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132. 황금마차 8
* * *
한밤중에 하늘로 쏘아진 소리 화살을 쏘아 맞힌다고?
그리고 뒤의 정찰병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정확하게 잡아낸다고? 아니, 확실히 엘프들은 밤에도 잘 볼 수 있고 활도 잘 쏘니…
근데 그럴 수가 있나?
그걸 떠나서 둘의 무심한 문답. 인간 정도는 수십 또는 수백이나 잡아봐서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 같은 그 대화에서 마리나는 엄청난 위화감을 느껴야 했다.
귀엽고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들, 비 오는 날 토란잎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몰려다니는 엘프들, 맛있는 음식에 미소를 짓는 엘프들.
마리나의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와장창 깨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리나가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
저 멀리 매복하던 놈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아!”
“잡아라! 엘프를 잡아라!”
“크하하하하!”
아주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 마차 지붕 위에서 시리엘 이라는 엘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머리 줄이나?”
다가오기 전에 숫자를 줄이냐는 말인 것 같았다.
로리엘이라는 엘프는 이제 귀찮은지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시이잉
“크어억…”
시잉
“허억…”
화살 한 대에 목숨 하나.
무기를 부딪치고 땀과 피가 튀고 비명과 신음이 난무하는 그런 전투를 상상했는데, 이건 머저리 같은 강도 놈들이 소리까지 내면서 아주 멀리서부터 뛰어오니.
마차 위에 편안한 자세로 선 엘프가 한 마리, 한 마리씩 쏘아 맞히는 상황.
그렇게 세 번째 도둑놈의 비명이 들려올 때쯤 상대방도 이상함을 눈치를 채고 뭔가를 했는지 네 번째 화살을 날린 시리엘의 입에서 조금 다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Pilin Daur! 필린 다우르!”
“뭐? 화살 막는 토템이라고?”
로리엘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화살 막는 토템이라면 오크나 고블린, 트롤 같은 놈들의 주술사가 화살을 막기 위해 마을이나 전투 중에 설치한다는 해골로 만든 토템 장식인데 그걸 저놈들이 가지고 있다고?
토템 근처에서는 화살 같은 원거리 무기들이 힘을 잃고 떨어진다. 우리를 위한 거의 완벽한 대비.
우리는 엘프 둘에 리젤다님도 활을 쏘는 궁수였고 핵심 전력이 전부 궁수인데 화살 막는 토템이라니… 마리나에게 절망이 먹구름처럼 밀려들었다.
그래, 너무 쉽긴 했어. 저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아무런 준비 없이 왔겠나.
혼전이 벌어지면 수인들과 남쪽을 돌파해 웜 포트로 내 달리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리나가 아밍 소드를 뽑아 들려고 할 때.
로리엘이 화살을 한 대 놈들 쪽으로 날려보더니, 정말 화살이 날아가다가 떨어지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러면 어쩔 수 없는데…”
로리엘이라는 엘프가 웃으며 허리춤에서 두 개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손잡이가 나뭇잎 모양으로 제작된 누가 봐도 ‘이건 엘프들이 만들었어요.’하게 생긴 특이한 단검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검날이 달빛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때 시리엘의 입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너희들 막아? 말려? 아, 막나? 해야 한다! 어서! 큰일이다!”
“로리엘 안된다!”
무슨 소리지? 뭘 말리고, 뭘 막아?
시리엘의 요상 하고도 특이한, 그리고 지금은 다급하게 터져 나와 더욱 이해가 안 되는 남부어를 마리나가 해석 못하고 있을 때, 단검을 뽑고 뛰어나가는 로리엘의 뒤로 마리나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안된다! 방법으로! 다른! 말려라! 로리엘!”
남부로 파견을 신청한 세 엘프.
로리엘, 시리엘, 에이리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이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함께 생활했기도 했지만, 다 함께 꿈에 그리던 세계수의 수호자가 되었고, 같은 무리에서 수호자로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식성도 취향도 좋아하는 것도 다들 비슷해지고 말았다.
아마 이번 파견에 셋 다 지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취향이 비슷한 절친한 친구 사이임에도 다른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선호하는 정령.
시리엘은 물의 정령을 선호한다. 물은 대지를 살아나게 하는 생명수니까.
에이리는 대지의 정령을 선호한다. 대지, 그 대지가 품고 있는 생명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로리엘은 원래는 존경하는 이실리엘님을 따라 바람의 정령을 좋아하고 그것을 아주 사랑했다. 그것에 눈뜨기 전에는 말이다.
로리엘이 언젠가부터 활쏘기 연습에 흥미를 잃어가더니, 활 관리도 잘 하지 않고 매일 단검만 닦고 있기에 시리엘과 에이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때 로리엘이 둘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활이 별로 재미없다. 단검으로 적을 쑤시는 것만큼.”
