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63화 (163/352)

〈 163화 〉 161. 앙숙 6

* * *

“그년은 도착하자마자 마을에 염소 절반을 세금으로 거둬갔습니다. 자기가 새 영주니 세금 절반은 당연한 거라면서요.”

남자의 말에 천막 안은 삽시간에 욕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트라 씨가 나서서 사람들을 진정시킬 때까지 욕설은 계속되었다.

“다들 조용!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때까지 좀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이단 심문관은 역시나 깡패, 시트라 씨의 한마디에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치를 보던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도 무슨 보호세니, 뭐니 하면서 염소들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석 달도 되지 않아 마을에 남은 염소는 채 오십 마리도 되지 않았죠. 그 오십 마리도 결국 며칠 후 빼앗겼지만… 촌장님은 마지막 염소를 빼앗기는 날 저항하다 처형당하셨습니다. 어차피 염소를 뺏기면 다 죽으니…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굶주림. 평야에 나가 쥐를 잡아 먹기도 풀뿌리를 캐 먹기도 했지만, 애초에 척박한 곳이라서 이곳만큼 쥐나 먹을 수 있는 풀뿌리도 부족해, 사람들은 금방 굶주리기 시작했고 남자가 말했다.

모든 염소를 약탈해 가고도 영주는 마을에 쇠붙이들까지도 다 걷어갔다고 했다. 마을에는 부엌칼 한 자루 남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뜯어갈 것을 다 뜯어간 여남작은 굶주린 농노들을 보자 더 이상 뜯어낼 게 없으니 농노를 다른 영지에 팔겠다고 했단다.

이건 뭐 악마가 따로 없었다. 더군다나 알뜰하기까지.

그 말에 농노들이 대탈주를 시도했고, 평야에 살던 농노 대부분이 그렇게 주변 영지로 도망치는 중이라는 말로 남자의 이야기가 끝났다.

“미… 미친년이군요.”

시트라 씨의 감상. 그래, 아주 그냥 제대로 미친년이었다.

어차피 강 주변에 살 수 있는 인구는 정해져 있고 거기는 고정 수입으로 볼 수 있지만, 척박한 평야에 사는 농노들은 별로 돈이 안 되니, 모든 것을 빼앗은 다음에 다 팔아 정리하려는 듯했다.

남부 쪽에는 가축에 대한 세금이 없다. 관습적으로 영주 개인에게 십 퍼센트 정도 바치긴 하지만 많아야 일 년에 몇 마리 정도. 북부처럼 양을 많이 키우는 것도 아니고 농사하기에 조건이 좋은 중남부이기에 가축에 대한 세금 규정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일 년에 염소 몇 마리, 인두세 조금 받기 위해 농노들을 내버려 두는 것보다 한 번에 크게 쭉 빨려는 심산으로 보였다.

“그럼 앞으로 탈주한 농노들이 더 쏟아질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내 말에 시트라 씨도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정은 딱해도 우리가 뭘 해줄 수도 없는 상황. 영주가 자기 영지 민이나 세금을 걷는 건 자기 권리인 것이니. 안타깝긴 해도 시트라 씨가 성국을 통해 왕국에 항의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딱히 불법은 아니니까 말이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팔아먹으려던 농노들이 도주한 상황. 가만히 있을 영주가 어디 있겠나? 잡겠다고 사방으로 병사를 보낼 게 뻔하다. 다만 다른 영지들은 다른 영주들이 있으니 대놓고 병력을 보내지는 못하겠지만, 여기는 영주가 없는 공백지 마을.

흔적을 찾아 몰려와 수색이라도 하겠다며 개지랄할 수도 있는 것.

이곳은 이렇게 한 영지가 미친 짓거리를 하면 주변 영지들이 몰려온 피난민이나 도주 민으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생겨난다. 아마 우리 마을처럼 파텔의 주변 영지들도 몰려드는 농노들에 난감해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다른 영주들이야 입 싹 닫고 자기 농노라고 우길 수도 있고, 농노도 재산이니 먹이고 회복시켜 잘 써먹을 수도 있지만 여기는 공백지 마을.

수색하겠다고 들이닥친 병력이 무조건 대충 자기네 농노라며, 아무나 잡아갈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도망 농노니까. 지배자가 없는 영토에 생겨난 작은 마을이니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다.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

그리고 역시나 나와 시트라 씨의 우려와 같이 다음날 기사 두 명과 병사 몇 명이 목책 밖에 나타났다.

“마을 촌장은 나와서 파텔의 정당한 지배자 파멜라 필그린님의 병력을 맞으라!”

목책 밖에서 깡통 투구를 손에 든 기사가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목책 위에서 대화를 시작한 것은 나. 촌장님보다는 내가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아 대표로 내가 선 것이다.

“자네가 촌장인가?”

