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147. 축제 5
* * *
“저를 고용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저희 마을에 축제가 있어서요. 이삼일 정도 연주와 함께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요. 저희 레우케들은 돈 따위에 움직이지 않아요. 거절이에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안되네요.”
매몰찬 거절. 역시나 레우케 요정인가.
오랜만에 아내들과 웜 포트를 떠나 그란 폴까지 나들이를 나왔다. 여기까지 나온 이유는 음유시인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축제를 해야 하니 약기를 연주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줄 음유시인이 필요했기에 음유시인을 구하러 나온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광장에서 연주하던 레우케 요정을 발견하게 된 것.
이 세계에는 다양한 요정이 있다. 엘프의 신방을 만들어준 드라이어드 같이 강, 바다, 꽃 등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 다양한 크기로 살아간다. 나비 날개를 단 요정들도 있고 사람만큼 크고 여성밖에 없어서 번식을 위해서 인간형 종족들과 결혼하는 요정도 있다.
내가 말은 건 것은 레우케라는 요정족이다.
엘프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귀가 좀 더 가늘고 길다. 머리카락은 물빛이라고 해야 하나? 파란색이나 하늘색이랑은 다른 자체적으로 반짝이는 그런 빛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얘들은 여자로만 이루어진 요정들인데 전생의 집시처럼 한군데 머물지 않고 떠돌아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모으는 게 얘들의 삶의 목적이다.
음유시인으로는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축제의 단골손님인데, 지랄 같기로 유명한 요정답게 이 새끼들은 뭐든지 자기들 맘대로 한다.
“러셀, 레우케 요정은 콧대들이 높아서 자기들이 가고 싶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하기로 유명하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죠. 그리고 저는 러셀 이야기가 더 재미있으니 괜찮아요.”
”맞아. 그 인어공주 이야기 다시 해주면 될 것 같아요.“
”레우케 이야기보다 저도 그게 훨씬 재미있는 거 같아요.“
요정이 내 제안을 거절하자 아내들이 내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며 위로를 해왔다. 분위기 띄우는데 레우케면 딱 맞았는데 조금 아쉽긴 했다.
어디 술집이라도 가봐야 하나 생각하며 광장을 벗어나려는데 들려오는 뾰족한 목소리.
”아니요. 잠깐만요. 지금 그 이야기는 흘려들을 수가 없는걸요? 지금 저희 레우케의 이야기보다요. 더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하셨나요?
요정이 광장을 벗어나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뿔싸, 요정들은 성질이 더럽고 제멋대로 하기 일쑤라서 이렇게 요정과 분쟁이 생기면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이게 그냥 칼 들고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재능싸움이라는 것.
혹부리영감과 도깨비의 노래 대결 같은 그런 것 말이다. 그리고 만약에 상대방이 진다면 이것들 저주를 걸고 사라진다.
저주라고 죽음에 이르는 그런 건 아니고. 아가씨 얼굴에 수염이 난다거나, 남자 가슴이 여자처럼 변한다거나, 목소리가 가늘어진다거나, 얼굴에 여드름이 막 난다거나, 아무튼 개 짜증이 나는 그런 저주이다.
“누구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지 겨뤄보지요!”
“젠장. 아니, 누가 한데?”
내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무튼 더러운 요정 새끼들.
“그럼, 제가 이긴 거로 하고요. 고자가 되는 저주나 걸어버릴까요?”
놈이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세 아내를 바라보며 악동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때 들리는 서늘한 목소리.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다시 한번 말씀해 보시죠.”
이실리엘이 머리까지 뒤집어쓴 두건을 벗으며 말했다. 도시로 들어와서 아내들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 봐 두건을 뒤집어씌워 둔 것인데.
요정, 이 새끼 넌 뒤졌다. 너, 인마 선 넘었어!
요정도 세계수 아래 속한 존재인데, 세계수의 첫딸이 높은 엘프이니. 이 새끼들 이실리엘 밑이다.
“헤 엑! 아, 아니고요. 자, 장난이고요. 세, 세계수의 첫딸을 뵈어요. 아, 안 그럴게요.”
레우케 녀석 벌벌 떨면서 바로 이실리엘 앞에서 고양이 앞에 쥐로 변했다.
“감히 제 반려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겠죠?”
이실리엘이 매서운 눈초리로 레우케 요정을 바라보며 심문하듯 말했다.
'이실리엘아 애 오줌싸겠다. 살살 해라. 살살해.' 나는 이실리엘 뒤에서 요정을 비웃어주었다. 역시 능력 있는 아내가 있으니 사는 게 편해.
“하, 하지만 레우케의 이야기를 비웃었으니. 대결은 해야 해요!”
역시 요정 새끼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희 마음대로 하는 종족다웠다. 이 새끼 갑자기 광장에 드러누워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니, 다 큰 성인 여성 모습으로 저러니까 또 골 때리네.
사람들도 그 모습에 무슨일인가 하나둘 몰려들고 있었다.
“해야 해요! 해야 해요! 레우케의 이야기를 비웃었으니 해야 한다고요!”
광장은 레우케 요정의 꼴을 보고 곧 모여든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나도 아내들도 몰려든 사람 때문에 난처한 상황.
나는 레우케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네가 이기면, 너 저주 걸고 튈 거잖아?”
“아, 아뇨 안 그래요. 엘프님 반려라니까 안 그래요”
“너, 그럼. 네가 지면 어쩔 건데?”
“레우케. 이야기로는 지지 않아요!”
이 새끼 진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었다. 역시나 논리와는 거리가 먼 요정다웠다.
“아니, 지면 어쩔 거냐고.”
“안 진다니까요!”
아우! 진짜 때려버리고 싶었다. 그래 어린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다시 천천히 녀석을 설득하기로 했다.
