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111. 수리아 나파로아 5
* * *
“아니, 맛이 진짜 그러니까….”
“커어~ 맛 조타~ 저, 한 그릇 더 안 되겠습니까?”
“후르릅~ 와 땀이 그냥.”
“저는 밥이라는 것 좀, 쌀을 이렇게도 먹을 수 있군요?”
화이트 힐의 식당에서는 네 명의 왕이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가며 고기를 뜯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있다.
기이한 장면에 장인어른 장모님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기뻐하는 모습.
내가 북부의 왕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내놓은 요리는 갈비탕!
처음에 내가 만든 식사라니 다들 기대하는 모습이었지만 삶은 고기를 국물과 같이 내어놓으니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조심스럽게들 맛을 보더니 결국 지금의 모습이었다.
갈비탕이라는 게 한번 맛을 보면 참을 수 없거든.
생각해보니까 삼계탕도 끓였는데 갈비탕은 왜 못하겠냐는 생각이 들었기에 양고기로 갈비탕을 끓여봤다. 북부는 비교적 서늘한 기후라서 농작물을 많이 키우진 못하는데 무는 생각보다 여기저기서 키우고 있었기에 여기저기 자라는 무를 딱 본 순간 양의 갈비를 푹 끓이고 무를 좀 넣어서 시원하게 맛을 낸 가정식 갈비탕이 생각났거든.
특별한 재료도 거의 필요 없고 이보다 북부에 더 어울리는 요리가 어디 있겠나 싶었다. 더군다나 산삼이 있으니 같이 끓여서 잡내도 잡아주고 향도 추가하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생각해보니 레시피를 알려주면 스튜 대신 냄비에 끓여놨다가 야간근무 다녀와서? 크…. 생각만 해도 북부에 정말로 잘 먹힐 것 같았다. 북부에 갈비탕집이나 내볼까?
식당을 살펴보자 나의 첫 손님들은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가고 계셨다.
“어휴 이러니까 수호자님들이 러셀님 음식이 맛있다고 한 거군요? 저는 삶은 양고기가 이렇게 맛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그 가실 때 레시피를 알려드릴 테니 성에 엘프들이 오면 대접하시면 될 겁니다. 이 음식은 스튜처럼 끓여놓고 먹을 수 있는 거라서 말이죠.”
“오오. 감사합니다. 그렇군요. 스튜 대신 먹으면 좋겠어요. 겨울에 추울 때 훈련 나가서도 좋겠습니다.”
하툰의 왕은 외견처럼 호쾌한 사나이 느낌이었다. 국물을 시원하게 그릇째 꿀꺽꿀꺽 마신 그리프님은 두 번째 ‘한 그릇 더’를 외치고 있었다.
다들 잘 먹고 있어 만족스러운 가운데 왕녀를 살펴보니 깨작깨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 아뇨 맛 맛있습니다!”
그녀의 그릇을 보니 고기는 소스에 다 찍어 먹었는데 국물은 하나도 못 먹은 느낌. 딱 봐도 기름기 있는 국물을 못 드시는 느낌이었다.
하긴 이런 분들이 좀 있긴 하지.
“기름기 있는 국물을 잘 못 드시나 보군요?”
“그, 그걸 어떻게…”
“요리하다 보면 손님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잘 알게 되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른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아,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그래 전생에 가끔 기름진 국물 잘 못 먹는 친구들이 있었다. 느끼해서 싫다고 했던가.
아까의 실수 때문인지, 능력 때문인지, 왕녀는 그 후로부터 계속 기분이 가라앉아 보였기에,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준비해두었던 달콤한 음식을 내왔다.
처진 기분을 풀어주는 데는 달콤한 음식이 제일이니까 말이다.
내가 준비한 것은 캐러맬라이징 한 시럽을 뿌린 노란색의 탄력 있는 모습의 푸딩!
냄비에 꿀과 양젖을 넣고 은근하게 데워준다. 양젖이 식으면 잘 푼 새알을 넣고 골고루 잘 저어서 채에 한 번 거른다. 마지막으로 그릇에 넣고 오븐에 한 번 구워 주면 되는 아주 쉽고 맛있는 음식! 그것이 푸딩이다.
뭐 캐러맬라이징 한 시럽은 물이랑 꿀만 넣고 끓이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니 이보다 쉬운 후식이 없다.
왕녀는 내 푸딩을 받고 한 숟가락 떠먹자마자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연신 맛있다는 말을 해왔다.
“맛, 맛있어요. 달콤해요!”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만족스럽게 식사하는 왕과 왕녀를 지켜보던 가운데 헤럴드님이 물어왔다.
“이제 그럼 남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뇨 그 이실리엘의 친구 집에 잠깐 들렀다 가려고요.”
결혼식도 다 끝났으니 돌아가야 했지만, 벨과 약속했으니까 들렀다 가기로 했다. 아직도 여기사의 어깨에 올려져 끌려가는 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집에서 외출 금지라도 당하고 있을 느낌이긴 한데.
“높은 엘프님의 친구라면?”
