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115. 수리아 나파로아 9
* * *
「그렇게 그녀는 알몸으로 운명을 찾아 그곳에 온 것이었다. 그의 것이 되기 위하여.」
벨은 마지막 문장을 쓰고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잉크가 말라가기를 기다리며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3권이 완성되었구나!”
벨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에 벨의 방 한쪽 의자에 앉아있던 여기사 둘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리고 그녀들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맹수같이 벨쪽으로 달려왔다.
“아가씨, 제가. 제가 먼저예요!”
“아뇨, 저번에는 제가 양보했으니, 분명 제가 먼저입니다!”
두 여기사는 벨이 완성했다는 3권째의 책이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서로 먼저 보겠다며 벨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벨은 요즘 이야기책이라는 것을 쓰는 중이었다.
이실리엘을 따라 가출한 벨이 윈터 폴로 돌아온 후, 벨은 아버지에게 얼마간의 외출을 금지당했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벨은 그렇기에 다른 영애들을 불러들여 다과회를 열었다. 그리고 벨의 집에서 열린 복귀 후 첫 귀족 여식들의 다과회, 자기의 남부 모험 이야기를 귀족 여식들과의 다과회에서 조금 맛보여 줬는데, 반응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그 뜨거운 반응에 이실리엘이 자기 집에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몇 번이나 다과회가 열렸으니까 말이다.
“벨님 정말인가요? 높은 엘프님의 목숨을 구하고 뱀의 왕에게 ‘내 다리를 가져가라, 그러나 그녀는 내어줄 수 없다!’라고 외치셨다고 했던가요?”
“아아. 정말 러셀님은 진정 기사다운 분이세요.”
“아, 근데 제가 기억하기로는 내 다리를 가져갈 수 있으나 그녀는 내어줄 수 없다셨는데?”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기억을 입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다 보니 내용이 조금씩 바뀐다는 것.
벨의 고민은 깊어갔다. 자꾸만 내용이 바뀌니 영애들이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경우가 생기고, 그러다 보니 사실에 관해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긴 것.
하지만 다행스럽게 때맞춰 이실리엘이 그녀의 집을 방문해주어 외출 금지는 흐지부지해지고 고민거리도 러셀에게 상담할 수 있었다. 러셀은 뭐 여관 주인이긴 하지만 현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재주꾼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자꾸 내용이 바뀌니, 허풍이 아닌가 의심받는 느낌이다.”
“뭐 말로 전하다 보면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설마 영애들이 벨을 의심할까?”
러셀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매정한 놈. 친구의 고민을 저리 무심하게 대하다니!
“러셀은 너무 남 이야기하듯 하는구나! 우리는 친구가 아닌가?! 친구의 고민을 이렇게 남 대하듯 말해서야….”
“아니,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다고?!”
러셀이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아니, 나는 네 아내의 친구가 아닌가? 그러면 당연히 러셀 너와 나도 친구이다!”
러셀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해결책은 마련해 주었다.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되겠네.”
“책이면 그 두껍고 큰 그것 말인가?”
보통 책은 양피지로 만든다. 양피지 책은 내용이 많아질수록 아주 두껍고 무겁다. 가격도 비싸고.
거기다가 글을 쓰라고? 남부에는 식물의 줄기를 말려서 거기에도 글을 쓴다고 하는데, 북부에서는 구할 수 없고 보통 책이라면 양피지를 얇게 만들어 쓰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대수림에 가서 보니까 엘프들은 얇은 책이 있더라고?”
“아, 식물의 줄기를 삶고 빻아서, 물에 풀어 틀에 떠 말리는 것이에요. 가볍고 오래가요. 엘프들이 기록을 위해서 만든 물건이죠. 분명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책도 세계수 근처 마을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을 테지만.”
이실리엘과 러셀의 대화에서 엘프들이 가벼운 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첫 이야기는 두꺼운 양피지 책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높은 엘프와 낭만 기사의 사랑 1권이었다.
무거운 책은 여기사들이나 들고 이동할 수 있었지만 귀족 여식들 사이에서 반응은 활화산 같았다. 수많은 영애가 책을 빌리기 위해 벨의 집을 찾거나, 북부 군용 긴급 통신 수정구를 사용해 연락해오다 들켜 각자의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1권의 열기가 한창 뜨거울 때 엘프들의 책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빠르게 찾아왔다.
벨은 공식, 비공식 외교 자리의 통역사. 엘프들이 주기적으로 북부 왕국에 외교를 가장한 식사를 하러 오게 되자, 벨이 그 자리에 계속 참석하게 되었던 것.
더군다나 외교를 위해 온 인원들이 이실리엘과 자신의 여행 동무였기에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실리엔, 엘리엘, 레아, 에우라!”
“벨, 벨이 아닌가요! 이런 곳에서 만나니 너무 반가워요.”
“반가워 모두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저희는 이 갈비탕을 먹으러 자주 와요. 인간의 왕이 다른 음식은 못 해도 이것은 제법 러셀의 여관에서 먹은 것과 같은 종류의 맛을 내주더라고요.”
