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16화 (116/352)

〈 116화 〉 114. 수리아 나파로아 8

* * *

왕위를 탐내고 있다는 왕녀의 사촌 오라버니 헥터 그 새끼였다.

새끼 오늘 모인 귀족들이 넌지시 지지해준다고 운을 띄운 것이 기분이 좋았던지, 얼굴이 벌겋게 술에 취해서는 약간 눈도 풀린 상태였다.

왜 삼류 엑스트라 같은 요런 놈들의 행동은 다 비슷한지 모르겠다. 왜 왔는지 눈에 선했다.

“벨, 나 음료 좀 한잔 부탁해도 될까?”

“응? 아! 그래 알았다. 이실리엘, 리젤다 음료를 가지러 가자!”

“응? 음료? 음료라면 제가…”

일단 벨을 이용해서 아내들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벨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는지 아내들을 데리고 바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나저나 왕녀님께서는 이런 귀족 집안의 연회에는 참석지 않으시더니 어떤 일이신지?”

놈이 이죽거리며 왕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뭐 딱 봐도 귀족들의 분위기가 자기한테 돌아선 것 같으니,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왕녀는 알고 있나 해서 확인해보러 왔겠지?

“그냥 현자님이 계시다기에 인사나 드릴까 하고요. 이곳에 올 때 제가 모시고 왔던지라 이런 환영하는 자리에는 저도 참석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죠.”

왕녀가 담담하게 대꾸하자 뭐가 그리 심사가 꼬였는지 놈이 입꼬리를 비틀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시다면 러셀님에게 왕녀님과의 첫 춤을 허락하는 영광을 주시지요. 환영을 위해 오셨다면 왕국을 대표해서 당연히 왕녀님의 첫 춤을 현자님께 허락해드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렸을 때는 춤을 참 좋아하셨었죠. 그때는 모두 왕녀님과 춤을 한번 춰보려고 줄을 섰었는데 말이죠. 아마 러셀님도 왕녀님과 한 곡이라면 마다하지 않으시겠지요.”

왕녀가 그 말에 자기 치마를 꾸욱 말아 쥐는 게 보였다. 이 새끼 이거 생각보다 더 더러운 놈이네? 뻔히 공주가 춤 못 추는 거 알면서 와서 비꼬기나 하고 말이야.

공주의 안색이 파리하게 물들었다.

“아차차, 제가 술이 좀 취했나 봅니다. 왕녀님 다리를 생각해 드렸어야 했는데, 뭐 참석해도 춤을 추시기에는 무리가 있으실 테니 러셀님께 이유를 잘 설명해드려야겠습니다. 환영해주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놈은 왕녀를 슬쩍 보더니 측은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만 계셔야 한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 두면 어떤 소리가 나올지 몰라 놈을 제지하기 위해서 나섰다. 이 새끼 이거 생각보다 정신병자였다. 술에 취한 척하면서 왕녀 가슴에다가 대못을 박아버리네.

“헥터님 좀 취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다리 한쪽이 불편한 입장인지라 아마 권해주셨어도 힘들었을 테죠. 하하”

너 술에 취했으니까 꺼지라는 말을 해주었는데 알아들었을까?

반응은 금방 왔다. 놈이 잘 알아들었는지, 놈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관자놀이에 핏대가 살짝 서는 것이 보였다.

“제가 좀 취했나 봅니다. 좀 쉬어야겠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왕녀님 그리고 러셀님”

“아 참. 그리고 아까 귀족들이 모여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더군요. 남자 계승의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면서 말이죠.”

마치 왕녀를 다리 병신 취급까지 하며 나까지 엮어 왕녀에게 꼽을 주다니. 북부에서는 다친 전사를 존중하는 문화가 있는데. 물론 왕녀가 다친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비아냥거리며 이제 왕이 다 되었다는 왕녀에게 승리했다는 듯 자랑까지 하곤 사라졌다.

놈이 떠나자 음료수를 든 벨이 이실리엘과 리젤다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로 돌아왔다.

“러셀 무슨 일이었어?”

“아니, 그럴 일이 있었어…”

“왕, 왕녀님?”

리젤다의 목소리에 왕녀를 보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벨이 이실리엘을 동원해 그녀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재빠르게 막아섰기에 망정이지 연회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사방에 보일 뻔했다.

그래 화나고 속상하긴 하겠지. 모욕당하는 자리에 나도 있었으니.

“흑…. 왕위 따위에는 욕심도 없는데, 춤도 못 추는 다리 병신 취급까지 당하니 속이 좀 상하네요. 저도 춤 예쁘게 출수 있는데…”

그녀는 울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을 꺼내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감정을 금방 추스르는 것이 이런 게 왕녀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잠깐이었다.

“여러분들 앞에서 추태를 보여서 죄송합니다. 춤 정말 그리운 단어네요…”

마지막 말을 하는 그녀는 회색이었다. 그 소리에 벨을 비롯한 이실리엘, 리젤다는 아주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때 벨의 부르는 소리.