“아. 그, 벨 윈터 폴이라고”
내 말에 이실리엘이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하. 벨, 벨 양 말이군요.”
헤럴드님이 어색하게 웃는 가운데 달콤한 푸딩을 연신 입에 넣던 왕녀가 말했다.
“윈터 폴 가문이라면 저랑 같은 방향이네요. 괜찮으면 동행하시지요. 엘튼의 왕 헥토르님 빼고는 다들 마법 문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편하게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제 성에서 원터 폴 가문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발레리랑 약속했던 기간이 아슬아슬 해오기도 했기에 남부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기간을 줄일 수 있으면 좋긴 한데 왕녀랑 같이 가야 하니 좀…
생각을 좀 해야 했다. 높은 분들이랑 다니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에 십상이니까.
“앗 그래도 되나요?”
그러나 이실리엘이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물론이죠. 저희 성에 묵었다 가셔도 영광입니다. 저희 성은 북부 대산맥 최전선이라서 여러 가지 재료나 가죽들도 많고, 대산맥을 못 보셨다면 구경하실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
나도 대산맥은 못 가보긴 했지. 통제가 심한 지역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모험가들이 산맥을 들쑤셔 일어날 문제들 때문인지 입산은커녕 성벽에도 못 올라가게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한번 보고 싶긴 하네 이 세계 최고봉이 있는 곳이니 말이다.
“러셀, 저희 왕녀님이랑 같이 가죠!”
내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중에 이미 동행은 확정되어 있었다. 네 그럽시다. 마님.
“그, 그래 이실리엘 왕녀님 가실 때 같이 가자.”
그렇게 왕녀와의 동행이 결정되었다.
다음날 근처 영지의 피해를 조사한다며 엘튼의 국왕이 떠나고 나머지 국왕들도 자신들이 데려온 사람들과 하나 둘 떠나버렸다.
남은 것은 수리아 왕녀와 우리뿐이었다. 출발 준비가 한창일 때 나는 리젤다에게 부탁했던 것이 다 준비되었나 물었다.
“리젤다, 부탁한 건 준비 되었어?”
“네, 러셀 잘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러셀이 부탁한 대로 9번 쪄서 9번 말렸어요. 빨리 말리느라고 잘라서 말렸는데 괜찮을까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리젤다가 내 부탁으로 화이트힐에 혼자 남아 준비한 것은 홍삼이었다. 나도 알고 있는 지식이 9번 쪄서 9번 말린다는 내용뿐이기에, 그냥 말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쪄서 말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리젤다가 가져온 물건을 보니 나쁘지 않아 보였다.
완성된 홍삼을 보니 잘 말라서 부피와 무게가 줄어서 상당히 많은 양을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등짐에 많은 양을 넣고 가방을 메니 개성보부상인 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남부에 가서 잘 저장해두고 두고두고 써야겠다.
“러셀 준비 다 끝났나요?”
이실리엘이 준비가 다 끝났는지 나와 리젤다를 찾아왔다. 벨을 만난다는 생각에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응 우리는 준비가 다 되었어 이실리엘은?”
“저랑 로리엘이랑 수호자들도 준비가 다 끝났어요.”
잠시 후 내성 광장에 열린 마법 문 앞에서 짧은 환송이 있었다.
“러셀, 리젤다를 잘 부탁해요.”
“네, 어머니 아이가 생기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버님은 내 말에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셨고, 아이라는 말에 옆에 있던 리젤다의 얼굴을 붉게 물든 환송이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수리아 왕녀를 따라 마법 문을 넘었다. 물론 마법 문까지 가는데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수리아 왕녀를 부축해야 했지만 말이다.
진정 거대한 산맥이었다. 전생에 히말라야가 이럴까? 알프스? 그래 딱 그런 느낌이었다. 높다란 봉우리 위에는 만년설이 여기저기 보이고 산간 여기저기에 숲과 초장 나무들이 뒤섞여 있는 느낌.
수리아 왕녀를 따라 넘은 마법 문밖에서 느낀 감상이었다.
마법문의 반대쪽은 산맥 아래를 둘러싸듯이 지어진 길고 긴 성벽 뒤의 한 탑 위였다. 탑은 산맥 쪽으로 시원한 전경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압도적 위엄에 그대로 멈춰서 하염없이 산맥을 바라보았다.
꾸어어엉
감상에 젖은 나를 깨운 것은 갑자기 들려온 몬스터의 울부짖는 소리였다.
“오우거가 성벽까지? 다들 이쪽으로!”
“발리스타를! 오우거가 성벽으로 붙지 못하게 활을 쏴라!”
갑자기 성벽이 소란스러워지며 병사들이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공성 병기인 발리스타가 성벽 위에서 이동하는 모습까지.
“아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왕녀님.”
“뭐, 오우거라도 몇 마리 몰려왔나 봅니다.”
왕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오우거면 막 성벽 부수고 그러지 않나요? 무슨 동내 똥개가 몰려온 것처럼 말하는 수리아 왕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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