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15화 (115/352)

〈 115화 〉 113. 수리아 나파로아 7

* * *

“우리 가문은 검가니 당연히 무력이 높으신 왕녀님을 지지하고 대부분 귀족도 왕녀를 지지하지, 하지만 왕가 새끼들이 대부분 사촌오빠라는 헥터에 지지를 보내는 것 같네. 그놈이 왕이 돼서 과연 전장에 나설지…. 전장에 왕도 없이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싸운단 말인가?”

벨의 아버지가 말을 끝냈을 때는 약간 흥분해 상기된 상태였다.

“그럼 왕위 계승권자는 왕녀님과 사촌오빠 딱 둘뿐입니까?”

“그렇네, 이상하게 이번 대의 왕가의 인명피해가 극심했네. 계승권자는 단둘. 차기 계승권자도 없으니 심각한 일이지….”

뭔 가문이 멸문할 때까지 북부 전선에 갈아 넣다니. 이 동네는 결코 왕 하면 안 되겠네, 왕이 아니라 무슨 고기 방패야.

‘그나저나 남자 계승 원칙이라 왕이 못된 다라…’

“그럼, 그거 그냥 왕 하게 두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뭣?!”

“아니, 자네. 내 이야기를 지금까지….”

내 말에 벨의 아버지는 당황하고 어이없는 모습으로 날 바라봤다. 딱 봐도 이 새끼 현자라고 한 새끼 누구냐 이런 표정으로.

“지금 남자 계승 원칙의 전통이 있기에 왕녀는 왕이 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지.”

“왕은 무조건 전장에 나서야 하는 전통도 있고요?”

“그렇네”

“북부 전선은 위험해서 왕가의 피해가 심했다죠?”

“그렇네, 뭘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

“그러니까 사촌오빠인지 뭔지가 왕을 하고 싶어 하면 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전통대로.”

“그리고 전통대로 전장에 앞장설 것을 요구하십시오. 전통으로 요구한다면 왕가도 거절 못하겠지요? 결국 무력이 약한 사촌 오라버니는 목숨을 걸고 전장에 앞장서야 할 것이고, 그러면 얼마 되지 않아 왕녀가 원치 않아도 왕위가 승계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음흉한 웃음을 씨익 웃어주었다. 아니 이걸 왜 걱정해? 하고 싶다는 놈 시키면 되지. 하지만 권리만 얻으려면 안되지, 의무도 다해야지 목숨을 걸고.

“혹시라도 왕위에 올라 왕녀를 해코지할지도 모른다면, 차기 국왕께서 북부 대전선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실 때까지, 어디 멀리 왕녀를 피신시켜두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 말을 끝냈을 때 벨의 아버지는 뭔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입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 현자님!”

에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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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윈터 폴에서는 귀족들의 연회가 열렸다. 북부에서도 귀족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에삭스에서나 가끔 열린다는 연회인데, 높은 엘프님이 오셨다며 벨의 아버지가 연회를 여신 것이다.

벨의 아버지에게는 물론 다른 목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왕위 계승에 관해 생각을 함께하는 자들과의 공식을 가장한 비공식 모임이랄까?

이실리엘과, 리젤다는 어제부터 벨과 드레스를 맞춘다며 신이나 있었으니, 복잡한 정치 이야기는 놔두고 셋은 즐기게 해주는 게 좋겠지?

“제가 이렇게 이 자리를 빌려 다른 분들을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 왕위 계승 논쟁에 대해서 저희가 태도를 조금 바꿔야 하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뭣! 원터 폴 공작 실망입니다. 왕가와 생각을 함께하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검가로 유명한 윈터 폴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벨 아버지의 폭탄 투하에 오후에 있을 연회를 위해 다른 이들보다 일찌감치 도착해있던 친 왕녀 파 귀족들이 분노하며 외쳤다.

“아아. 다들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자세한 설명은 대늪지의 현자님께서 해주실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나는 분명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던 나의 부끄러운 이명을 말씀하신 벨의 아버지를 한번 노려봐주고 귀족들 앞에 섰다. 자신보다 내가 이야기해야 뇌에 근육만 잔뜩인 무가 출신 인물들이 설득이 잘된다며, 하도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인데.

이런데 끼면 귀찮고 골치 아픈 일만 생길 것 같은데, 왕녀가 불쌍해서 한 번만 도와주기로 했다.

“아, 안녕하십니다. 그, 부끄러운 이명을 가지고 있는 러셀이라고 합니다.”

“오! 저분이! 높은 엘프의 반려이신…”

“오! 대늪지의 현자님 또는 남쪽의 현자님이라는!”

