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62화 (162/352)

〈 162화 〉 160. 앙숙 5

* * *

나는 벽에 딱 붙어서 시트라 씨의 눈치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한참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시트라 씨. 그 시트라 씨의 손이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갔다. 그리고 드러난 시트라 씨의 검붉은 얼굴은 원래의 색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있었다. 아직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상태긴 했지만 말이다.

시트라 씨가 조금은 진정이 된 상태로 보이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시작했다.

“시, 시트라 씨 저, 정말 사, 사고인 거 아시죠? 의, 의자가 말이죠. 의자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정말이지…. 저는 그렇게 무겁지도 않은데 그게….”

“그만!”

“힉!”

화난 시트라 씨의 외침. 시트라 씨의 좁은 방. 시트라 씨의 외침이 시작된 순간부터, 나와 시트라 씨 사이에 억겁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우주와 블랙홀, 빅뱅과 우주의 팽창이 나와 그녀 사이에서 떠올랐다.

수많은 우주가 시작되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아… 우주의 신비.

그렇게 시간과 우주의 신비를 체험하고 있을 때, 나의 검은 우주 저 너머에 빛이 시작되었다. 그 빛이 시작된 것은 그녀의 입술.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한마디였다.

“사, 사고인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구원하는 그런 말. 아 역시 자애로운 사제.

“휴…. 역시 시트라 씨는 이해심이 많으시고 착하신….”

“하지만 그전에 하신 말씀은 그냥 넘겨듣기는 힘들군요!”

자애롭지만 뒤끝은 있으셨다.

‘그전에? 그전에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잠깐! 그전이면 시트라 씨가 잠들어있을 때인데?’

“어, 언제부터?”

“처음부터입니다. 씨, 씻지 않아서 햐, 향이 깊어졌다고요?”

“헉… 죄, 죄송합니다!”

‘아니, 그걸 들었다고? 대체 어떻게? 잠든 거 아니었냐고!’

나는 시트라 씨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한참을 빌고 있을 때 들리는 수줍은 목소리.

“뭐, 그렇지만 자, 자주 찾아와 주시기도 했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셨으니. 요, 용서해드리기로 할까요? 저, 저는 자애로운 자애의 이단심문관 이니까 말입니다.”

“수, 순결 아니고요?”

엉겁결에 터져 나온 말.

‘이 주둥이를 정말!’

“아, 앞으로는 자, 자애롭기만 하려고 합니다.”

‘무슨 말이지?’

마지막 말을 하고 얼굴이 다시 새빨개진 시트라 씨를 보며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자애롭게 나를 용서해 준다니 그거면 충분한 것이 아니겠나?

지금, 이 순간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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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나도 시트라 씨도 진정되어 시트라 씨에게 파텔 영지에 관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시트라 씨는 이단 심문관들을 이끌고 파텔 영지 모든 마을을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자는 모두 색출해서 성국으로 끌고 갔다고 했다.

하지만 예전에 들었던 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영주가 엘프가 나타나면 신고하라는 말에 신고한 사람은 용서해 주었다고. 뭐 그건 당연했다. 영주가 뭘 할지도 모르니.

그리고 파텔 영지는 당연히 왕국에 몰수되었고, 왕국에서 다른 귀족에게 영지를 수여하거나 직접 행정관을 파견해 관리하는 두 가지 방법의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는 게 시트라 씨가 아는 마지막 정보였다.

“농노가 도주하는 것이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기아 상태라니 좀 이해하기 힘들긴 하군요.”

“예, 그건 그럼 도착한 농노들이 기운을 차리면, 이야기를 들어볼 수밖에 없겠네요.”

시트라 씨가 깨어나 불난 호떡집이 된 신전을 뒤로하고 농노들이 머무는 천막으로 향했다. 지금이라면 뭐라도 먹고 말할 기운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신전에서 나와 천막으로 향하는데, 마을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을 입구로 향하자 경계를 서던 평원 엘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홉입니다. 러셀님과 촌장님을 모셔 와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다녀올게! 아! 러셀님!”

나를 데려온다며 목책에서 내려오다 나를 발견한 엘프들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데?”

“밖에 또 농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목책 위로 올라 밖을 내려다보자 새벽에 봤던 것과 비슷한 모습의 농노 무리가 무릎을 꿇고, 안으로 들여보내 줄 것을 애원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머, 먹을 것을 좀.”

“아, 아이들도 일주일째 물밖에 마시지 못했습니다. 제발!”

