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10화 (110/352)

〈 110화 〉 108. 수리아 나파로아 2

* * *

“할머니 또 올게요.”

“행복해지렴. 이실리엘.”

할머니의 품을 꼭 안고 이실리엘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이곳까지 오는데 5일 할머니 댁에서 열흘이나 묵었으니 이제는 돌아가야만 했다. 화이트 힐에서 리젤다도 기다리고 있고 대늪지에서 발레리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실리엘은 다시 한번 뒤돌아 집 앞에 서 계신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러셀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50년? 60년? 생각해보면 정말 짧은 시간이다.

할머니가 보고 싶어질 테지만 100년 후에도 그 후에도 할머니는 저 자리에 계실 것이다. 엘프의 삶은 길고 기니까.

그렇기에 짧은 이별을 뒤로하고 그를 따라나선다.

처음에 나섰던 길은 그를 찾기 위해 자신 혼자였는데. 이제는 그 길을 그와 함께 걷는다.

옆을 걷는 러셀을 올려다보자 그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이 다시 가슴에 밀려든다. 대수림에는 엘프의 혼인식을 위해서 방문했지만 뭐랄까? 그냥 형식적인 느낌이었다. 이미 첫날밤을 치러서 그랬을까? 대늪지에서 수많은 바람의 정령들에게 관찰당하며 치렀던 첫날밤은 정말 신비하고 대단한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이실리엘 다음에 또 오자.”

러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상한 남자. 연회에 만났던 엘프들의 인간 남자는 어떠냐는 질문에, 러셀과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 해주거나 그가 자신에게 해주는 사소한 것들을 말해주었는데, 다들 정말이냐고 다시 물어왔었다. 엘프 남자들은 아무래도 감정 표현이 적으니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왜 이실리엘?”

“어서 돌아가죠. 가족들이 기다리는 우리 집으로.”

러셀이 꽉 잡아주는 손이 무척이나 따듯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이실리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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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다섯 왕국 긴급회의.

북부의 다섯 왕은 가끔 북부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의하기 위해서 직접 만나 대화하거나 수정구로 회의하곤 했는데, 보통은 수정구 대화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대산맥 또는 대수림 전선에 강한 마물이 등장하면 국왕이 직접 나가야 하는 경우도 많기에, 전선을 맡은 세 국왕은 자리를 비우는 것을 꺼렸고, 후방의 두 국왕은 회의가 열리면 자신 둘 중 한 군데에서 회의를 해야 하니, 준비가 귀찮아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정기회의 때가 아님에도 하툰을 통치하는 그리프 3세와 엘튼의 국왕 헥토르가 강력히 직접 만날 것을 요청해. 다섯 왕은 최후방에 있는 도시인 한겔로 몰려들었다.

한겔의 국왕 아서 아비스가 의자에 기대 발을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그냥 편하게 통신구로 할 것이지 왜 자꾸 모이자고 해서는….”

아서 입장에서는 한번 모일 때마다 음식 준비니, 다과 준비니 들어가는 돈이 많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비교적 후방에서 다섯 왕국의 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처지니, 이런 모임은 지양 하는 편이 좋은 것이다.

“이번은 중요한 일이라니까 그러네!”

헥토르가 아서의 말에 짜증이 난다는 투로 말했다. 저 돈, 돈 하는 주둥이에 돈이라도 한번 처박아 넣어봤으면. 헥토르는 돈타령만 하는 아서가 제일 얄미웠다. 예산이 어쩌니저쩌니, 저런 놈이 북부 왕이라니!

“다른 놈들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건데?”

에삭스의 국왕을 제외하고는 다들 비슷한 나이 비슷한 시기에 왕의 자리에 올랐었고, 기사 수련도 일부는 같이 받았었기에 네 국왕은 상당히 친밀한 사이였다. 그래서 공식적인 자리가 아닐 때는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라 이렇게 가끔은 욕설도 하는 편이었다.

“만나자고 한 새끼가 아무튼 제일 늦어요.”

“제일 한가한 놈도 제일 늦고 말이야.”

하툰과 크람의 왕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크람은 북부 다섯 왕국에서 제일 안전한 후방에 있는지라 다른 왕들에게 무시당하기가 일쑤였는데 ‘한가한 놈’이라는 표현은 이들이 크람의 왕을 놀릴 때 사용하는 단골 표현이었다.

그때 밖에서 시종들이 두 왕의 도착을 알려왔다.

“이제야 왔군?”

“뭐야? 아직 안 온 사람은?”

