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166. 앙숙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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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그렇게나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시더니. 의외로 두 분은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저렇게 전장에서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니 말이다.
그래, 전장에서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의 친한 사이인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선물. 그래, 선물이었다…. 선물… 맞겠지?’
시트라씨의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 용병하나가 인간으로 만들어진 탄환처럼 수리아 왕녀에게 날아들자. 왕녀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모닝스타를 야구선수처럼 양손으로 휘둘러 날아오는 용병의 머리를 단숨에 부숴 버렸다.
퍼석
날아오던 용병의 머리통이 모닝스타에 깨져나가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홈런?’
선물이 마음에 들었던지, 뭔가 답례의 말을 하려 했다가 입술을 움찔거리는 것으로 참아낸 수리아 왕녀가 답례품을 시트라씨에게 보냈다.
자기 앞에 무릎과 양손이 망가진 용병을 발로 쭉 시트라 씨에게 밀어버린 것이다.
“답례입니다!”
수리아 왕녀의 목소리가 시트라 씨에게 전달되고, 용병이 얼음판에 미끄러지듯 시트라 씨에게 밀려가자 시트라 씨가 발로 용병의 머리통을 트래핑 하듯 멈춰 세웠다.
그리고 자기의 메이스를 마치 골프채를 휘두르듯이 퍼 올려 용병의 머리통을 그대로 지워버렸다.
부웅
“나, 나이스샷!”
엉겁결에 터져 나온 말. 목책 위의 사람들과 아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하…”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 후 싸우는 둘을 바라보며 외쳤다.
“자, 잘한다! 하하…”
하지만 나의 응원은 들리지 않는지 둘은 서로 바쁘게 선물만 교환하고 있었다.
“선물입니다!”
“답례입니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금 등급 용병이 둘의 메이스와 모닝스타 사이에서 곤죽이 되고, 둘의 애정 어린 선물 교환이 막을 내리자. 마을 앞 평야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다리 사이에서 노란 액체를 흘리며 주저앉아있는 사십 대, 여 남작뿐이었다.
“히, 히끅… 사, 살려주세요!”
시트라 씨와 수리아 왕녀가 천천히 여 남작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생존자가 없으면 귀찮을 일도 없다!”
“생존자가 없으면 귀찮을 일도 없다!”
동시에 터져 나온 둘의 똑같은 말에 둘도 놀랐는지. 서로를 잠깐 바라보다 수줍게 둔기를 살짝 깡 부딪치고는, 둘의 말대로 마지막 남은 생존자인 여남작을 가차 없이 다진 고기로 만들었다.
‘괘, 괜찮겠지?’
아침 운동을 거하게 끝내시고 배가 고프다는 둘을 여관으로 모시고 왔다. 그래, 그렇게 움직였으면 배가 고플 만도 했다.
아침의 난리로 인해 메뉴는 다소 단출한 콩과 채소를 넣은 귀리죽과 빵이었는데, 아침부터 힘을 쓰신 두 분에게는 좀 부족할까 싶어서, 창고에서 꺼낸 베이컨도 굽고 훈제한 고기도 꺼내 구워 대접했다.
“고기에서 나는 허브향이 너무 좋네요!”
수리아 왕녀가 훈제한 고기를 연신 입안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이분 성격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북부에서 봤을 때는 당당하고 당찬 면이 있는 무난한 성격 같았는데 지금은 뭐랄까? 조울증에서 울증은 사라지고 조증만 남은 상태?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이 항상 높아진 상태였다.
이분이랑은 이야기가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시트라 씨를 바라보며 의견을 물었다.
“혹시 오늘일 문제는 안 될까요?”
시트라 씨는 내 말에 귀리죽을 입에 넣고 음미하시다 재빠르게 씹어 넘기고는, 입을 조심히 가리며 말했다.
“감히 성국의 이단 심문관을 살해하려고 한 놈들이니, 극악무도한 범죄자입니다. 도리어 성국을 통해 압박을 할 수도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그럴듯하긴 한데…’
“그런데 이게 처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같은 영지의 영주와 병력을 두 번이나…”
그래 첫 번째는 나쁜 놈이라서 처단했고 성국이 보증까지 했으니 왕국에서 아무런 말이 없을 수 있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우리 마을에서 두 번이나 같은 영지의 영주를 살해한 것이 되는 것이다. 보통은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귀족 살해는 사형이니….
내 말에 밥을 먹다 말고 왕녀가 흥분한 투로 외쳤다.
“북부 다섯 왕국 왕가의 혈통에 칼을 들이대다니, 죽음이 마땅하죠!”
‘아니, 그래서 왕국에 항의라도 하시려고요? 아주 북부에서 새 국왕께서 그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시겠습니다?’
“왕녀님은 여기 계신 거 비밀 아닌가요?”
