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 159. 앙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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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라면 아침 식사 후, 훈련을 시작해야 했지만 다만 아쉽게도 오늘은 불가능했다. 신전에도 찾아가 봐야 하고, 새벽에 들어온 사람들이 기운을 차리면 사정도 들어봐야 했으니 말이다.
목책 너머 지평선에 세 번째 태양이 떠오르고, 아침 식사를 끝내고 목책을 뛰고 온 다섯의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준비운동을 끝내고 목책에 모여든 다섯에게 말했다.
“들쥐들 준비되었습니까?”
“찍!”
며칠 굴렀다고, 아주 대답 소리가 우렁찼다. 이것이 피티 체조의 힘 아니겠나. 구르면 구를수록 강해지는 정신과 육체. 이거 만든 사람은 진짜 상 줘야 한다. 이계에서도 통하는 훈련이라니.
“들쥐들의 훈련을 사랑하는 마음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이야기를 전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제가 오늘은 바빠서 훈련을 봐 드릴 수가 없는…”
“으하하하하!”
“끼 야호!”
“오! 신이여! 어젯밤 저의 기도를!”
다섯은 신이 나서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왠지 심술이 나서 다섯에게 말했다.
“아니 훈련을 못 하게 되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아니라 환호를? 제가 돌아와서 오늘 못한 훈련까지 다 할 테니 다들 일단 쉬고 계십쇼 알겠습니까?”
“엉엉. 형님, 훈련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워요.”
안톤 새끼가 내 말에 우는 척까지 하며 연기를 펼쳤다. 요 새끼. 요거, 오늘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겠다고 마음먹고 말했다.
“안톤 들쥐가 그렇게 슬프다면, 그러면 안톤은 제가 돌아올 때까지 궁술 연습 혼자 하겠습니다. 열 발 쏘고 못 맞춘 만큼 팔굽혀펴기 백회 실시합니다. 알겠습니까?”
“옛?!”
화들짝 놀란 안톤의 표정. 내가 이렇게 할 줄을 몰랐다는 얼굴. 나는 거기에 확인 사살까지 해주었다.
“본 교관은 가식적인 게 제일 싫습니다. 알겠습니까?”
안톤이 세상이 다 끝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벨릭이 안톤을 놀리는 소리와 잠시 후 두 놈이 엉겨서 싸우는 소리를 뒤로하고 신전으로 향했다. 새벽에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시트라 씨의 모습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목책을 끼고 마을 입구까지 걸어가 경계를 서는 마을 사람들과 엘프들을 한번 둘러보고 성전으로 향했다.
“엘리아 씨?”
흰 신전의 문을 조심히 열고 안으로 들어서 엘리아 씨를 찾자 잠시 후 엘리아 씨가 신전 안쪽에서 반가운 얼굴로 걸어 나오셨다.
“아, 러셀 씨.”
“새벽에 못 드린 말씀을 드리려고요.”
나는 엘리아 씨에게 마을 주민들과 내린 결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원 엘프들이 힘들어할 것 같아, 농노들은 몸 상태가 회복되는 대로 그란 폴로 보내기로 했다는 내용을 말이다.
“확실히 제가 정신 치료 전문 사제이기에 드리는 말씀인데, 이제 간신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분들과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신적 부담감을 안고 있는 분들을 저들과 같이 두는 것은 무리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엘리아 씨는 내 결정을 칭찬하셨다. 나는 몰랐는데 에밀을 비롯한 다른 괜찮아 보이는 엘프들도 엘리아 씨의 말로는 아슬아슬한 상태라고 했다.
“정신이라는 것이 오묘해서 누군가는 참혹한 모습을 보아도 별것 아닌 것으로 느껴지지만, 누군가는 손을 베인 상처를 보는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엘프들은 자신들이 견딜 수 있는 최대한의 정신적 상처를 입은 상태.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충격을 받는다면, 거동도 못 해서 치료 중인 다른 엘프들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러셀 씨가 평소에 신경을 많이 써주셔야 해요.”
나는 다른 엘프들도 심각하다는 깜짝 놀라는 한편, 제일 걱정되는 여관 마스코트 에밀에 관해 물었다.
“혹시 에밀은 어떤가요?”
“그분이 가장 심각합니다. 과도한 밝음. 무너지는 정신을 억지로 버텨내고 있는 겁니다. 매주 치료받고 있었는데 모르셨나요?”
맙소사.
“에, 에밀이요?”
‘아니, 나한테는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
나는 처음 듣는 사실에 망연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나 밝은 아이(?)인데 그것이 거북이의 껍질, 고슴도치의 가시 같은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다니.
“그럼 어떻게?”
“일단은 그대로 두고 지켜봐 주세요. 섣부른 개입은 도리어 악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 그렇군요.”