하툰의 국왕 그리프가 가방 세 개를 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며 말했다. 그리프의 얼굴은 뭐가 그렇게나 즐거운지 싱글벙글한 모습이었는데, 그는 가지고 온 가방을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 옆에 내려 두더니, 원탁 자신의 자리에 앉아 실실 웃음을 흘려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회의장으로 들어온 크람의 국왕인 스테판은 자신이 좀 늦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괜히 또 꼬투리나 잡히지 않을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거 에삭스 국왕님은 못 오시는 거 아니야? 수정구 통신해 봐야 하나?”

노쇠한 에삭스의 국왕이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는 이미 접하고 있는 넷이었기에, 다들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던 중 밖에서 시종이 에삭스에서 대리인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들어선 것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였는데 그녀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다 입구 문턱에 걸려 한번 넘어질 뻔하더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원탁 쪽으로 구르고 말았다.

그 모습에 네 왕은 이마를 잡았고 가장 가까이 있던 크람의 국왕이 달려가 그녀를 일으켜주었다.

에삭스의 수리아 나파로아 왕녀.

현 북부 무력 최고의 정점. 북부의 봄 벚꽃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전장에 나가면 자기 머리통만 한 모닝스타를 휘두르며 모든 것을 짓뭉개는 그녀인데, 평소에는 항상 저런 모습을 보여준다.

계약한 신이 문제인 것 같은데 네 왕은 그녀의 저런 모습이 익숙하다면 익숙한 편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늦었습니다. 오다가 몇 번 구르는 바람에. 아, 죄송합니다.”

수리아는 몸 여기저기 흙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먼지가 그녀가 얼마나 험한 여행을 했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북부의 봄 벚꽃이 직접 방문하다니 역시나 에삭스의 국왕께서는 병환 중이신가?”

아서가 수리아에게 물었다.

“예, 아무래도 이제 병환이 깊으셔서.”

“여기 참여한 것으로 봐서는 이제 그럼 에삭스는 수리아님께서?”

“아뇨, 아무래도 결혼을 못 하면, 사촌 오라버니께 돌아가겠죠.”

수리아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녀가 왕좌에 욕심이 없다는 것은 네 왕도 아는 사실, 다만 그녀의 사촌 오빠는 그렇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무력을 숭배하는 북부에서 무력도 약한 놈이 정치에만 매달려 왕위를 얻으려는 쓰레기 같은 놈. 그녀의 사촌 오빠에 대한 평가였지만 국왕 승계는 가문에 달린 일이기에 다른 국왕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 참는 편이었다.

에삭스의 국왕 위는 남자 계승 원칙. 만약 여자가 계승하려면 어느 정도 위치의 남편을 얻어야 했으나, 누가 북부 최고 무력에게 장가를 온단 말인가. 오크의 머리통을 쥐어 터트리는 여자인데.

네 국왕이 수리아에 관한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다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해보자고, 오늘 모임을 요청한 두 분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귀찮은 걸 싫어하는 아서가 빠르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회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밥이니, 간식이니, 포도주니 달라고 할 텐데 다 그게 돈이었으니까 말이다. 예산을 책임지는 자신의 처지에서는 아주 짜증 나는 상황이니 재빨리 본론을 꺼내 든 것이었다.

그때 자신의 자리에서 얼굴에 실실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던 하툰의 왕 그리프 입을 열어 다른 네 명의 왕에게 외쳤다.

“너희들! 우리 한 100년간 예산 걱정은 끝이다!”

수리아 왕녀가 있어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말이다.

북부는 지속해서 대산맥과 대수림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과 끝없는 전투를 치르는 중이다. 중부와 남부 왕국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받고 있지만 예산은 항상 부족한 편이었는데 갑자기 하툰의 국왕 그리프가 저런 소리를 하니 다들 믿기 힘든 눈치였다.

그리프가 호쾌하게 껄껄껄 웃으며 가방 세 개를 원탁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이 보는 앞에 원탁 위로 가방을 한 개씩 쏟아내었다.

첫 번째 가방에서 쏟아진 물건은 정교하게 세공된 엘프들의 세공품이었다.

두 번째 가방에서는 엘프들의 물약이 우르르 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가방에서는 밝게 빛나는 백색의 백단목이 한 가방이나 떨어져 내렸다.

첫 번째 가방이 쏟아질 때 벌려졌던 네 왕의 입은 세 번째 가방에 이르렀을 때는 경악으로 바뀌었다. 나파로아 왕녀의 입에서는 침까지 흘러내릴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이! 이게 뭔! 대체! 어디서 이런 많은 백단목이!”

“어디 백단목 광산이라도 나온 거야?!”

“엘, 엘프님들의 물건에 손댄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난 모르는 일이네!?”

아서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아니 일 년에 한두 개 구할까 말까 한 물건이 이렇게 많이 나오면 의심을 해봐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사람이 가끔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는 하툰의 국왕 그리프라면 더더욱.

아서의 말에 놀란 국왕들이 다들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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