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60화 (160/352)

〈 160화 〉 158. 앙숙 3

* * *

일단 도망 농노를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냥 두면 얼마 안 돼 다 죽어버릴 것 같으니 말이다. 일단 이들에게는 새벽에 일어날 마을 아낙들이 곱게 간 호밀 죽을 끓여서 먹이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촌장님이 촌장님의 부인과 마을 아낙들을 모아서 본인이 직접 챙기겠다고 하셨기에, 나는 촌장님께 주의해야 할 사항을 알려드렸다.

“지금 고기나 다른 걸 먹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물 같은 죽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물도 절대 많이 마시게 하지 마세요. 끓여서 미지근해진 물에 꿀과 소금을 아주 조금 넣어서 아주 조금씩 먹이세요.”

“알겠네. 러셀.”

촌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촌장님께 이야기를 끝내고 신전에도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일단은 기아에 허덕이는 모습이지만, 다른 아픈 곳이 있을 수도 있고 기력을 회복해주는 축복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누가 신전으로 가서 사제님을 한 분 모셔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일단 기력이라도 회복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내가 지금 가겠네!”

내 말에 모여있던 마을 아저씨 중 하나가 신전으로 달려갔다. 시트라 씨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거기도 정신이 없긴 할 텐데 어쩔 수 없다.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니까.

그리고 주저앉아있는 에밀을 한참 바라보던 나는 촌장님과 남아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마음속의 결심을 이야기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악역은 내가 담당해야 했다. 일단 내가 엘프들의 대표자이기도 하니까 이런 결정은 내가 내려야 하는 것.

“며칠 돌봐서 어디든 갈만한 상태가 되면 그란 폴로 이송시키겠습니다. 용병 길드를 통해서 다른 방법이 없는지도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저들을 받을지 말지 엘프들에게 결정하게 하는 일은 가혹한 일이다. 이전에 자신들이 학대받는데 간접적으로 조력한 자라고 해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받을지 말지를 엘프들이 직접 결정하라고 한다면, 마음이 약한 엘프들은 저들을 볼 때마다 예전 생각이 나서 괴롭더라도 분명히 받자고 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엘프들은 이미 마을의 가족. 가족과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사람들의 정착은 불문율로 금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겠지요. 촌장님?”

촌장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내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악역을 담당하기로 하신 것을 알아채신 모양.

“자네 혼자 나쁜 사람 만들 수는 없지. 이건 촌장인 나도 같은 의견이네. 반대는 당연히 없겠지?”

모여있던 마을 주민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들려오는 가냘픈 목소리.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에밀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자. 에밀도 옆에 에밀을 부축하던 다들 엘프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전 기억 때문에 마음의 압박이 심했는데 우리가 그런 결정을 내려주니 고마운 모양.

“아니, 왜 우느냐? 에밀, 원래 마을에는 나쁜 놈들은 안 받게 되어있으니 뚝 하라구.”

“그럼 그럼. 당연하지”

마을 주민들이 에밀과 다른 엘프를 달래고 있을 때.

새벽녘 강가에서 시작된 뿌연 물안개를 뚫고, 신전 쪽에서 불빛과 발걸음 소리가 우리 쪽으로 이어지더니. 아까 신전으로 달려간 마을 주민 한 분이 사제님을 모시고 나타났다.

놀란 눈으로 달려오신 사제님은 엘리아라는 분.

“무슨 일인가요? 환자가 있다고 해서 달려오긴 했는데.”

“안녕하세요. 엘리아 씨, 도망 농노입니다. 그런데 기아에 허덕여 상태가 심각하네요.”

“아, 러셀님도 계셨군요. 예? 기아요? 그럴 때가 아닌데?”

남부에 가뭄으로 흉년이 온 것도 아니고, 기근이 찾아올 어떠한 이유도 없으니, 엘리아씨의 이해 안 된다는 물음도 당연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추수를 막 끝낸 시기가 아닌가.

“일단 환자를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아 씨는 곧바로 농노들을 살펴보신다며 천막 안으로 들어가셨다.

“맙소사!”

천막 안에서 들려오는 놀란 목소리. 곧이어 천막에서 신성력이 내뿜는 빛이 여러 줄기 천막 사이사이를 뚫고 흘러나와 새벽녘 물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천막이 열리고 나타난 엘리아 씨는 무척이나 놀란 모습이셨다.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평안을 이용해서 다 재우고, 기력을 회복하는 축복을 걸어두긴 했는데. 깨어나는 대로 무엇이든 먹여야 합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역시나 우리가 보기에도 심각했는데, 전문가인 엘리아씨의 판단으로도 상태가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일단 엘리아씨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마을에서 준비하고 있는 내용을 알려드렸다.

“마을에서 다들 준비해 주신다고 했으니, 깨어나면 곱게 간 죽을 먹일 것입니다.”

“아니, 그런데 저분들은 대체 어디서 오셨답니까? 몇 년 기근이 있었던 지역에서나 볼 수 있던 모습인데,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도 다 이해가 안 되는데, 당연히 엘리아씨도 이해가 안 되겠지. 일단 내가 아는 정보들을 알려드리기로 했다.

“저들이 온 곳은 파텔 영지라고 하더군요.”

