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 164. 앙숙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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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이른 새벽 목책 입구에서 쏘아진 소리 화살 두 발은, 새벽의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마을 광장을 지나, 아침의 햇살을 받아 백색으로 밝게 빛나는 신전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평온한 시골 마을의 하늘을 찢어발기듯 가로지른 두 발의 화살에 온마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그 소리를 신호로 하듯. 아침을 준비하던 아낙들이 놀라 집 밖으로 뛰쳐나오고, 해가 완전히 떠올라 더워지기 전, 농지를 돌아보러 목책 밖으로 나가려던 마을 남자들은 화들짝 놀라 각자의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채집과 사냥을 나가려 준비하고 있던 평원 엘프들과 수인들도 무장하고 목책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화살 두 발은 습격의 예고. 무장한 병력이나 몬스터의 무리가 몰려오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러셀이 마을에 군권을 책임지기로 한 후 만든 신호 체계이다.
소리 화살 한 개는 무엇인가 온다. 확인을 위해 러셀은 목책으로 와달라.
두 개는 무장한 병력이나 몬스터가 많이 온다. 모두 목책 입구로 집결 바람.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내 귓가에 들려오는 신호 화살의 날카로운 소리. 나는 곧바로 하던 음식을 애니와 한나 아주머니에게 넘기고 홀로 뛰쳐나갔다. 무장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나의 모습과 신호 화살 소리를 들은 에반과 수리아 왕녀 그리고 용병들이 이른 아침부터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헐레벌떡 부엌에서 뛰쳐나온 나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무슨 일이죠 형님?”
“무슨 일인가요? 러셀님.”
“무장한 병력이나 몬스터가 마을로 몰려오고 있다는 신호인 것 같은데….”
신호 체계를 모르는 인원들에게 내용을 설명하는 와중에 여관 입구로 평원 엘프 하나가 급하게 뛰어 들어오더니 깊은숨을 토해내며 외쳤다.
“헤윽… 헥… 러, 러셀님! 무, 무장한 병력이… 이, 이백 명쯤… 헉헉….”
평원 엘프의 보고에 며칠 전 목책으로 몰려와 수색을 요구하던 파텔 영지 기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리아 왕녀가 깡통까지 구기며 무력 시위까지 했는데, 병력을 저렇게 많이 끌고 왔다는 건 뭔가 믿는 게 있다는 소리.
‘바람이 잘 날이 없구나.’
간만에 이실리엘에게 실리아를 불러내서 전기구이 통닭으로 조리하라고 할까? 아니면 로리엘을 내보내서 푸주 간을 열어볼까? 그것도 아니면 직접 나서서 화살을 머리통에…? 아니, 이건 화살 고추인지 그것 때문에 보류.
내가 오래간만에 몰려온 손님들을 어떻게 조리할지 궁리하는 중에 홀에서 신이 난 두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야? 싸움인가?! 아침부터 몸 풀고 좋구만!”
“훈련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겠군!”
벨릭과 안톤이 저희 맘대로 한껏 신이나 각자의 숙소로 달려가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런 벨릭의 모습에 에브리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벨릭의 뒤를 따라 뛰어 사라졌다.
나도 그 모습을 따라 그만 이층으로 오르려는데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셀님, 습격이면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수리아 왕녀였다.
“왕녀님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머!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괜찮아요. 괜찮아. 아침 식사 전에 가벼운 운동일 텐데요.”
하긴 뭐 오우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이셨으니. 어떤 운동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이실리엘이나 로리엘 구경이나 하시라고 허락해 드렸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먼저 이동하겠습니다. 에이미와 나나가 도와드릴 겁니다.”
평상시 거동이 불편한 왕녀의 특성상 항상 수발이 필요했기에 왕녀는 상당한 거금을 여관에 지급했다. 무려 금화 한 개. 덕분에 토끼 수인 자매는 왕녀 전담이 되었다.
나는 토끼 수인 자매에게 왕녀를 부탁하고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러셀 어서요!”
발레리의 도움을 받으며 이미 준비를 거의 끝낸 것으로 보이는 이실리엘과 리젤다가 삼 층으로 올라오는 나를 보며 외쳤다. 나는 셋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챙겨입고 이실리엘이 청혼 선물로 준 활을 들고 아내들과 목책 입구로 내달렸다.
달리는 내 뒤로 어느새 준비를 끝낸 수리아 왕녀와 에반, 벨릭과 에브리나가 따르고 있었고 신전 쪽에서도 무장한 시트라 씨와 두 상급 사제가 뛰어나와 우리와 합류했다.
그리고 다다른 목책 앞.
목책 위에 올라 밖을 내려다보니 화살 사거리 너머에서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숫자는 이백에서 이백오십 명 내외, 백여 명은 정규군 나머지는 용병들로 보였다.
