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157. 앙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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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사회 체제의 바닥을 구성하는 것은 농노라는 계급이다. 노예와는 좀 다른데 노예가 주인에게 예속되어 노예의 모든 것이 주인에게 예속된 상태라면.
농노는 영주에게 예속된 처지는 맞지만 결혼해서 가족을 꾸릴 수 있고, 예속된 영주의 땅 내부에서 주거지를 소유할 수도 있다. 물론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할 수도 있다. 그리고 농사짓는 땅에서 나오는 작물도 소유할 수 있다.
다만 수확물 일부와 영주가 필요로 하는 각종 물품을 영주에게 일부 바쳐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 농노이다. 그러니 영주들이 다스리는 영지의 농노들은 귀중한 재산이고, 농지의 수확물이 이들로 인해 결정되기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징집에서도 자유롭다.
재산으로서 적절히 관리해야 영주들의 수입도 늘어나기에 어찌 보면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것인데. 하지만 여기 영주의 대부분은 '적당히'를 모른다.
곡식에 대한 세율이 기본적으로 오십 프로정도 되고 별도로 특산물이나 매년 머릿수에 대한 세금을 걷으니, 심한 곳은 실제로 따지면 육칠십 프로에 육박하는 곳도 있다. 여기에 더해서 흉년이나 가뭄 또는 몬스터들까지 설치는 일이 발생하면 당연히 수확물이 급감할 수밖에 없는데 이럴 때 사정을 봐주지 않는 영주 새끼들도 아주 흔하다.
그렇기에 그런 시기가 오면 농노가 도망쳐 치는 것은 흔한 일이고, 마을 주민 절반 정도는 도망친 농노 출신이기에 특별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도주 농노 때문에 이른 새벽 촌장님까지 나서서 여관으로 찾아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인 것이다.
얼굴에 마른세수를 하며 여관 밖으로 나가자 등불과 횃불을 든 마을 사람 몇몇이 여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저기 나오는구먼. 러셀.”
내 얼굴을 보자 촌장님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미안 하구만 러셀, 한밤중에.”
“아뇨, 도주 농도가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무슨 일인가요?”
도주 농노가 마을로 도망처 오는 일이야 가끔 있는 일이기 때문에 촌장님께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내가 나서야 할 일도 아니거니와 다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가보세.”
촌장님은 일단 도망처 온 농노들을 보자며 나를 데리고 농노들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촌장님을 따라간 곳은 예전 평원 엘프들이 집이 지어지기 전에 그녀들이 거주하던 임시거처였다. 평원 엘프들의 집이 다 지어지고 나서도 모두 허물지는 않고 세 채는 남겨두고, 간이 창고나 도축 또는 농산물을 말리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곳이었다.
안에 들어서자 두 가족 정도로 보이는 열네 명 내외의 인원이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생각보다 심각했다.
우리 마을이 풍요 축제를 얼마 전에 연 것은 추수기에 맞춘 것이고, 이 시기에는 어지간하면 사람들의 인심이 후한 편이라서 귀리나 보리죽 한 그릇 정도야 충분히 얻어먹을 수 있는데, 간이 천막 안의 사람들은 그 상태가 심각했다.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영양 상태가 심각한 것.
도주해서 오느라 씻지 못해서 위생이 불결하다고 해도 저 모습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저들의 상태는 기아에 허덕여 뼈만 남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모습. 눈이 퀭하니 들어가고 대체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조차 신기한 모습. 전생의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의 모습이 저럴까?
과연 저 모습으로 제일 가까운 그란 폴에서도 하루가 걸리는 거리를 어떻게 걸어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저것은 마치 흉년이 몇 년 이어져 굶어 죽기 직전의 모습과 비슷했으니 말이다.
“지독하군요?”
“그러니까 말일세.”
촌장과 나의 말에도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주저앉아 대부분 잠들어있거나 죽은 눈으로 멍하니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저 모습으로 어디서부터 왔답니까?”
“그게 말일세… 파텔 영지라네…”
촌장님은 파텔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나도 처음 촌장님의 말을 듣고서는 ‘파텔? 파텔이 어디였지?’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였는지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말았다.
그래, 우리 귀여운 평원 엘프들과 여관의 마스코트 에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그 정신이 나간 남작 새끼가 다스리던 영지 그곳이 파텔 영지였으니 말이다.
시트라씨에게 듣기로는 범죄를 저지른 곳은 남작의 성이 있던 직할 영지의 주민들 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사실조차 몰랐다고는 하지만, 마을에 엘프들이 나타나면 영주가 성으로 알리라고 했기에 명을 따른 이들도 간접적으로는 가해자가 된다고 했다.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는 채 영주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결국 그것들이 고스란히 엘프들의 피해가 되었으니 말이다.