얘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생존하고 있는지 미스테리했다. 외모가 예뻐서 그런가? 그런데 그런 외모라도 이 짓 한두 번이면 남자가 질릴 것 같은데.
“좋아 그런데 대결하면 누가 더 재미있는지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평가를 해주는 거잖아? 그런데 사람들이 내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고 말하면 어쩔 건데?”
“그럼, 소원! 소원을 들어주기로 해요!”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 걸려들었어! 요정은 약속한 건 지키니까. 다소 무리한 소원이라도 들어줄 것이다. 축제 걱정은 이제 끝이다.
뭐 지가 아무리 날고기는 요정이라고 해봐야. 그건 이쪽 세계 한정이다. 60억 독자들이 가려 뽑은 베스트셀러가 머릿속에 있는 나에게 감히 도전해오다니. 매운맛을 단단히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다.
“좋아! 너 이름 뭐냐?”
“시르케요.”
“좋아 너 시르케, 나 러셀 둘의 이름을 걸고 재미난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는지 평가하는 걸로 대결하는 거야 알았지?”
“아니요. 레우케랑 겨루는 거니까요. 음악이나 노래도 해야 해요. 둘 다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아니, 이건 계산범위 밖인데? 요정 아니랄까 봐 뜬금없이 이야기 대결하자더니, 갑자기 노래 타령을 하네?
진짜 때릴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팔에 느껴지는 풍만감. 이건 발레리였다.
“시르케, 대신 노래는 제가 불러도 되죠?”
발레리가 노래를 부른다고?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발레리를 바라보는데 들려오는 시르케의 목소리.
“그래요. 날 비웃은 사람은 거기 셋이니까요. 셋 중 하나가 나와도 돼요.”
내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발레리를 바라보자 발레리가 귓속말을 해왔다.
“러셀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정확히 말하면 무희가 아니고 가희를 했었어요. 춤도 배우긴 했지만. 러셀에게 자기소개할 때는 잘 보이고 싶어서 무희라고 했거든요…. 레우케가 얼마나 연주나 노래를 잘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쉽게 지진 않아요!”
귓속말을 끝낸 발레리는 약간 상기된 얼굴이었다. 아니! 이 사기꾼. 무희라며! 하긴 무희라고 하기에는 침대 위에서 좀 뻣뻣하긴 했어.
그렇게 마을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레우케 요정 시르케와 나의 이야기 대결이 시작되었다.
먼저 시르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띠리링 띠링
놈은 자기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작은 하프를 튕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것은 어느 왕국의 이야기… 불과 얼음과 사랑의 이야기. 아아… 그것은 용사의 이야기…… 그렇게 얼음에 갇힌 공주의 눈물방울마저 얼어붙었을 때. 자기 몸을 불태우며 용사가 그녀를 구해냈습니다.”
시르케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몇몇 아가씨가 눈물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은 몇 명 지루한 눈치고.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 모인 대부분은 평민. 미사여구 어렵고, 로맨스 지루하다고.
나는 시르케의 뒤를 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짧지만 재미난 이야기.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이야기를 말이다.
“제가 할 이야기의 이름은 ‘벌거벗은 여왕님’”
“어머 어머!”
사람들이 우르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여자들도 어머 어머 거리며 얼굴을 붉히지만, 그 행렬에 동참하고 있었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여왕으로 각색하는 것.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이야기인데 지배계층을 비웃는 이야기다? 이건 먹히는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대상이 여왕님이다?
나는 천천히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런데, 어린이가 소리쳤어요! 엄마! 여왕님이 알몸이야!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여왕님도요. 하지만 여왕님은 체통을 생각해서 고개를 들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행차를 이어갔답니다.”
나는 샛별 유치원 동화 구현대회 우승자의 실력을 과감하게 보여주었다.
“으하하 시원한 이야기구먼!”
“하하하 바보 같은 여왕이구먼!”
“호호호호”
광장에서 사람들의 시원한 폭소가 터져나갔다. 어딜 가나 지배계급 풍자는 인기 있는 주제니 당연한 결과랄까. 그리고 제가 아무리 잘나가는 요정이라도 몇 명한테나 이야기를 해봤겠나 이쪽은 표본군 자체가 다르다고, 육십억 지구인들이 인정하는 동화인데.
옆을 보니 시르케는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말 안 해도 제가 졌다는 걸 알겠지?
“다음은 연주와 노래예요!”
시르케 질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주와 노래를 시작했다. 확실히 연주와 노래는 수준급이었다. 걱정되어 옆의 발레리를 보자 약간 긴장한 듯한 모습.
“발레리 져도 괜찮으니까, 나에게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하면 되 알았지?
나는 긴장한 발레리를 위해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러셀, 러셀에게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부를게요.“
시르케의 연주와 노래가 끝나자 이제 발레리의 차례. 발레리가 시르케의 하프를 빌리더니 몇 번 현을 튕기고는 눈을 감더니 천천히 연주와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연주는 그렇게 훌륭하진 못했으나.
발레리의 노래는 그것 따윈 상관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소리가? 엄청난 성량으로 광장이 발레리의 목소리에 호응해 울릴 정도였다. 듣는 사람들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나도 깜짝 놀라서 멍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무슨 아라비안 분위기의 노래를 부르는데 너무 매혹적인 목소리.
“어, 어디서 저런 목소리가요….”
시르케도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발레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혹부리 영감 동화가 생각나 재빠르게 시르케에게 말했다.
“가슴! 가슴이다.”
시르케가 발레리의 가슴을 한번 바라보고 자신의 납작한 가슴을 바라보더니,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저앉았다.
이제부터 발레리의 가슴은 노래 주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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