둘은 로리엘의 말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로리엘의 쑤신다는 험한 말도 처음이지만 엘프가 활이 재미없다니! 큰일이었다. 단검이 좋다니, 그건 마치 다크 엘프같이 않은가? 로리엘이 설마 고대의 엘프들처럼 다크 엘프로 타락하는가 싶어 둘은 호들갑을 떨면서 장로님께 이 사실을 알렸고, 로리엘은 그로 인해 장로님과 긴 시간 동안 면담해야 했다.
하지만 둘의 걱정과는 다르게 로리엘은 장로님께 공식적으로 단검 사용을 인정받았다. 심지어 장로님께서 두 개 한 쌍으로 된 단검을 선물해주시기까지.
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장로님께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장로님은 엘프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이니까.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나는 단검을 들고 그림자에 숨는 게 좋은데, 그림자가 항상 있는 게 아니라서…”
친구인 자신들에게 조언을 구한 로리엘.
“뭐 그림자는 빛의 반대편에 생기니까. 불의 정령 같은 걸 소환하면, 자연적으로 생기지 않을까?”
시리엘 자기 입이 문제였다.
불의 정령을 소환해 그 불의 정령의 불꽃으로 생겨난 그림자에 숨어들거나 불의 정령에 현혹된 적들을 쉽게 처리하는데 맛 들인 로리엘이 엘프들이 꺼리는 불의 정령을 아주 사랑하게 돼버린 것.
그렇다 로리엘이 엘프들 사이에서 암묵적 금기인 불의 정령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된 것이다.
자연과 숲 풀과 생명에 상처를 입히는 불의 정령을 좋아하는 엘프라니. 그것이 자기 친구라니. 그것도 자기 입 때문에.
이실리엘이 있으면 적당히 눈치를 보고 풀 나무들이 있는 공간에서는 불의 정령을 소환하지 않거나 단검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실리엘님도 없고 두 개의 단검을 둘 다 빼든 것으로 보아 십여 년 전 로리엘이 자신이 만든 기술이라며 보여주었던 그것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시리엘의 머릿속에 그것이 끝난 후 남겨졌던 참혹한 현장이 생각났다.
“안된다! 방법으로! 다른! 말려라! 로리엘!”
시리엘이 다급히 외쳤으나 로리엘은 웃으며 달려 나갔다.
마차에서 흘러나온 마력 등의 불빛을 의지해 저 멀리 달려 나가는 로리엘을 보았을 때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도적들을 보았을 때
마리나는 뭘 어찌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다 같이 마주 돌격도, 들어오는 걸 받아치는 것도, 남쪽으로 한점 돌파도 아니고 혼자 돌진?
두 마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 혼자 시간을 끌려는 것인가?
차라리 두 분을 모시고 그란폴로 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마리나가 마음을 먹을 때, 로리엘이 달려 나간 곳에서 빛이 대낮처럼 터져 나왔다.
로리엘과 도적들이 서로 마주치기 직전 갑자기 로리엘의 주변에 불꽃이 치솟더니 로리엘과 똑같은 모습의 불꽃으로 만든 나체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멀리서 보고 있음에도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주변의 푸른 풀들이 순식간에 타오르거나 말라죽거나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로, 로리엘!”
시리엘의 외침이 울려 퍼졌지만 로리엘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사라졌다고 하는 게 맞았다. 불타는 나신의 로리엘이 도적들 사이로 뛰어들자 도적들은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그 흩어지는 도적들 사이에 로리엘은 사라지고, 두 자루의 붉은 단검의 궤적이 사방에서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도적들이 하나씩 하나씩 목덜미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처박히고 있었다.
“하, 큰일. 풀. 다 죽는다!”
‘뭣?’
아니, 그럼 말리라는 말이 풀 타 죽는다고 말리라는 말이었다고? 어이없는 눈으로 마리나가 시리엘을 바라보자 시리엘이 한마디를 거기 보탰다.
“로리엘은 풀, 나무, 사랑 마음 부족하다 무척.”
도적들 따위는 죽는 데는 관심조차 없는 시리엘은, 타죽는 풀과 나무에만 안타까움을 타나 내고 있었다.
불타는 듯 타오르는 붉은 두 개의 단검을 들고 오십여 명이나 되는 도적들 사이를 누비는 로리엘과 불타는 알몸의 로리엘의 모습은 흡사 둘이 무도회장에서 주목받으며 춤을 추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화려하고 장엄한 그런 춤이 아니라 뭔가 무심하고 단조로운 그런 동작의 춤이었다.
기이한 광경. 이글이글 불타는 불의 정령에 비쳐 가끔 드러나는 로리엘의 모습은 무척이나 무심한 얼굴. 가끔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긴 했지만, 손동작 또한 간결하고 무심한 것처럼 움직였다.
마치… 그래.
시장의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생선 대가리를 치는듯한 무심한 동작.
그렇게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생선 대가리를 치듯 로리엘은 도적들의 대가리를 쳐댔다. 무심한 얼굴과 무심한 동작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