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156. 앙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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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기? 질투? 미움? 아니,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불신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불신에 가득 찬 시선을 받고 있다.
지금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여러 눈동자 중 하나. 불신을 가득 품은 남색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약간 날카롭지만 어여쁜 눈동자.
그 눈동자에 가득 담긴 불신이 나의 가슴을 시리게 후빈다. 저 불신은 무엇을 믿지 못한다는 불신의 눈빛일까? 나일까 아니면 이 현실?
그렇다. 리젤다가 불신을 가득 품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리젤다는 달리기 후 바로 활 쏘는 것을 가르쳐 줄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달리기로 몸을 풀었으니, 본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신을 무장하고 체력을 다져야 하는 것 아니겠나?
피티가 시작된 이후 리젤다는 계속 저 눈빛이었다. 마치 현실을 부정하는듯한.
나는 눈을 한번 질끈 감고 소리를 질렀다.
“다들 정신 못 차립니까? 첫 번째 들쥐 벨릭. 반복 구호 자꾸 나옵니다! 아직 여러분이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다는 게 느껴집니다. 다들 여덟 번째 훈련 온몸 비틀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벨릭이 벌서 네 번이나 반복 구호를 했기에, 온몸 비틀기는 벌서 천 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벨릭을 비난하는 넷의 눈빛.
“여덟 번째 훈련 온몸 비틀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덟 번째 훈련을 실시 합니다. 횟수는 백회. 몇 회?”
“백회!”
“잘할 수 있습니까?”
“찍!”
여기서 백회를 그냥 시키는 교관은 하수이다. 당연히 트집을 잡아 숫자를 늘리는 게 일등교관. 나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부족합니다! 백 오십 회. 몇 회?”
“백 오십 회!”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멀었다. 나는 다시 한번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합이 부족합니다. 이백 회 몇 회?”
“이백 회!”
그제야 찢어 질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 크게 냅니다. 알겠습니까?”
“찍!”
“이백 회 시작!”
“하나둘 셋 하나! 하나둘 셋 둘! 하나둘 셋 셋! ……”
여관과 목책 사이 공터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다섯의 훈련 쥐. 누가 보면 훈련을 시작한 지 며칠 됐는지 알겠지만, 훈련이 시작된 지는 고작 반나절. 그렇다 아침을 먹고 몸풀기로 목책을 오십 바퀴 돌고 이제 피티체조를 간신히 숙지했다.
‘피티를 숙지시키기 위해서 조금 험하게 굴리긴 했지만…’
그런데 이미 다섯은 실신 직전.
무슨 용병들이 갑옷에 무기 들고 싸우면서 고작 피티 숙지 정도로 이 정도가 되나 하겠지만, 마물 몬스터 사냥은 말 그대로 사냥. 단숨에 목숨을 끊어내는 것이 사냥이지 전생의 판타지 영화같이 뭐 합을 주고받으며 온 힘을 다해 휘두르고 피하고 구르고 그렇게 몬스터들과 싸우면 백 프로 죽는다.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급소를 공략해서 빠르게 목숨을 끊어내는 게 여기에서 사냥이고 실전인 것이다.
복싱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일반인들이 복싱 한 라운드가 삼분인데 왜 선수들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그런 새끼들은 잡아서 딱 삼 라운드만 스파링시켜보면 복싱이 왜 힘든 운동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걸 말이다.
일반인이 격렬하게 5라운드를 뛰었다? 6라운드에는 절대 팔도 못 들어 올릴 운동이 복싱이고 그런 맨몸의 복싱도 그렇게 힘든데, 갑옷과 장비를 껴입고 무거운 무기를 들고 신체조건이 명백한 차이를 보이는 괴물들과 주거니 받거니 한참을 싸운다고?
은 등급 이후에는 모르겠지만 그전에는 절대 안 되는 일.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흘러가던가?
그러니 체력훈련은 필수.
내가 뭐 이 친구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이런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것은 아니다. 아니, 뭐 조금은 그런 마음이 있기도 한데, 용병들에게는 체력훈련이 정말 필요하다.
일없을 때는 매일 여관이나 술집에서 술이나 퍼먹고 퍼질러 자기 일쑤인 용병 놈들은 근본적으로 체력부족. 그러니 일단 다듬는다. 정신도 날카롭게 세우고.
녀석들의 훈련에 대해 생각하던 그 순간 생각에 잠긴 나의 정신을 비집고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
“이백!”
“오번 들쥐 리젤다?”
“찍!”
반복 구호를 외친 리젤다의 동공이 상하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참…. 하하….’
나는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번 들쥐 리젤다 열외 합니다. 정신 안 차립니까? 정신 나갔습니까?”
“예! 아니, 찍!”
리젤다는 자신이 구호를 틀렸다는 사실에 정신줄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여러분들의 전우가 정신이 나갔습니다. 전우의 정신이 다시 돌아오게 해야겠습니다. 다들 열한 번째 훈련 쪼그려 뛰기 준비!”