새벽에 찾아온 그들은 단지 시작이었던 것이었다. 그날 저녁까지 그렇게 하나둘 마을로 몰려든 농노들은 사십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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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으로 제공된 죽을 그릇까지 핥아 먹던 남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 조금만 더…”

앙상한 손을 덜덜 떨며 죽그릇을 내밀었지만 돌아온 것은 매정한 목소리.

“안 돼요. 굶은 상태에서 한 번에 너무 많은 음식을 먹으면 그대로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시트라 씨의 단호한 목소리. 죽는다는 말에 남자는 이내 얌전해졌다. 그리고 눈치를 보며 죽을 더 달라고 하려 했던 주변의 농노들도 다 같이 고개를 숙였다.

오후가 되자 시트라 씨가 사제들을 끌고 이들을 돕기 위해 나오셨다. 오랜 시간 누워만 계셨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멀쩡하시다고… 덕분에 마을 사람들로만 이들을 돌보기에는 역부족이었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엘프나 수인들은 되도록 이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했기에 일손이 부족한 것이었는데, 마을 사람들도 상황을 아니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시트라 씨와 좀 전에 죽을 더 달라 말하던 남자에게 물었다.

“영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런 시기에 이렇게 굶은 상태라니 믿기 힘들군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믿을 수 없다는 시트라 씨의 물음이었다.

확실히 우기가 끝나고 평원의 생물들은 번식기. 하다못해 평원에서 쥐라도 잡아먹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야생 버섯이나 야생토란 같은 것도 많은데, 농사를 망쳤다고 해도 이런 굶주림 상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그것이 다 새로 부인해온 영주 그, 그 새끼 때문입니다.”

남자가 영주라는 단어를 꺼내자 천막 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죽어가던 농노들의 눈빛이 원망과 살기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영주요?”

­뿌드득

“파멜라 그 쌍년!”

독기 어린 남자의 말이 시작되었다.

파텔 영지는 강을 끼고 있는 일부를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주 척박한 초원지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영주 성 주변이나 강가에만 모여 산다고 했다.

영주 성 주변에 숲이 있을 때는 아주 풍요로운 곳이었기에 영주 성 주변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지만, 숲이 불타버린 후에는 강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더욱 심해져, 대부분의 영지민 들이 강 주변에 모여들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니, 강 주변에 거주지가 늘어나 정작 중요한 경작지가 줄어들게 되어, 전임 영주는 할 수 없이 절반 정도의 농노를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평야로 강제 이주시켰고, 반발은 있었지만 영주에게 감히 대항할 수는 없었기에 농노들은 맨몸으로 척박한 평야로 내몰렸다고.

그들이 그렇게 강제로 이주 된 거주지에 도착해 발견한 것은, 잡초만 무성한 평야.

이들이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은 목축이었다. 척박한 평야에 강제 이주 된 사람들은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잡초만 무성한 들판에서 먹고 살기 위해 염소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천지가 풀이니, 먹이 걱정은 없어서 시작한 것인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무성한 잡초들이 자라던 들판은 염소를 키우기에 좋은 조건이라. 처음 몇 해는 좀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되었다고 했다.

“뭐 영주 새끼도 미안했는지, 처음 몇 해는 식량을 나눠 주기도 했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런 곡식인 줄 알았으면 받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정작 내일 한 끼가 걱정이니, 그때는 아마 알았어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때도 애들과 며칠씩 굶었으니까요… ”

남자의 얼굴에는 씁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 그 곡식이 대부분 약탈과 엘프나 노예들을 팔아 나온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시트라 씨가 엘프 사건 조사를 위해서 영지를 쥐잡듯이 뒤졌다더니 다들 전 영주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것 같았다.

남자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렇게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들려온 것은 영주가 큰 죄를 저질러 처형되고 영주의 성이 불탔다는 소식.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마을에 몇 번이나 이단 심문관들이 들이닥쳐 관련자들을 잡아가고 나니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다들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얼마 후 새 영주라는 자가 임명받아 도착했는데 이것이 이들의 비극의 시작이었다고 남자는 말했다.

사십 대의 여자였는데 왕의 첩실이었다는 소리도 있고, 거상이었다는 소리도 있는데. 확실한 건 작위를 큰돈을 주고 구매했다는 것.

“그년이 매번 하는 소리가 ‘내가 얼마를 주고 샀는데!’ 이 소리였으니까요.”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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