나는 에밀의 비밀을 듣고 잠시 멍한 상태가 되었다. 하긴 브라한에게 물었을 때 에밀이 갇혀있던 곳은 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들었는데, 엘프 중에 가장 빨리 회복이 되어서 괜찮을 것으로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이었다.
에밀의 미소와 밝은 목소리 그리고 새벽에 주저앉아 떨던 에밀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 한쪽이 시려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뿐이라니…
시트라 씨도 에밀도 누구도 도울 수 없다니 조금 슬퍼졌다. 그래 난 그냥 일개 여관 주일인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조금 특이한.
엘리아 씨와 이야기를 끝내고 신전을 찾아왔던 다른 목적인 시트라 씨를 찾았다. 신전 안쪽의 흰 통로를 한참 걸어 외각 사제들의 숙소가 모여있는 장소. 그 제일 첫 번째 방.
조심스레 시트라 씨가 잠들어있는 방문을 열었다.
끼익
방문이 열리자 열린 방문 틈으로 맛있는 음식이 끓고 있는 솥의 뚜껑을 연 것처럼 ‘푸확’하며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밀물처럼 콧속으로 흘러들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던 시트라 씨의 체향이 갈 때마다 더욱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뭔가 마음이 안정되면서 조금은 설레는 그런 향기였다. 뭔가 살짝 풋풋한.
에밀 때문에 가라앉고 우울했던 기분이 확 풀리는 느낌.
‘뭐지? 뭔 향이 꽃향기처럼 나네.’
나는 신기한 시트라 씨의 체향을 맡으며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잠들어있는 시트라 씨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트라 씨 저 왔어요. 벌서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도 못 일어나고 계시다니 걱정이네요. 저 때문에 괜한 고생 중인 거 같아서, 더욱더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시트라 씨 잠든 사이에 체향이 더 깊어진 거 아세요? 방에 들어올 때 무슨 꽃향기인 줄 알았다니까요? 봄꽃의 풋풋하고 설레는 그런 향이랄까? 계속 맡고 있으면 까무룩 잠이 들것 같다니까요. 씻지 못해서 그런가? 하하… 이러면 부끄러워하시려나?”
킁킁
“하 좋다. 뭐 지금은 잠들어 계시니까 그냥 뭐 다 제 맘대로 하렵니다.”
“시트라 씨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무엇이냐면 말이죠…. 음유시인의 이야기 중 하나인데요. 옛날에 한 나라에 공주가 살았거든요……
……그렇게 잠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에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서 키스하면 공주님이 깨어나는 거죠. 어때요?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진짜 왕자님이 키스를 해줘야 일어나시려나. 그 뭐 왕자님은 근처에 없으니, 제가 살던 곳에서는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필요한 게 없으면 대신 비슷한 다른 걸 쓴다는. 그런 말이 있는데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라도 괜찮으면 어떤가요?
제가 뭐 왕자처럼 잘생기고 그러진 않았지만 저도 제법 나쁘지 않다니까요? 이래 봬도 세 명의 아내가 품질을 보증한 그런 남자라고나 할까? 하하…”
“하… 제가 이 무슨 헛소린지.”
그렇게 주절주절 헛소리를 이어가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지직
그리고 앞으로 쏠리는 상체. 내가 앉아 있던 의자 다리 하나가 갑자기 부서지며 나는 시트라 씨 쪽으로 처박혔다.
“우앗!”
신전의 침대는 환자들을 돌보는 낮은 침대였으니, 시트라 씨 위로 엎어진 것은 당연지사. 입술에 닿는 부드럽고 촉촉한 느낌. 그리고 이불이 풀썩거리며 코를 찌르는 시트라 씨의 체향.
정신을 차려 확인해보니 엎어지면서 내 입술이 시트라 씨의 입술과 맞닿아있었다.
“이 무슨!”
나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형 사고였다.
“시, 시트라 씨 이, 이건 사, 사고였던 거 아시죠? 그렇죠? 저, 절대 제가 원한 게. 아니, 의도한 게 아닙니다. 아 물론 아까 제가 농담하긴 했지만. 그, 그건 농담일 뿐이죠. 그렇죠?”
나는 잠들어 듣지도 못하는 시트라 씨에게 연신 변명을 토해냈다. 그렇게 변명을 토해내다 시트라 씨를 바라보니.
‘왠지 귀가 붉게… 아니, 목덜미가? 어, 얼굴이?’
시트라 씨의 얼굴은 새빨갛다 못해 피가 못 통한 것처럼 검붉게 물들어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벽으로 물러났다. 뭔가 진짜 망한 상황 같았다. 사고이긴 한데 순결 사제의 입술을 훔치다니. 이단심문과 화형이라는 단어가 아른아른 눈앞에 떠올랐다.
‘그나저나 아니, 이걸로 진짜 깬다고? 크, 큰일 났다!’
잠시 후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검붉게 물든 시트라 씨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어, 어머니!”
‘아니, 엄마를 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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