“찍!”
“전우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구호는 ‘정신을 차리자!’ 단! 구호는 앞에 선 리젤다만 합니다. 리젤다가 정신을 안 차리면 전우들만 고생합니다. 알겠습니까?”
“찍?”
불신과 부정으로 꺼멓게 죽어가던 리젤다의 눈빛이 나의 말이 끝나자 사랑과 존경의 눈빛이 되는 건 당연지사. 반대로 다른 녀석들의 눈빛이 불신으로 물들었지만 어쩌겠냐.
너희들이 이해해야지…
그렇게 한참의 피티 훈련 후. 다섯의 체력과 정신을 쏙 뺀 다음에 무엇을 하느냐? 촌장의 두 아들들은 창 찌르기 삼천 번. 벨릭은 방패 들고 메이스 휘두르기 삼천 번.
안톤과 리젤다는 팔을 들어 올리기 힘들 때까지 팔굽혀펴기한 후. 활을 쏘는 것이다. 열 발을 쏴서 열 발을 다 맞출 때까지 계속. 빗나간다? 그러면 빗나간 한발마다 팔굽혀펴기 백회씩.
물론 안톤은 눕혀 쏘기 금지. 살고 싶으면 맞출 수밖에 없는 것.
버릇으로 굳어져서 쉽지 않을 거라고? 살아생전 컴퓨터 한 번도 못 만져본 놈도 군대에서 선임들에게 갈굼을 당하며 컴퓨터를 배우면 독수리 타법으로 오백 타가 나오는 게 군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하면 다 돼.
며칠 후 저녁.
“러, 러셀 빠, 빨리 밖에 나와봐요. 크, 큰일 났어요!”
“러셀, 빨리요. 빨리!”
부엌일을 한나 아주머니와 애니에게 맡기고 방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내게 이실리엘과 발레리가 놀란 얼굴로 찾아와 팔을 잡아끌었다. 홀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둘에 눈빛과 목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후다닥 일 층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푸드 파이팅을 하는 리젤다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빵과 여러 개의 빈 스튜 그릇 사이에 보이는 남색 머리카락.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돌려보니. 쌓인 빵 뒤에 숨겨져 스튜 그릇에 머리를 박고, 빵을 스튜에 찍어 연신 입으로 가져가는 사람은 벨릭도 안톤도 아닌 리젤다였던 것이다.
“리젤다?”
“찍!”
내 부름에 리젤다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훈련에서처럼.
아마 발레리와 이실리엘은 리젤다가 너무 음식을 엄청나게 먹어대니 걱정되어서 나를 부른 듯했다.
뭐 그럴 수 있다. 군대 처음 입대하고 훈련소에서 밥 먹으러 가면 제일 신기한 게 이 모습이었으니까.
처음에는 먼저 들어와 있는 훈련병들이 식판에 밥을 무슨 자기 머리통만 하게 쌓아 가는 모습을 보고, 뭐지? 저렇게 많이 먹는 놈들이 있긴 있었구나? 하며 신기해하지만, 몇 주 지나면 자기의 식판에 똑같은 양의 밥을 눌러 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훈련이니까 말이다.
훈련은 생각보다 많은 칼로리를 소모하고 밥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아마 리젤다도 그런 상태인 것 같았다.
나는 리젤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천히 꼭꼭 씹어먹어 알았지?”
“찍!”
‘너무 굴렸나?’
요즘 다섯이 나만 봐도 화들짝 놀라는 것이, 조금 걱정되긴 했는데. 리젤다의 모습을 보니 방치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사랑의 치료가 시급해 보였다.
그날 밤.
똑똑똑 똑똑
리젤다의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서 마사지를 해주고, 리젤다의 정신 케어를 위해서 리젤다를 안고 잠이든 한밤중. 내 방문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며 문밖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리젤다는 훈련이 고단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코까지 도로롱 도로롱 골며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
“러셀님 저 마리나입니다. 잠시 나와보셔야겠습니다. 촌장님과 마을 주민들이 몇 명 찾아왔습니다.”
한밤중 내 방문을 두드린 것은 여관의 가드인 마리나였다.
마리나와 로리엘을 비롯한 엘프 들은 돌아가면서 밤에 여관 경계를 서고 있다. 혹시 모를 도둑을 방지하고 마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나와 여관 손님들을 깨우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마리나가 나를 깨웠다는 것은 외부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나가자 마리나가 마력 등을 들고 문앞에 서 있었다.
아마도 오늘 불침번은 마리나였던 듯했다.
“무슨 일이야?”
마리나에게 질문을 한 후, 방문을 살짝 열어 침대 너머 창문을 보니 달이 3개 정도 남은 상태. 새벽쯤 되는 것 같았다.
“촌장님이 마을 주민들과 찾아오셨습니다. 도주 농노들이 왔다는 것 같습니다.”
“도주 농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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