아이에게도 나를 닮아 뼛속까지 상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않겠나! 발레리가 그런 딸이라네!”

그리고 발레리가 물품 대금을 보증하기 위해 현지에 볼모로 남았다는 부분에서 자신과 멜빈은 눈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흑… 내가 그렇게 발레리가 자신이 직접 남아 지급 보증을 하겠다는데… 흑… 이놈의 백단목이 무엇인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것이 그렇게 마음 씀씀이가 제 애미를 닮아서… 발레리야… 훌쩍…”

애비와 상단을 위해서! 그 먼 곳에 그 작은 마을에 혼자 남겨지다니! 발로란은 시린 가슴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 더 이익을 볼까 고민했겠지만, 백단목을 두 조각으로 나눠 적당히 정치적 물질적 이득을 보고 팔아치웠다. 발레리를 데리러 가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백단목이 정리되자마자 부리나케 상행을 출발시켰다.

그리고 몇 달간의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목적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저 앞에 보이는 마을, 그곳에 자신의 어여쁜 딸 발레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발레리를 다시 만난다는 기쁨 속에서도 발로란은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았다.

상인은 눈앞의 이익만은 쫓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한가지 물품으로 한가지 이익만을 취하는 것은 아주 초보 상인이나 하는 짓. 자신은 한가지로 두세 가지 그 이상, 그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대상인.

그렇기에. 이번에는 발레리도 되찾고 높은 엘프의 남편과 좀 더 가까운 관계도 되고, 한 번에 여러 가지 이익을 볼 수 있는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점검했다.

그리고 마차 뒤 칸을 보며 이번 거래를 위해 가져온 그것을 다시금 힐끔 확인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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