촌장님과 마을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나를 깨운 것 같았다. 지금 이 사람들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다. 엘프들은 이미 주민이 되었고 기존 주민들과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사람들은 받지 않는 불문율이 있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조금 문제가 있긴 하군요.”
그렇게 촌장님과 도망친 농노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막사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이른 새벽에 무슨 일들이신가요?”
에밀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순찰을 나왔다 밖의 사람들을 발견한 듯했다.
내가 마을의 치안과 무력에 대한 권한을 넘겨받은 후 마을 자경대 인원과 엘프들을 마을 순찰과 방어에 같이 편성했는데, 밤에 잘 볼 수 있는 엘프들이 야간 경계에 투입되니 마을 자경 대원들이 아주 좋아했다.
또한 이걸 계기로 엘프들도 마을에 소속감이 생기고, 같은 마을 주민이지만 안에서 따로 놀던 두 종족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응? 오늘은 에밀이 순찰인가?”
“앗 호머 씨. 이 밤중에 무슨 일이세요. 아주머니가 챙겨주신 순무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주세요.”
“에밀이 사냥한 쥐 고기도 나누어줬는데, 순무 정도야 필요하면 얼마든지 밭에서 뽑아 먹으라고. 허허”
에밀이 밖에서 마을 주민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마을의 최고 인싸다운 친화력이었다.
잠시 후 둘의 대화 소리가 끝나고 천막 입구가 들추어지더니 에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아마도 새벽에 나를 발견하니 신기한 모양.
“러셀, 이 새벽에 무슨 일이야? 나 순찰 잘하는지 확인하러 나온 거야?”
내가 에밀의 물음에 대답하기보다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에밀도 시선을 돌려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 참혹한 모습에 놀란 모습으로 말을 잊고 말았다.
“이… 이게…”
농도들의 모습에 에밀이 입을 가리며 다급히 외쳤다.
“러, 러셀 뭐,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아? 이, 이러다 다들 죽어버리겠어!”
역시나 착한 에밀은 사람들을 걱정하며 무엇이라도 먹여야 하는 건 아니냐며, 금방이라도 눈에서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아, 그게 말이지….”
내가 에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촌장님이 에밀을 데리고 나가셨다. 아무래도 본인이 총대를 메시려는 모양.
그리고 잠시 후. 밖에서 여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 에밀?”
“저, 전 괜찮아요. 그, 그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했으니까.”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그냥 내보내자니까. 에밀? 괜찮아?”
“그냥 내보내자고, 다른 엘프들도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나.”
내가 큰 소리에 밖으로 뛰어나가자 바닥에 주저앉은 에밀과 에밀을 부축하고 있는 다른 엘프 하나, 그리고 동네 아저씨들이 에밀을 둘러싸고 촌장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마치 새끼를 지키는 짐승처럼 에밀을 둘러싸고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촌장님이 에밀에게 무슨 험한 짓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무슨 에밀이 자네 딸인가! 왜 그렇게 흥분해! 나도 받자는 게 아니고 일단 받았으니 쫓아낼 수는 없지 않나!”
“뭐라고! 에밀이 내 딸이냐고?! 이 사람 정말 매정하구먼. 에밀은 마을의 딸 아니겠나!”
“아무렴!”
아까 에밀과 인사를 나눴던 호머 씨가 촌장에게 소리를 치니, 주변에 있던 다른 두 명의 아저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에밀이 그간 마을 아저씨들의 점수를 톡톡히 따둔 모양. 마을 촌장님의 권한이 막대해서 저렇게 개기는 모습이 나오기가 쉽지 않은데, 에밀을 위해 촌장을 들이받다니 에밀이 정말 귀여움을 받고 있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웃을 수 없는 상황인데 상황이 너무 웃겼다. 웃음 포인트는 저기 네 분의 아저씨들보다 에밀이 나이가 많다는 것. 내가 너무 에밀이 귀여워서 나이를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에밀이 아주 앙증맞은 표정으로 자기 나이는 62세라고 말했다.
그렇다. 딸이 아니라 실제로 에밀은 저, 네 분의 누님뻘인 것이다.
내 나이의 두 배쯤이랄까? 나도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랬는데 아저씨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면 어떻게 반응하실까? 그 부분에서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에밀이 참 귀엽긴 한데… 이것이 참… 엘프들의 나이와 귀여움은 별개인가 보다 생각했다.
‘아니, 에밀만 그런가?’
웃음을 참는 내 앞에, 촌장과 아저씨들 사이에 호통이 오가고, 에밀은 아저씨들 사이에 주저앉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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