“러셀!”

“왜 또.”

“춰라!”

“뭘?”

“왕녀님과 춤을 추어주어라!”

아니, 얜 내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뭔 소리야 갑자기. 내가 무슨…”

아내들도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 이분들이 아무리 불쌍해도 그렇지.

“낭만의 기사이며, 현자인 너도 방법이 없는 것이냐?!”

아니, 있을 것도 같은데? 근데 낭만의 기사는 또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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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 왕가 내에서 자신을 견제하는 것 정도는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자님 앞에서 당한 모욕은 수리아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첫인사에 그분을 코피를 터트렸을 때 자신의 처지를 들은 그분이 하셨던 말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

“그간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습니까? 저런 딱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으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위로였다. 전장에 서는 것은 왕족의 의무였고 넘어짐은 자기의 선택의 결과니까 말이다. 누구를 원망해본 적도, 위로를 받아본 적도 없었는데.

자신의 마음은 그의 위로를 달콤하게 맛보고 말았다.

이런 자상함이 있으니 높은 엘프도, 북부의 귀족 영애도 아내로 얻을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두 분이나 있으니 다른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떠나시기 전 얼굴이나 한 번 더 볼까 싶어서였는데, 그래서 입지 않던 드레스도 꺼내입고 참석하지도 않던 연회에 참석한 것인데…

잠깐의 인사 끝에 우두커니 앉아서 마치 장식품같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 한 번쯤 더 나눠보고 싶었는데…

이런 능력만 아니라면 나도 예쁘게 춤을 출 수도 있고 공주의 첫 춤이라는 영광을 그에게 선물할 수도 있을 텐데.

결국 연회 내내 아무것도 못 하고 장식품처럼 앉아있다가 사촌 오라버니 헥터 때문에 서러워 눈물까지 보이고 말았다.

이런 망신이라니…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는 그분의 아내들과 그분의 시선에 너무나 서글퍼졌다.

그런데 말썽꾸러기 벨 영애가 갑자기 러셀님에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자신과 같이 춤을 추어주라며 떼를 썼을 때.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진짜 왕녀님 기분 풀어드려야 한다고 다들 부탁하니까 딱 한 곡만 출 거야. 유부남이 이러면 안 되는데…”

투덜거리며 말하는 마법 같은 목소리.

‘뭐? 진짜 출수 있다고? 춤을? 어, 어떻게?’

“왕녀님? 실례를 좀 해도 될까요?”

“옛?”

“일단, 왕녀님의 신발을 벗겨드려 벨. 아 맨발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저항할 틈도 없이 발을 감싼 천과 신발까지 모두 벗겨 내지고, 기사들이 아가씨를 안는 모습으로 그의 품에 안겨 연회가 열린 홀 중앙까지…

그리고 그는 자신의 두 발등 위에 나를 올려두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어. 이, 이게…”

“제 다리 움직임에 맞춰서, 부드럽게 움직여주시면 됩니다. 북부의 춤을 저 혼자 추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네, 넷…”

그리고 그는 은화 한 개를 엄지손가락으로 튕겨 하프 연주자에게 날려 보내며 말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곡으로.”

그러자 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이 입을 가리고 ‘어머 어머’를 외쳐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은화를 받은 하프 연주자는 온갖 기교를 넣어 감미로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율에 실려 그분의 발등에 올라 이 몸이 된 후 처음으로 춤을 출 수 있었다.

아…

이것이 현자. 이래서 현자.

어린아이를 발등에 태워서 걸음마를 연습시키듯, 자신을 발등 위에 올려 춤을 추다니. 왜 이런 생각을 아무도 한 번도 못 했을까?

그와 마주 잡은 손과 허리에 느껴지는 그가 두른 손이 강렬하게 자신을 휘감는 느낌.

그리고 춤을 추며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왕녀님, 왕위에 욕심이 없더라도, 아까 그런 놈에게 아름다운 영토와 저희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을 넘겨주시렵니까?”

“그리고 왕녀님의 원치 않더라도, 운명은 왕녀님을 이곳의 정당한 통치자로 인도할 것입니다.”

“만약 그때 누군가 왕녀님이 여자라는 사실.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낸다면 그때는 그렇게 말씀하십시오.”

“짐은 에삭스와, 국가와 혼인했노라고.”

아아… 머릿속이 불타올라 잿더미만 남아 하얗게 되었다.

운명. 그래, 그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전장에서 죽어간 오라버니들과 전투 끝에 육신에 남겨진 병마와 싸우는 아버지.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러웠다.

남은 가족 없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지는 것이,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나에게는 왕국이 남아 있었구나.

에삭스의 수리아 나파로아 그 이름에 새겨진 것 같이…

“러셀님?”

“예?”

“죄송합니다.”

음악이 멈추고 춤이 끝나자 참을수 없던 수리아는 러셀의 입에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감사의 의미를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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