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64화 (164/352)

〈 164화 〉 162. 앙숙 7

* * *

“감히 어디서 행패입니까?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알고!”

매서운 눈매로 소리친 왕녀는 말에서 내려 기사가 들고 있던 깡통을 들어 종잇장처럼 꾸깃꾸깃 접더니 땅바닥을 구르는 기사의 품에 툭 하고 던져주었다.

그리고 수리아 왕녀는 다른 기사와 병사들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외쳤다.

“꺼지지 않으면 투구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버릴 테니 당장 꺼지십시오.”

목책 앞에 몰려왔던 기사와 병사들은 구겨진 깡통을 한번 보고 몸서리를 치더니, 서둘러 본인들이 왔던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려 사라졌다.

그렇게 목책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엘프들에게까지 괴물 같은 힘을 과시해 공포감을 심어준 왕녀는, 마을 안으로 들어오더니 마치 다른 사람인 듯 목소리를 싹 바꾸고는 내게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내왔다.

“러셀님! 저 와버렸어요! 현자님의 조언대로 가장 멀리 피신하는 중입니다!”

“그, 자, 잘하고 계시는군요.”

나는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머리를 한번 흔들고, 그녀가 탄 말로 다가가 예법대로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으로 수리아 왕녀를 맞이했다. 왕녀는 수줍게 손을 내밀어 내 인사를 받고는 부끄러웠는지 볼이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어, 어서 오십시오. 왕녀님. 처남도 어서 와.”

“형님, 제가 어떻게 온 거냐 하면 말이죠.”

“말 안 해도 대충 알겠어. 오랜만에 왔으니까 푹 쉬다가 가라고”

안 봐도 왕녀를 피신시키기 위해서 먼 곳을 찾다가 누군가 가장 먼 남부 이야기를 꺼냈겠고, 생각해보니 현자님이 남부 출신이네? 더군다나 내 곁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니 남부 확정. 내 여관 확정.

그리고 왕녀를 피신시키려면 동행이나 길잡이가 필요한데, 무력도 출중하고 남부도 한번 다녀와 본 적 있는 눈꽃 기사 확정.

거기에 왕녀를 모실 사람이 새 왕에게 알려져도 정치적 마찰이나 트러블이 없을 인물. 그 부분에서 아내인 리젤다의 친가 소속인 에반을 딸려 보낸 것이겠지.

새 왕이 아무리 미쳤어도 높은 엘프 남편의 둘째 부인의 가문이나, 높은 엘프 남편의 집에 머무는 왕녀를 손대려고 하지는 못할 테니.

북부 깡통 기사님들이 머리를 엄청나게 굴린 것이었다. 나는 좀 머리가 아팠지만 뭐 몇 달간 푹 쉬게 하다 보내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며, 왕녀의 고삐를 넘겨받아 여관으로 이동하려 할 때. 저 멀리 신전 쪽에서 나를 반갑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셀 씨!”

백색의 신전을 배경으로 순수하고 순결한 모습의 시트라씨가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계셨다.

아마도 농노들을 보살피러 가는 모양. 그런데 그런 시트라 씨가 나에게 조금씩 가까워져 질수록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뭐랄까?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표정이랄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확인했는데, 그 시선이 머무는 곳은 수리아 왕녀의 핑크색 머리카락 이었다.

그리고 수리아 왕녀의 얼굴도 미소에서 점점 시트라 씨와 비슷한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서로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오자 터져 나오는 두 놀란 목소리.

“수, 수리아 왕녀? 어째서 여기에?”

“시트라? 다, 당신이 왜?”

동시에 서로를 확인하고 놀라는 두 사람. 그리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둘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잠시 후.

깜짝 방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분명 화기애애한 분위기여야 할 수리아 왕녀와 에반의 방문이었을 것인데, 마주친 두 사람으로 인해 분위기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분명 시작은 화기애애한 줄 알았는데….

“순결의 종이 북부의 왕녀를 뵙습니다.”

“북부 다섯 핏줄 중 하나인 에삭스의 딸이 순결의 종을 뵙습니다.”

놀란 목소리도 잠시. 둘은 서로 공손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는 대화를 가장한 일종의 전투였다. 상대방의 가장 연하디연한 부분을 찌르기 위한.

“우리가 반갑게 인사할 처지는 아니지 않던가요?”

“뭐 그렇기는 하죠?”

하기 싫은데 예법 때문에 억지로 했다는 그런 느낌의 대화. 갑자기 분위기가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때 수리아 왕녀가 선공을 날렸다.

“그런데, 성국의 순결한 ‘숫’처녀께서 어찌 이런 남부까지? 신력을 처바른 처녀 냄새가 코를 찌르는군요.”

“하! 그러는 북부의 왕녀는 남부까지는 어쩐 일이시죠? 어디 나돌아다니기도 힘드실 텐데…. 뭐 그리고 저는 신에게 바쳐진 ‘숫’ 처녀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숫’ 처녀인 분도 있으니 제 처지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답니다.”

