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131. 황금마차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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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와 잡화들을 구매하고 리젤다의 옷을 사느라 조금 늦어져, 일행은 세 번째 해가 떨어지기 직전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성문은 이미 반쯤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잠시만요!”
발레리가 성문을 닫던 병사들을 향해 사력을 다해 소리쳤다.
여관은 안돼! 빈대도! 음식도! 침대도!
성문 도르래를 힘겹게 돌리던 병사들이 발레리의 외침을 듣고 다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반쯤 내려간 도르래이기에 다시 돌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병사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늦었어! 내일 이용…. 어! 발레리 양 아닙니까?”
성문을 닫던 병사들의 리더 선임병 버튼이 오늘은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라, 말을 하려 했지만. 붉은 머리카락의 발레리를 확인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 길드장인 헤럴드와 함께 장기 보존식량을 납품하러 온 붉은 머리카락의 발레리를 몇 번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레리는 첫인사에서 분명 병사들 하나하나의 이름까지 물어주던 착한 아가씨였다.
버튼이 기억하는 발레리의 첫인상은 붉은 머리카락이나 이름보다는 큰 가슴이었지만 말이다.
“아, 이거 안 되는데, 발레리 양이니까 저희가 해드리는 겁니다.”
버튼이 큰 인심 쓴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앗! 분명 버튼 씨라고 하셨죠?”
“어?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상인으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일인 발레리였지만, 그런 사실은 모르는 버튼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발레리와의 핑크빛 미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같이 도르래를 돌리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 마차들만 내보내 드리자고.”
그 말에 병사들이 다시 도르래를 끌어 올려 반쯤 내려왔던 성문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머! 감사해요!”
발레리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수인 하나에게 부탁해 맥주 한 통을 병사들 근처에 내려두고 말했다.
“이거 근무 끝나고 드시라고… 맥주인데….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되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맞나요?”
“으하하하. 아니, 발레리 양이 주시는 거면, 기사님한테 혼나도 마셔야죠.”
발레리의 웃음을 대한 버튼이 신이 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렇게 병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발레리 일행은 운 좋게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성문 밖 남쪽으로 달리는 마차 행렬을 바라보는 선임병 버튼의 귓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튼 선임병님, 제가 모험가 길드에 사촌 동생이 있어서 물어봤는데, 저분 이미 결혼하셨다던데…”
“그, 그런 거 아냐 인마!”
버튼은 눈치 없는 신병을 좀 굴려야겠다 마음먹었다. 지금 머릿속에서 셋째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정하는 순간이었는데, 눈치 없는 신병 새끼 때문에 다 망해버렸다.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버튼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성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자 지평선 너머로 마지막 해가 끄트머리만을 남기고 떨어지고 있었다. 네 대의 마차가 강을 따라 난 길을 따라서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마차 위에서 경계를 서던 수호자 시리엘의 목소리가 로리엘의 귓가에 들려왔다.
“인간, 말 두 마리. 성, 문 따라온다. 계속.”
“성문 밖에서부터 말 두 마리가 계속 따라온다는 말인가?”
“맞다 그거!”
로리엘이 어둠 속에서 재빠르게 마차 지붕으로 올랐다. 그리고 북쪽의 그란 폴 방향을 바라보자 어둠 속 조금 먼 거리에서 말 두 마리가 자신들을 따라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미우, 마차 속도를 늦춰봐라.”
“네, 로리엘님.”
선두 마차를 몰던 소 수인 미우가 로리엘의 지시에 따라 마차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쪽 마차들도 그에 맞춰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로리엘은 속도가 줄어가는 마차 지붕 위에서 말 두 마리를 계속 확인했다. 말 두 마리는 어둠 속에서 마차에 켜진 등불을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속도가 늦춰지고 자신들이 마차와 가까워지자 화들짝 놀래며 말고삐를 잡아채는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모습. 다른 놈들은 보이지 않으니 분명 정찰병.
로리엘이 지붕에서, 지붕으로 마차의 지붕을 밟고 다음 마차 위로 뛰면서 습격 대비를 지시했다. 흔들리는 마차 지붕 위를 뛰어넘는데도 로리엘은 마치 평지처럼 마차를 뛰어 넘나들었다.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대비하라.”
맨 마지막 마차 짐칸에 타고 있던 마리나가 자신의 버클러와 아밍 소드를 챙기며 로리엘에게 물었다.
“몇 명입니까?”
“마차 행렬 뒤로 정찰병 둘, 도시에서 나오자마자 따라붙고 있다.”
“뒤쪽부터 처리합니까?”