제법 잔뼈가 굵은 용병과 병사들인지 일반적인 궁수가 아닌, 엘프들의 활 사거리 너머에 진을 친 것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일반 인간 궁수들의 사거리가 이백 미터 내외라면, 엘프 궁수들의 사거리는 그 두 배 이상. 저기다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전투에 능숙하고 경험이 많다는 소리이다.
껄렁껄렁하게 보이는 용병들도 칼같이 진형을 짜고 있는 게, 확실히 일반 어중이떠중이와는 달라 보였다. 다시 돌아와서 까불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잠시 후. 놈들은 대형 직사각 방패를 전면에 배치해 화살을 방어하며 목책 문 입구까지 천천히 밀려왔다.
‘공격을 하려는 거 같지는 않고 최후통첩쯤 되려나?’
다가오던 병력이 한 오십여 보를 남겨놓고는 멈춰 서더니, 그 방패 진형 가운데서 웬 사십 대 여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목책 위에 몰려든 우리를 보고 소리쳤다.
“저는 파텔의 영주 파멜라 필그린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제 농노와 노예들을 돌려받기 위해서입니다. 제 기사에게 들어보니 제 농노와 노예들이 이곳에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반환을 거부하셨다고? 귀족의 재산을 도둑질하려 한 죄는 모두 사형인 걸 아십니까? 하지만 관대한 저는 제가 잃은 농노와 여자 엘프들만 돌려주신다면 이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마을 사람과 엘프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이게 웬 신기한 개소리인가 하는 표정을 지을 때.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목책 위에 선 엘프들을 죽 둘러보던 파멜라라는 여자가 손가락으로 이실리엘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제가 아꼈던 엘프 하나가 저기 서 있는 게 보이는군요. 자 어서 돌려주시죠. 제 엘프들을.”
웬 미친년이 남의 아내에게 노예라는 둥, 지가 아끼는 엘프라는 둥 개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내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그 말에 대체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져있을 때. 옆에서 벨릭이 참지 못하고 꽥하니 소리를 질렀다.
“아니, 무슨 다 늙은 창녀같이 생긴 년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너, 이년아 우리 형수님보고 무슨 개소리냐? 혓바닥을 잡아 뽑아버릴까?”
벨릭의 욕설에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창녀라고!? 저, 저런 무식한 털북숭이 새끼! 어, 어디 감히 귀족에게 그따위 망발을!”
벨릭의 어떤 말이 저 여자를 화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벨릭의 욕설에 화를 펄펄 내며 자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싹 다 잡아 죽이고 엘프들은 상처 없이 잡아들이세요! 특히 저 털북숭이 새끼는 꼭 살려서 데려오세요. 제가 직접 갈가리 찢겠습니다!”
그리고 벨릭을 향해 펄펄 뛰던 여자는 자기 병력을 향해 싹 바뀐 얼굴로 물었다.
“제가 항상 하는 말이 뭐죠?”
여자의 말에 여자의 진형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생존자가 없으면 귀찮을 일도 없다!”
외침을 끝낸 용병들이 킬킬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와 기세에 마을 주민들과 평원 엘프들이 움찔하며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일 때였다.
놈들이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고 실실 웃으며 공격을 시작하려는 찰나. 마을 주민들과 엘프들이 섞여 서 있는 목책 위 사람들 사이에서, 두 명의 광소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
“호호호호!”
두 여자의 찢어질 듯한 광소.
‘우리 쪽에도 미친년이 있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웃음의 주인을 찾는데 또다시 들려오는 둘의 목소리.
“생존자가 없으면 귀찮을 일도 없다? 아주 좋은 말입니다!”
“생존자가 없으면 귀찮을 일도 없다? 아주 좋은 말이네요!”
그리고 그 웃음과 목소리가 끝나자 목책 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놈들의 병력이 몰려있는 중앙으로 마치 방어를 위해 발사된 두 발의 포탄처럼 두 줄기의 혜성이 쑤셔박혔다.
콰광
핑크와 은빛으로 반짝이는 두 혜성이 처박힌 자리에서 피 분수와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피 분수와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 안에서 한 손에는 머리통만 한 철재 라운드 쉴드를, 한 손에는 모닝스타와 메이스를 각각 손에 들고 충돌의 충격에 피떡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 두 여자가 일어서며 외쳤다.
“살아서 되돌아갈 생각은 버리시는 게 좋습니다. 지금 이곳에 모인 것은 모두 악인! 신의 이름으로 순결한 마음이 없는 자들은 모두 소멸입니다.”
“다들 그대로 누워 계시죠. 저는 적들이 제 앞에서 감히 바로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일어서려는 놈은 전부 북부의 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수리아 왕녀님과 시트라 씨가 등을 마주 대고 각자의 앞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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