소리를 지르던 기사가 나를 삐뚜름하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촌장이 생각보다 젊군.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파텔의 농도들이 도주했다. 마을을 수색해보고 싶으니 문을 열어라!”

기사가 강압적인 말투로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나 저렇게 병력을 끌고 왔는데 소속 영주의 기사나 병사도 아니고 문을 열 이유가 전혀 없다. 더군다나 공백지 마을이기에 거절할 명분도 확실하고.

애초에 저렇게 다짜고짜 문을 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여긴 파텔의 영지가 아니니 저희가 문을 열 이유가 없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이 새끼 공손히 부탁해도 해줄까 말까인데…’

“뭐라? 감히! 공백지 마을 촌장 따위가 감시 정당한 파텔의 지배자의 대리인인 나의 요청을 거절하겠다는 것이냐?”

“예, 거절합니다. 파텔 영지의 대리인이라고 하는데 저희가 그걸 어찌 믿겠습니까? 무장한 병력을 마을로 들이겠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마을 주민을 농노라 우기며 잡아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당연히 거절합니다.”

내 말은 너희들이 도둑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아냐는 것이다.

내 말에 기사가 잔뜩 흥분했는지 머리에 핏대를 세운 채 침을 튀기며 외쳤다.

“농노들이 이곳으로 도주한 흔적이 있는데! 농노를 숨기는 것은 영주 님의 재산을 훔친 것과 마찬가지인 것을 아는가? 공백지 마을이 아니라 도적무리가 아닌가? 도적무리라면 내 처단할 명분이 충분하지!”

­촤악

놈이 칼을 뽑아 들었다.

“어서 문을 열지 않으면 내 도적무리로 여기고 토벌을 할 것이다!”

놈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협박을 이어갔으나.

“흔적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무장한 병력을 마을로 들이겠다는 것은, 마을을 점령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저희도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준!”

내 말에 목책 뒤에서 엘프 십여 명이 나타나 파텔의 병력에 활을 겨누기 시작했다. 내 대응이 과격해 보일 수도 있으나, 이 정도는 해야 괜히 건드리면 큰일 나겠구나. 해서 다시 안 오지, 어설프게 대응했다간 병력을 더 몰고 와서 마을을 약탈하거나 부족한 농노들을 우리로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 기사 새끼들은 약탈이라는 단어에 환장하는 편이니까 말이다.

“무, 무슨 엘프들이!”

놈이 화들짝 놀라, 말의 고삐를 채자 말이 놈이 탄 말이 깜짝 놀라 앞발을 번쩍 쳐들었다.

“히이잉!”

그리고 그때 말 두 마리가 추가로 마을 앞으로 달려왔다. 둘 다 두건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는데 둘 다 기사로 보였다.

추가 병력인가 싶어서 엘프들에게 위협 사격을 명령하려는 그때.

한 명이 두건을 내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어? 이 목소리는?’

“처남?”

두건 속에서 나타난 것은, 남색 머리카락에 날카로운 눈매의 에반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리젤다가 그렇게 요즘 에반 타령을 했었는데, 당사자인 에반이 나타난 것이었다.

‘아니, 북부에서 대체 여길 어떻게 갑자기?’

당황함에 인사조차 건네는 걸 잊고 있던 그때.

“처남? 잘됐군! 네 녀석! 어서 저놈에게 이 목책 문을 열라고 해라 그렇지 않으면….”

놈이 내 처남이라는 말에 에반에게 칼을 겨누고 문을 열라 협박을 하려 했지만.

­뻐억. 우당탕.

놈은 말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에반의 옆에 말을 타고 있던 자가 그놈을 후려쳐 땅바닥으로 떨궈버렸으니 말이다.

“네, 네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감히 파텔 영주의 정당한 대리인인 나에게!”

놈은 땅바닥에서 일어나려 애썼지만, 무슨 일인지 바닥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것처럼 구르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놈이 소리를 꽥꽥 지르며 발악할 때, 놈을 바닥에 처박은 사람이 두건을 젖히니 드러난 것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핑크색 머리카락이었다.

그 핑크색을 보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보고 싶었다거나 감동으로 시큰해진 게 아니라. 그때의 고통이 떠올라서 시큰해진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이마가 가장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태어난 후 나에게 가장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수리아님?”

“러셀님 오랜만입니다!”

말 위에 나타난 것은 북부에서 헤어졌던 수리아 나파로아 왕녀였다. 그녀가 말 위에서 화사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왜 갑자기?’

그리고 내 머릿속에 번개같이 떠오르는 기억.

벨의 아버지에게 했던 조언.

“혹시라도 왕위에 올라 왕녀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면, 차기 국왕께서 북부 대 전선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실 때까지, 어디 멀리 왕녀를 피신시켜두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북부에서 여기가 제일 멀긴 했다. 제기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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