“파텔 영지라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어, 파텔 낯익은데….”

엘리아 씨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시다가 에밀과 또 다른 엘프를 바라보더니, 뭔가가 떠올랐는지. 부릅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예, 그곳이 맞습니다.”

“이런!”

이어진 엘리아 씨의 목소리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그런 목소리였다.

엘리아 씨의 말로는 정령이 떠난 남작의 시체를 두고 성국에서 저주를 풀기 위해 엄청난 기도를 쏟아부었었다고… 엘리아 씨도 거기 참가했던 적이 있고, 나중에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죄 때문임을 알게 되었을 때. 성국의 수뇌부와 사제들이 무척이나 분노했다는 말이었다.

중요한 건 그 무척 분노했다는 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수위와는 좀 다른 듯했다. 엘리아 씨가 곧 뱉어낸 말은 엄청난 경멸을 담아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악행의 부역자들이었다니!”

좀 전에 자신이 신성력을 베풀었던 농노들을 두고 분노하는 엘리아 씨.

분노하는 엘리아 씨에게 혹시라도 엘프들이 구출되고 나서 파텔 영지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시트라 씨가 대표로 일을 처리하신 것 같은데, 혹시라도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나 싶어서 물은 것이다.

“혹시 그곳에서 엘프들이 구출되고 난 후 이야기를 혹시 아십니까?”

“아뇨, 아마도 시트라님이 정확히 알고 계실 텐데….”

엘리아 씨는 말끝을 흐리셨다. 시트라 씨는 신성 강림 이후 벌써 열흘 가까이 깨어나지 못하고 계셨다.

나도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고는 있는데, 갈 때마다 볼 수 있는 모습은 마치 잠들어있는 것같은 미동도 없고 숨도 아주 미약하게 쉬고 있는 상태뿐. 사제님들은 나아질 거라고 하는데, 진짜 저러다 덜컥 죽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매번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자세한 건 시트라 씨가 깨어나 봐야 알 수 있겠군요…”

엘리아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첫 태양에서 흘러나온 빛이 강가에 피어오른 안개를 물가로 밀어내고, 안개가 떠난 축축한 마을이 지붕마다 빛을 반짝이며 드러났다. 벌써 아침이 밝은 것이다.

일단 다들 새벽에 농작물도 돌봐야 하고 밥도 먹어야 했으니, 해산하고 다른 일이 생기면 모이기로 했다. 그리고 엘리야 씨에게는 마을의 결정과 시트라 씨 병문안도 할 겸 식사 후에 따로 약속을 잡았다.

“일단 다들 돌아가서 쉬시고 저 인원들에 대해 결정한 내용도 전달해드릴 겸. 아침 식사 후에 신전에서 뵙겠습니다. 엘리야 씨.”

“네 알겠습니다.”

미명 속에 엘프들과 마을 자경단의 교대 인원이 도착하고, 일단 새벽녘의 혼란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피곤함을 느끼며 여관으로 돌아오니, 부엌과 홀에서는 아내들과 직원들의 아침 식사 재료 준비가 한창이었다. 요즘에는 이렇게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뭘 할지 미리 정해서 직원들에게 알려두고, 아침에 내가 내려오면 바로 식사를 만들 수 있게 직원들이 재료 준비를 먼저 해두는 편이다.

오늘 아침 식사는 프렌치토스트와 수프, 치즈, 햄.

햄은 하몬 같은 생고기를 매달아 숙성시킨 햄이고 수프는 기본적인 야채수프이다. 아침을 프렌치토스트를 하려고 생각 것은 요 며칠 훈련하는 다섯이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그에 맞춰 빵을 많이 구워놨었는데, 때마침 축제도 끝나고 사냥철도 끝나 그란 폴로 되돌아간 손님들도 있었기에 빵이 제법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사냥철 평원에 서식하는 새들의 둥지에서 평원 엘프들이 채집해온 주먹보다 조금 큰 새알을 깨,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빵을 새알을 푼 물에 적셔 굽는 것.

­치이익

손님들의 후각을 유혹하는 좋은 향이 곧 주방을 지나 홀로 퍼져나갔다.

그 향에 이끌렸는지, 늦잠을 자던 리젤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위층에서 뛰어 내려와 부엌으로 들어오며, 다른 아내들과 직원들에게 연신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버렸어요. 죄송합니다. 이실리엘님, 죄송해요, 발레리”

아침, 저녁 식사 준비는 내가 따로 언질 주지 않아도 다들 참여하는데, 자기 혼자 늦잠 자느라 빠진 것이 무척이나 미안한 모양.

“괜찮아요. 리젤다, 요즘 훈련을 받느라 몸도 힘들 텐데 그냥 쉬라니까요.”

웃으며 말하는 이실리엘. 발레리도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첫날에 리젤다가 나에게 업혀서 목욕탕까지 간 것이 생각난 것 같았다.

“러셀, 무슨 일 있었나요?”

리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과를 끝내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가 사라져서 깜짝 놀랐다며 물어왔다.

“깨울 줄 알았는데, 자다 일어나보니 아무도 없고. 해는 떠 있고…”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

“코까지 골면서 너무 깊이 잠들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

“넷!?”

리젤다의 얼굴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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