“확실하긴 한데 계속 따라붙기만 하니, 먼저 치기는 좀 그렇군.”
마리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로리엘을 바라봤다. 마리나는 자기의 고용주 러셀에게 몇 번에 걸쳐서 건의한 적이 있었다. 왜 호위 병력을 이렇게 적게 편성해서 운영하냐고, 호위 병력이 더 필요하다고 말이다. 상단 호위로 일했던 자기가 보기에는 이건 너무 바보 같은 짓 같았으니 말이다.
러셀의 장사 능력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봐도 신기할 지경. 황금마차니 뭐니, 이상한 소리를 할 때만 해도 그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늪지로 갈 때마다 엄청난 물건을 실어 오고 또 도시로 판매하러 나가니,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그런데 안전에 너무 인색하달까? 보통, 이 정도 상행이면 용병이 못해도 일이십 명은 필요한데 모두 여자에 달랑 엘프 둘과 자신이 총 전력이라니.
거듭된 건의에 이번 마차 출발 전에 러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리나가 생각하는 가장 강한 생물은 뭐야?”
“그야 뭐 당연히 오우거 아니겠습니까?”
오우거, 오거 라고도 부른다. 거인이나 외눈박이 거인 같은 것은 자신이 본적도 없으니까 말이다.
몇 번 마주쳤던 오우거는 정말 강렬한 인상으로 마리나에게 남아있었다.
상단 행렬로 뛰어들어 사람 몇을 낚아채 입에 물고, 손에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놈들. 한 번에 마차를 뒤엎기도 하고 몸을 구속하던 밧줄을 끌고 있던 다섯 명의 사람들을 날려버리기도 했던 모습.
“그럼 오우거 한 오십 마리쯤 호위로 붙여주면 되나?”
“옛? 그게 무슨.”
웃는 러셀의 양손은 자신의 앞에 있는 로리엘이라는 엘프와 또 다른 엘프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다.
분명 자신도 이실리엘이라는 엘프가 온몸에서 번개가 번쩍번쩍 튀는 상급 정령을 소환해서 문어인지 뭐인지를 잡아 온 것을 보긴 했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높은 엘프라니,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하지만 그녀의 부하라는 이 로리엘과 다른 엘프들은 아직 그 실력에는 의문이었다. 귀엽게 뭉쳐서 돌아다니는 평원 엘프들과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지금 봐서는 날렵하긴 한 것 같은데 마차를 뛰어넘기도 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마차가 불타거나 다른 건 다 부서지거나 사라져도 상관없다. 너는 사람만 지킨다. 그리고 특히 러셀의 아내 둘….”
마을을 오갈 때 항상 러셀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돈이나 장비, 마차 말은 얼마나 잃어도 상관없지만, 사람은 절대 다치지 않게 하라는.
“알겠습니다.”
마리나가 로리엘에게 대답하며 정강이 보호대와 손목 보호대를 주섬주섬 장비하며 생각했다.
뭐 전투가 벌어지면 러셀이 했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겠지.
정찰병들의 추격은 지난하게 이어졌다. 가끔 속도를 늦추면 놈들은 화들짝 놀래는 것은 같았지만 그렇다고 따라오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둠 속의 마차 네 대가 그렇게 평원 위를 빠르게 가다, 천천히 가기를 반복하며 웜 포트까지 절반 정도를 남겨 두었을 때쯤.
마차 지붕에서 시리엘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앞에 매복!”
“정지!”
로리엘의 외침에 모든 마차가 일사불란하게 멈추어 섰다.
마리나가 맨 뒤 칸에서 뛰어내려 첫 마차의 리젤다와 발레리에게 붙었다. 수인들도 첫 마차로 몰려들었다.
수인들의 대장 미우가 마차에서 호신용 무기들을 꺼내 수인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했다.
“수인은 구명 받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족장의 아내들은 피로 지킵니다!”
매복 위치까지는 한참의 거리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신호 화살 소리. 아마도 뒤에 정찰병들이 매복조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 같았다.
고요한 밤하늘의 검은 장막을 찢으며 신호 화살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삐요요….
시이잉
틱.
삐요….
시잉
틱.
하지만 정찰병이 쏜 것으로 보였던 신호 화살 소리는 시작과 동시에 뭔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 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차 위에서 들려오는 시리엘의 목소리.
“소리 화살. 처리 끝.”
그리고 이어지는 시리엘의 물음과 로리엘의 답변.
“정찰병도?”
“그래.”
단문과 단답으로 이어지는 무심한 말.
그리고 마리나가 그 말들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때.
시잉 –시이잉
“큭…”
“헉…”
두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