바로 반격을 가하는 시트라 씨. 왕녀의 미간에 세 줄의 주름이 솟아올랐다. 뭔가 둘 사이에 전기가 튀어 오르는 느낌. 상대의 약점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날카로운 공격.

“훗. 뭐 그리 걱정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이번에 괜찮은 남자를 찾아서 누구와는 다르게 영원히 처녀이지는 않을 예정이니까요.”

“역시나 저급한 북부의 우두머리답군요. 자기 처녀를 버린다는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들 줄이야!”

“지금 왕가를 능멸하는 것입니까?”

“왕녀님은 그럼 지금 성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입니까?”

“확실히 노처녀들은 제정신이 아니니 조심하라는 북부의 격언이 틀린 말도 아니군요.”

“저급한 북부의 격언이니 어련하실까요.”

그리고 둘이 고개를 획 돌리더니 나에게 동시에 외쳤다.

“러셀님,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러셀님, 그만 가시죠. 시간 낭비 같으니.”

그리고 다시 서로 쳐다보는 두 사람. 아마 지금 이 순간 눈빛으로 누군가를 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둘에게 있다면 아마 둘은 대량학살범이 될 것이다.

“뭐죠? 왜 러셀 님에게?”

“그러는 왕녀께서는 왜 러셀 님에게?

“저도 러셀 님께 용무가 있어서 머물고 있습니다.”

”저야 러셀 님께 용무가 있어서 왔습니다만.”

그리고 둘 다 동시에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북부의 왕녀가 러셀 님께 무슨 용무일까요?”

“순결의 이단 심문관이 어째서 러셀 님께?”

둘은 무엇인가를 심문하는 눈빛으로 내게 물어왔다. 둘이 싸우다가 나한테 불똥이 튄 것 같은 느낌.

‘나도 너희들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마음속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 소리치고 싶었다.

“아니, 저에게 그렇게 물으셔도….”

“저와 같이 가실지 그 여자를 따라가실지 결정하시죠 러셀님.”

“러셀님? 저를 러셀님의 여관으로 데려가 주시죠. 이상한 여자 때문에 시간이 낭비되고 말았네요.”

나는 옆에서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에반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에반? 가, 가자.”

그리고 들려오는 두 목소리.

“러셀님?”

“러셀님?”

나는 둘을 내버려 두고 에반을 끌고 뛰었다. 내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영문도 모르고 나와 같이 달리는 에반과 나의 뒤를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관까지 따라오면서도 계속 싸우는 둘을 보고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둘을 여관 테이블에 앉혀두고 왜 둘이 그렇게 싸우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 정신 나간 이단심문관 때문이에요!”

“사사건건 임무를 방해하는 왕녀님 때문이죠.”

“자자 싸우지 말고 일단 각자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먼저 시트라 씨부터.”

여자 싸움 말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내용을 알아야 싸움을 말리든 편을 들어주든 할 것이니 싸움의 원인에 관해 물은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역시!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러셀 씨. 후후”

“왜 저 여자부터죠?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제발!”

내 비명이 끝나고 시작된 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내용을 종합해 보았다.

결국 둘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북부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시트라 씨와 수리아 왕녀가 임무를 두고 몇 번이나 충돌한 것이 둘의 관계가 이렇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시트라 씨는 원래 북부 에삭스 쪽 담당이셨다 했다.

북부의 특성상 대산맥에서 내려오는 마물들과 싸움이 잦은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거기에 가끔 마족들이 끼어있다고 했다. 특히나 북부는 방비가 철저하니 다른 마족이나 마물은 쉽게 침입하지 못하는데, 가지고 있는 날개로 은밀하게 인간의 영토로 찾아드는 서큐버스 같은 마족들은 아주 골치가 아픈 상대 중 하나라서 성국에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라고.

그래서 성국의 전투 사제나 이단 심문관들이 자주 방문 또는 상주하는데, 시트라 씨가 북부에 근무할 때 수리아 왕녀와 트러블이 좀 있었다는 것이, 이 싸움이 시작된 원인이었다는 이야기.

“단순히 자기 위안에 빠진 소년을 성국까지 압송하다니.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습니다!”

“단순히요? 하루에 스무 번은 정상이 아닙니다. 당연히 성국에서 확인을 해봐야지요!”

“그래서! 그 소년이 마족에게 매혹당한 것이 밝혀졌나요?”

“저는 규정대로 했을 뿐입니다! 서큐버스의 침입으로 매혹에 빠져 음란해진 자들을 가려내 압송한 것인데, 왜 그게 제 잘못인 거죠? 그리고 압송한 자들을 처형한 것도 아니고, 정화한 후 다시 돌려보내 드렸는데!”

“성국에 끌려갔던 그 소년은 아니, 그 자작의 후계자는 더 이상 후계를 이을 수 없게 되었단 말입니다! 자작 가문이 그로 인해서 대가 끊겨버렸단 말입니다!”

아! 어지러워지는 대화였다. 불쌍한 소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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