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118. 대습지 사냥철 3
* * *
사고를 쳐버렸다. 죽은 개구리같이 자빠졌던 발레리는 코피를 펑펑 쏟으며, 엉엉 울면서 이실리엘과 리젤다의 손에 이끌려 여관으로 들어갔다.
터덜터덜 걸으며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핏방울….
이실리엘에게는 처음으로, 리젤다에게는 결혼 후 첫 눈총을 받았다.
“러셀?! 어떻게 발레리한테 이럴 수 있어요?”
“러셀 너무 하셨어요. 저희한테 쏟는 마음 아니, 그 반만큼만이라도 발레리에게 쏟아주세요. 너무 불쌍하잖아요? 발레리는 항상 러셀만 생각하는데?”
“발레리 울지 말아요. 뚝뚝.”
“발레리 괜찮아요. 러셀도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거에요. 그냥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난 것 같았어요. 정말이에요 제가 봤다니까요?”
“자자 코, 코 잡고 가요.”
“엉엉… 러, 러셀님이 피, 피했어요…”
엄청나게 혼났다. 뭔가 이상한 말이 중간에 있긴 했는데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나도 모르게 거대한 두 알의 수박이 날아들어 한걸음 뒤로 무른 것뿐인데….
그래도 엉엉 울 것까진 없잖아. 좀 측은하긴 하네.
내가 무안한 상태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촌장님이 자신의 상징적 무기인 곤봉을 허리에 차고 부리나케 달려오고 계셨다. 좌우에는 그의 아들 둘이 촌장님을 좌우에서 호위하듯 따르며 말이다.
“도둑질이라고?”
촌장님이 도착하자마자 손에 침을 뱉으며 하신 말씀이셨다.
남부 귀족 영지에서는 도둑질하면 열 배 보상해야 하거나 그걸 지급 못하면 노예가 된다. 인간끼리 똘똘 뭉쳐야 살아남는 환경에서, 자기만 잘살겠다고 하는 행동은 처벌이 강력한 편이기 때문이다.
“러셀,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지….”
“아뇨, 촌장은 촌장님이 하셔야.”
오자마자 또 촌장 직책을 던지시려는 촌장님의 말을 중간에서 바로 잘랐다.
자꾸 저한테 그런 거 드랍 시키시려면 곤란합니다. 촌장님!
“아니, 이 사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나는 그 마을의 식량과 농업 이런 걸 신경 쓸 테니 자네가 경비나 이런 재판 같은 걸 좀 맡아주면 안 되겠나?”
“솔직히 요즘처럼 외부인이 몰리면 나 혼자 뭘 할 수가 없네. 마을 자경단도 자네가 지휘해준다면,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그 엘프들도 자네 말을 잘 따르고 말이야, 아무리 우리 마을에 받아줬다고는 하지만, 엘프들은 내가 직접 뭘 시키기가 좀 그러네. 그 친구들 다치게 한 것도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말씀하시면 계속 거절하기가 힘든데.
하긴 촌장님 말씀대로 직접 엘프들에게 뭘 시키긴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다른 종족이고 한마을에 살고있어도 습성이나 성향이 다르니까.
걔들도 다들 숙련된 궁수라서 충분한 전력인데, 결국 엘프, 인간, 수인을 다 통합적으로 운영하려면 내가 나서긴 해야겠네….
“촌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긴 하군요.”
“그래, 그렇다니까! 자네가 몰라서 그런데 요즘 잠도 못 자고 있네! 몰려든 새끼들이 얼마나 사고를 처대는지!”
촌장님 옆에 두 아들도 눈 밑이 시커먼 게 꽤 오랜 시간 시달린 모습이었다. 그 둘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반대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어쩌죠?”
“아니, 이 사람 반대는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가 무기나 갑옷도 마련해주고, 도적과 게들과 싸울 때도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데. 그, 기사님들도 자네 찾아서 온 거라지 않았나, 은혜를 모르는 새끼는 이 내가 곤봉으로 머리통을!”
갑자기 급격하게 흥분하시는 촌장님을 진정시키는데,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마을 경비에 관해서는, 이따 저녁에 자경대 분들과 이야기를 한번 나누도록 하고, 그럼 촌장님도 좀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 이를 말인가 이 두 놈도 자네가 데려다 쓰게!”
촌장의 아들들은 내가 마을에 군권(?)을 넘겨받자 뭔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들을 버리는 소리에 망연한 표정으로 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랑 본인들도 같이 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텐데, 소속만 바뀐 느낌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 인생 다 그런 거다.
“그럼, 이놈들은 제가 알아서 합니까?”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아니면 내가 좀 말 잘 듣게, 다져주고 갈까?”
손에 침을 다시 뱉으며 곤봉을 뽑아 드시는 촌장님의 모습에, 도둑질하다 걸린 놈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노인네 아직도 정정하면서 사기 친 느낌이긴 한데. 할 수 없지…
나는 먼저 촌장의 두 아들과 수인들에게 손이 꿰뚫린 한 놈을 끌고 가, 놈들의 짐을 다 가지고 오라 시켰다.
늪지 뿔소의 통가죽은 일 은화 정도 한다니, 이놈들은 영지 법대로 하면 십 은화를 뱉어내야 했는데 생각보다 거지들이었다.