“아 참!”
분명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핑크 머리 공주는 상종하는 게 아니랬는데, 그거 생각보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핑크 머리 공주들이 생각 없고 가슴만 크고….
전생의 생각에 왕녀의 가슴을 슬쩍 보았는데 ‘크흠…’ 생각보다 크진 않았다.
‘왕녀님 분명히 이런 이미지 아니었는데…’
나는 조용히 그녀의 접시에 구운 훈제 고기를 덜어 올렸다. 이분은 드시는 게 나를 도와주는 일인 것 같았다.
“마, 많이 드세요. 왕녀님.”
결국 한참 대화 끝에 복잡한 정치적 문제는 시트라 씨가 떠맡는다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전리품 수거와 전장 정리는 이미 촌장님과 마을 사람들이 맡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영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농도들도 기운을 차리면 영주가 사라진 자기들의 마을로 돌아가겠지?
제발 다음 영주는 좀 더 정상적인 사람이 임명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복잡한 머리나 식힐 겸. 그간 미루어 왔던 나의 거대 프로젝트를 실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장 담그기.
결연한 얼굴의 아내 셋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이들의 표정이 이렇게 결연한 이유. 그것은 내 입에서 시작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솥에 콩을 삶으며 시작된 나의 설명.
“보통 이건 집마다 만드는데 방법이 조금씩 다르고 집안의 전통이랄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었지.”
전통이라는 말에 아내들이 결연하게 모여든 것이다.
이곳에서는 가문, 전통이라는 단어가 엄청난 무게를 가진다. 혈통이나 핏줄같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나 지식, 무형의 재산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평민이기에 가문이나 전통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실리엘은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사랑하는 엘프, 리젤다와 발레리는 귀족 출신이니, 전통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남다른 것 같았다.
장을 만드는 것이 전통이고 시어머니께서 며느리에게 전수해준다는 말에 무슨 윗대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비밀이라도 담긴 듯. 내 설명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내 앞에서 셋이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콩을 물러질 때까지 삶는 거야.”
내 앞에는 솥에 불린 콩이, 거품을 내며 삶아지고 있었다.
“콩을 물러질 때까지.”
발레리가 양피지에 내가 설명하는 내용을 적고 있고, 이실리엘과 리젤다가 그것을 같이 보며 확인하고 있었다.
끓어 넘치는 거품을 걷어내며 콩 삶기를 한참. 늘어 붙지 않게 뒤적거리며 삶던 콩을 몇 알 꺼내어 얼마나 익었는지 살펴본다.
“자 이렇게 손으로 눌러봐서 콩이 충분히 익었다 싶으면 다 꺼내는 거야.”
된장과 간장은 한국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식품이다. 국을 끓이거나 음식을 할 때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것이기에, 내가 살았던 현대에도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의존도가 높았고, 딱히 다른 조미료가 없었던 과거에는 더욱더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이 된장. 간장 하면 어렵게 생각하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음식은 아니다.
콩을 부드럽게 으깨질 때까지 삶아서 사각 또는 원형으로 빚은 후 지푸라기로 묶어 한 달에서 석 달 정도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공간에서 말려두었다가. 일정한 염도의 소금물에 담가 발효시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일정한 염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달걀을 소금물에 띄워 수면 위로 떠 오르는 크기로 염도를 확인했다. 이곳에는 염도계가 없으니 나도 그렇게 진행할 것이다.
그렇게 모든 과정이 끝나고 발효가 끝난 콩은 된장이 되고, 발효가 끝난 물은 간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
오늘은 일단 메주만 만들어서 띄우기로 했다.
우리는 삶은 콩을 빻아 사각형으로 빚은 후 지푸라기를 깐 창고에 보관했다.
“그냥 두면 아랫부분은 썩을 수도 있으니 하루에 한 번쯤 뒤집어 줘야 해 알았지?”
내가 세 아내에게 주의 사항에 대해서 설명했다. 보통 메주는 새끼줄에 매달아 띄우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표면이 말라야만 그렇게 메달 수 있는 것. 처음에는 이렇게 지푸라기를 깐 위에 올려 표면을 말린다.
물론 주의할 점도 있다. 뒤집어 주지 않으면 깔린 부분이 썩어버릴 수도 있는 것. 그러니 처음에는 한 번씩 뒤집어서 골고루 말려줘야 하는 것이다.
“네 저희가 돌아가면서 할게요. 러셀!”
이실리엘을 대표로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관을 세우면서 야심에 차게 마음먹은 것은 이계의 주막 주인, 주모였는데 된장이 없어서 주막의 시그니처 메뉴인 국밥을 제대로 서비스 못 해봤단 말이지?
몇 달 뒤 된장과 간장이 생기면 어떤 음식을 만들까? 기대되는 메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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