아니, 뭔가 하나 호칭이 더 늘었는데?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말을 이었다. 헤럴드님 두고 봅시다!

“여러분들의 고민은 이미 들어 왕녀님의 왕위 계승에 대해서, 다들 왕가의 적통이니 당연하다는 견해인 것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왕녀님과 잠시 동행해서 그분의 성품이 훌륭하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더군다나 무력도 뛰어나신 분이니 당연히 그분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사견이지만요.”

“오오. 역시!”

“역시 현자님도 저희의 의견을 지지해주시는군요!”

“대 늪지의 현자! 남쪽의 현자!”

한 손으로 얼굴을 잠깐 쓸어내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피곤하구나… 정신이…

“하지만 북부의 전통은 지엄한 것 아닙니까? 남자 계승 원칙이라는 전통을 여러분들께서 어기고 왕녀를 계속 지지하신다면 이제부터 모든 전통은 지켜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현자님 전통은 분명 중요하지만…”

“저희가 전통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변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끝까지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니까 왕이 전선 최전방에 서야 한다는 전통도 어겨질 수 있음을 기억하셔야 한다는 거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맨날 전장에서 칼 밥 먹는 분들이라 이해가 느리시네… 확실히 북부 귀족은 정치에 가깝다기보다는 군인에 가까웠다. 정치 수완 좋은 귀족들이라면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알아서 눈치들 채셔야지.

“제 이야기는 그런 것입니다. 왕녀의 사촌오빠께서 왕위에 오르고 싶어 하다면 그분을 당연히 왕위에 올려드려야겠지요. 남자 계승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전통이니까요.”

“그리고! 전통은 중요한 것이니 왕위에 오르신 왕녀의 사촌 오라버니께서는 당연히 최전방에서 여러분들을 이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무력이 약하다는 그분이 과연 얼마나 전장에서 여러분을 이끄실 수 있을지…”

“그분께서 잘못되신다면 마지막 남은 계승자는 왕녀님뿐이라던데…”

내 말이 묘한 여운으로 끝나자 장내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입들을 반쯤 벌리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다들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오오! 저희는 왕가의 충신 그렇지요! 당연히 남자이신 오라버니를 왕위에 모셔야지요!”

“어리석은 저희를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통을 어기려 한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열렬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 북부의 군인들 생각보다 음흉한 분들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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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의 집에서 방문함으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이실리엘과 리젤다의 아름다운 드레스 입은 모습과, 그녀들과 함께 출 수 있었던 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회 직전까지 벨이 둘을 보여주지 않아서 드레스 입은 모습이 엄청 궁금했는데, 연회가 시작되고 얼마 후에 셋이 등장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실리엘은 자신의 진짜 머리 색 같은 에메랄드 빛 드레스, 리젤다는 푸른 드레스, 벨은 개나리 같은 노란 드레스.

이날을 위해 이틀 동안 춤 연습 꽤 했지.

배우는 동안도 즐거웠지만, 연회에서 아름답게 차려입은 그녀들과 춤을 추다니.

나 진짜 성공했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십오 년 동안 집 안 보다 밖에서 잠드는 일이 더 많았는데…

연회 시작 때 공작의 손에 이끌려 이미 인사는 한 바퀴 돌았기에 춤이 끝나고 아내들과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려 할 때였다.

저 멀리 빈 테이블 한편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왕녀가 보였다.

벨의 말로는 왕녀는 아무래도 몸이 그러니 이런 자리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는데, 오늘은 좌우를 부축해주는 시녀 둘을 데리고 연회장을 찾았다.

그런데 다른 귀족들은 오늘 연회에 또 귀신같이 끼어든 사촌 오라버니에게 몰려가 지지해주는 척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연회장에서 그녀는 방치된 상태였다.

흰 드레스를 차려입은 핑크 머리의 핑크 공주, 흰 드레스라 머리 색이 더 도드라져 보여 혼자 있는 모습이 더 확연했다.

“러셀, 왕녀님 혼자 계신 데, 저희라도 가서 같이 있어 드리면 안 될까요?”

리젤다도 그 모습을 보았는지 측은해 보이는 왕녀의 모습에 가만 있을 수가 없었나 보다.

결국 우리는 왕녀의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왕녀와, 벨, 이실리엘, 리젤다 넷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 주도자는 역시나 벨이었는데, 나를 힐끗거리면서 기사가 낭만이 어쩌고 해대는데 귀족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뭐 그런 내용인지, 왕녀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 벨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을 때였다.

“즐겁게 지내고 계십니까? 현자님과 그 아내님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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