“그럼 오늘은 밥을 먹으러 온 거야?”
“아니요, 정기 방문이라고 할까요? 한 달에 한 번은 방문해서 대수림에서 인간왕국 쪽으로 이동하는 몬스터의 현황을 알려주러 온 것이에요.”
한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방문한다는 그녀들의 말에 벨이 엘프들이 가지고 있다는 책이 생각났다.
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말이라도 해보는 것은 괜찮겠지?
“레아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지….”
“부탁이요? 저희에게? 어려워하지 말고 말씀해보세요. 이실리엘님의 인간 친구 벨.”
“내가 그, 책이 필요한데 아무것도 안 쓰여 있는 빈 책이 말이야.”
“아 엘프들의 책 말이군요. 얼마나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에 조금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리 귀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반응이었으니 말이다.
“어, 글쎄 대여섯 권 정도?”
“대가는 얼마나 생각하고 계신 거죠? 말씀해보시죠?”
순수한 엘프 수호자였던 그녀들은 인간 세계에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벨이 멍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필요한 것을 물었을 때 그녀들의 대답은 조금 뜻밖이었다.
“맛있는 거면 좋겠어요.”
다행히 그녀들의 순수함은 아직 지켜지고 있었다.
그녀들이 좋아할 만한 맛있는 음식은 있었다. 러셀이 남부로 돌아가기 전에 알려준 잼을 얹은 쿠키라든지, 크림을 넣은 빵, 견과류를 꿀과 설탕에 굳힌 강정이라는 것. 크림 넣은 빵을 제외하고는 보관도 용이 한 편이니 거래는 빠르게 성립되었다.
다음번 만남에서 쿠키와 강정을 엘프들에게 전달했을 때, 엘프들은 환호하며 책을 건네주며 말했다.
“벨, 더 필요한 건 없어? 책은 필요하면 원하는 만큼 줄게 이걸 얼마나 더 줄 수 있어?”
자신과 엘프들과의 작은 교역은 대성공이었다.
그 후 집필은 순조로웠다. 1권을 옮겨써 가벼운 책으로 만들고 곧 2권을 쓸 수 있었다.
1권의 제목은 높은 엘프와 낭만 기사의 사랑.
2권은 남색 머리 용병과 낭만 기사의 사랑.
1권에 이어 2권도 반응은 뜨거웠다. 영애들이 책을 먼저 빌리기 위해서 벨에게 선물을 하기 시작한 것이 돈으로 변하고, 그 돈이 적지 않은 금액이 된 것은 금방이었다. 벨은 가끔 부모님에게 받은 것보다 더 엄청난 금액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제3권 빨간 머리 대상회 후계자와 낭만 기사의 사랑이 오늘 완성된 것이었다.
여기사들의 3권 쟁탈전이 끝나고 평화로운 오후.
벨은 며칠 후 자신이 가진 돈으로 연회를 열기로 결심했다. 3권 완성을 축하하는 축하 연회를 말이다.
며칠 후 열린 연회에는 다소 특이한 춤이 인기였다. 영애들이 다들 남자친구나 다른 남자의 발등에 올라 춤을 추고 있었던 것.
러셀과 수리아 왕녀가 자기 집에서 열린 축하 연회에 처음 선보인 저 춤은, 요즘 거의 모든 연회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맨발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추지 않는 영애들도 있었지만, 자기 집에서 보여주었던 러셀과 왕녀의 그 아름다운 춤을 본 사람은 다들 그 주인공이 되고 싶어 그 춤을 적극적으로 따라 했다.
다만 남자의 발걸음에 맞춰야 하는 게 아주 힘든 것이라 능숙하게 출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그런 사람들은 다들 연회에서 주목받았다.
연회의 중간 영애들의 벨의 주변으로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남자들은 그모습에 무슨 일인지 궁금해 주변을 기웃기웃했다.
“벨 영애, 3권은 제목은 뭔가요?”
“빨간 머리 대상회 후계자와 낭만 기사의 사랑입니다. 참고로 마지막 부분에서는 후계자의 알몸이….”
영애들은 눈이 탐욕과 욕망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가 제일 먼저 빌리고 싶습니다! 은 화, 한 개를 지급하겠어요!”
경쟁이 붙은 영애들의 치열한 다툼 끝에 3권은 은화 스물다섯 개에 한 백작 영애에게 제일 먼저 대여되었다.
순서에서 밀린 영애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벨에게 물었다.
“벨님, 그럼 4권 제목이랑 언제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4권 제목은 왕녀와 낭만 기사의 사랑입니다.”
“어머 어머, 결국 낭만 기사님께서 왕녀까지? 그럼 언제쯤?”
영애들이 4권의 제목을 듣고 흥분하며 외쳤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벨이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4권은 미정입니다. 현재 진행 중이거든요.”
“넷?”
얼마 전 수리아 왕녀의 사촌오빠가 왕위에 오른 후 그녀는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벨 만이 남쪽을 바라보며 이야기 주인공들의 사랑을 빌어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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