천막 두 개, 무쇠솥 하나, 창 네 개, 단검 세 개, 활 하나, 전통 둘, 식량 조금.
대충 말을 들어보니까 넷 다 목패 용병이고, 마침 사냥철이라 넷이 의기투합해서 대늪지에 사냥하러 왔는데, 프로그맨 하나 잡을 능력도 안 돼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다가, 한 놈이 엘프 구역에서 말라가고 있는 가죽을 발견했다는 것.
그 후는 뭐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아, 그냥 다 손 잘라서 추방할까?”
“살, 살려주십쇼. 제발 손까지 잘리면 저희는 죽습니다.”
“가죽 그거, 팔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가죽의 상태를 물었으나 엘프들은 고개를 저었다. 틀에서 빨리 떼어낸다고 단검으로 테두리를 너무 많이 쳐낸 느낌이었다.
이 새끼들 조선시대 물볼기의 뜨거운 맛을 보여줘야겠어.
여기 사람들은 좀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용서해준다? 그건 감사한 게 아니라 호구로 보고 다른 놈들이 또 달려든다. 그러니 마을에 도난 사건이 터졌을 때는 밖에 자리 잡은 애들까지, 같은 짓 하면 뒤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줘야 다른 사건이 안 터진다.
잠시 후 마을 광장에서는 나의 집행으로 이세계 처음으로 물볼기가 시행되었다. 형틀 같은 건 없어서 바닥에 엎어두고 2미터 정도 되는 장대로 촌장의 아들들이 두들겨 패는 것이었지만.
놈들은 스무 대 판결에 그래도 목숨은 건지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세 대 맞고 실신하는 놈들이 나오자 곧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차리고 오열을 토했다.
촤악
짝
“끄어어억”
쫘악
“크어어억”
셋은 결국 걸레짝이 되어 마을 밖으로 내쫓겼다.
마을 외부의 문제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는 내 집무실에서 발레리와 둘이 마주하고 있었다. 그간의 일에 대한 보고를 받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보고 받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발레리?”
“네. 러셀님.”
발레리에게서는 찬 바람이 불었다. 여기가 북부 대산맥도 아닌데 칼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시리디시린 칼바람을 맞으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 내가 미안해 발레리, 절대 내가 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발레리가 날아드는 걸 보니까, 무심코 너무 놀라서 뒤로 한걸음 물러나고 말았어.”
“네, 그렇군요….”
발레리의 대답은 영혼이 없었다. 영혼을 다시 이 땅으로 불러와야 했다. 어쨌든 내 잘못이니까.
“정말이라니까? 정말, 서운한 마음 풀어.”
“저 말고 다른 분들은 다 받아주셨다고 하더군요. 저만 땅바닥에…. 흑….”
“아니, 걔들이랑 발레리는 다르잖아?”
“흑….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니 걔들이랑 발레리는 다른 게 한 가지가 있잖아, 눈앞에 그런 게 갑자기 확 떠오르면 남자는 움찔하면서, 피할 수밖에 없다니까?”
그제야 무슨 말인지 깨달았는지. 자기 가슴을 슬쩍 내려다본 발레리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크흠. 그, 그렇긴 하죠. 그분들에게 없는 게 저한테는 있으니깐.”
그녀는 약간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 정도면 자신감이 아니라 큰 자부심을 느껴도 충분해 발레리야.
”그렇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예요.“
“어휴, 내가 마법 문에서 내리자마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와 우리 발레리가 일을 엄청나게 잘해놨구나! 와 진짜 서부에서 잔금 가지고 올 때, 그냥 그거 받지 말고 대신 발레리를 달라고 할까?”
“내가 돈을 더 줘도 이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했다니까?”
“발레리는 나의 분신 반쪽이잖아?”
내 유창한 변명을 듣고 있던 발레리의 귀와 볼이 점차 물드는 게 보였다. 하긴 칭찬도 이렇게 대놓고 하면 부끄럽긴 하지.
진짜 삐진 여자친구 풀어주는 게 제일 힘들다고 하더니 발레리가 내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여자 달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그, 그렇게까지?”
“아우 그럼 당연하지. 내가 발레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발레리는 모를 거야 그냥 앞으로는 어디 갈 때 주머니에 넣어서 다닐까 봐. 잃어버리면 어떡해.”
최대한 발레리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너스레까지 떨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그럼 해주세요.”
“뭐, 뭘?”
“아, 아까 못한거….”
“아까 못한 게 뭔데?”
“이거요!”
발레리가 내 품에 꼭 안겨 왔다.
얘가 좀 애 같은 면이 있구나. 하긴 상가의 후계자니 얼마나 엄하게 자랐을까? 칭찬도 고프고 그럴 수 있지.
그래 나는 왼팔로 발레리를 감싸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나 없는 동안 혼자서 고생 많았어. 수고했어 정말로.”
그런데 분명 기분이 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발레리가 품 안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 흑흑.”
“왜! 왜? 도대체?”
“그, 그냥 행복해서요….”
“어 그래. 잘했다 발레리, 장하다 발레리, 착하다 발레리.”
후…. 나는 한참을 발레리를 달래주어야 했다. 그냥 허리가 망가지는 게 나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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