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09화 (109/352)

〈 109화 〉 107. 수리아 나파로아 1

* * *

북부 다섯 왕국 중 엘프들이 사는 대수림과 가장 인접한 거성인 하툰을 통치하는 왕인 삼지창의 대가 그리프 3세는 사냥을 나갔다가 헐레벌떡 성으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미친 듯이 말을 달리는 그의 옆에는 그의 호위 기사들과 전령이 새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같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모처럼의 사냥이었는데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니, 그분들이 왜 갑자기! 몇, 몇 분이나 오셨다고?”

“네 분 입니다.”

전령의 보고를 받은 것은 그라프 3세가 벼랑 아래로 몰린 거대한 북부 사슴의 목에 삼지창을 관통시키려 하고 있을 때였다. 좀처럼 사냥을 나와도 잡기 힘든 거대한 뿔을 가진 수컷인지라 머리는 박제해서 왕좌 뒤에 걸어두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령이 뛰어드는 통에 놓쳐 아쉬운 마음도 잠깐이었다.

“전하! 큰일이옵니다!”

저 멀리서 말을 달려오는 전령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대했을 때도, 뭐 좀 센 마물 몇 놈이 국경 근처에 나타났거나 며칠 전 보고받았던, 다크 우드 같은 2선 도시가 마물들의 습격이라도 받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전령에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만 아니면 말이다.

“성, 성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니 손님이 온 게 무슨 저렇게 호들갑을 떨 일이란 말인가. 뭐 또 할 일 없는 2선 쪽의 티볼트 5세나 방문했겠지.

“아니, 이 사람이 손님이 방문한 것이 무슨 이렇게 호들갑을 떨 일이란 말인가? 무슨 엘프 숲에서 수호자님이라도 오셨단 말인가? 하하하!”

그는 곧 전령의 말을 듣고 쓸데없는 말을 내뱉은 자기 입을 원망하고 말았다.

“어, 어떻게? 그것을?”

“뭣?!”

모처럼의 사냥이었다는 아쉬운 마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잘못하면 사냥을 하는 게 아니라 사냥당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대수림에서 그냥 엘프들도 아니고 수호자가 네 분이나 도착하셨다는 보고는 그 정도로 놀랄만한 일인 것이다. 얼마 전 높은 엘프분의 반려를 찾는다고 수호자가 열 명이나 근처 영지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다섯 왕국 국왕들이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던가.

그리프 3세는 말을 달리며 생각했다.

뭐가 심기가 불편하신 일이 있었나? 설마 이 쓰레기 모험가 새끼들이?

모험가 새끼들이 사고를 치면 대수림과 가장 인접한 자신들이 제일 먼저 피해를 보니, 그리프 3세는 모험가 이야기만 나오면 요즘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만약 또 모험가들이 사고를 친 것이라면 그리프 3세는 다섯 왕국 내 모든 모험가를 추방하자는 의견을 내리라 다짐하며 이를 악물며 성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프 3세의 지친 말이 간신히 성 앞에 도착하자 성내에서 행정관이 말을 타고 달려 나와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그래, 그, 그분들은 어떻게 내가 너무 늦어서 돌아가셨나?”

보통 엘프들은 용건이 있어도 잠깐 들렸다 사라지기에, 자신이 너무 늦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리프 3세가 행정관에게 물었다.

“그…. 저녁인데 이곳 인간들은 식사 준비도 해주지 않냐고 하셔서 그…. 식당으로….”

“뭣!?”

그리프 3세는 자신이 잠깐 무엇을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엘프들이 저녁까지 남아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식사를 요구했다고? 그것도 먼저?

대수림의 엘프들은 조심성이 많은 건지 말 몇 마디하고 사라지 일수인데? 그냥 일반 엘프들도 그러한데 수호자님들이 식사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그리프 3세는 행정관의 말을 빼앗아 타고 내성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식당으로 허겁지겁 달려 안에 들어서자. 여러 가지 요리를 맛있게 먹고 있는 네 명의 수호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이게 진짜라고?’

아리따운 네 명의 엘프가 자신이 매일 먹는 식당에서 고기를 뜯고 수프를 떠먹는 모습은 정말로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입을 욤욤 거리며 맛있게 음식을 먹는 네 명의 미녀라니.

‘이게 무슨….’

“당신이 이곳의 국왕인가요?”

귓가를 파고드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엘프어.

북부 대수림의 경계의 왕이라면 엘프어는 필수. 배운다고 고생은 했지만, 이 순간 그리프는 자신의 엘프어 스승이었던 윈터 폴 가의 여식 벨에게 감사했다. 그 꼬장꼬장한 꼬마 아가씨에게 얼마나 혼이 나면서 배웠던가.

그리프는 홀리듯 대답하고 자신의 대답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옛…? 옛 맞습니다!”

“할 이야기가 있긴 한데, 밥을 먹으면서 해도 될까요?”

“옛! 물론입니다. 부족한 건 없으신지요?”

엘프들이 인간의 예절을 알 리 없으니 식사하시던 누워서 말씀하시던 그건 당장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수호자분들이라면 숲을 벗어나지 않는 분들이 아니신가. 수백 살이나 되신 분들에게 예의를 따질 수도 없었고 괜히 심기를 건드릴 필요도 없었기에 그라프 3세는 최대한 네 분의 기분을 맞춰드리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괜히 시종 따위가 나서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뒷감당이 힘드니까 본인이 시종을 자처하기로 했다.

“양고기는 없는가? 양고기가 생각보다 맛있던데…”

“제. 제가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여기 양고기를 잘 구워서 내오거라!”

“아, 좀 달콤한 포도주도 부탁합니다.”

“물, 물론이죠. 포도주! 40년 된 아벨루스 포도주도 가지고 오너라!”

엘프들의 연이은 식사 주문이 끝나고 처음 말을 꺼냈던 엘프 수호자가 품에서 특이한 색의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왼손으로 종이를 펴들고 오른손으로 고기를 뜯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엘프 중 가장 높으신 높은 엘프의 정점. 높디높은 에스미가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엘프어로 적혀있으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엘프는 연신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뭐? 누가 뭘 보내? 편지?

그리프는 자신이 지금 들은 이야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얼굴 보기 힘든 수호자가 한 번도 들은 적도 본적도 없는 높은 엘프들 중 가장 높은 분의 편지를 가지고 왔단 말인가?

“인간의 국왕께 엘프들을 대표해서 인사드립니다.”

“북부 대수림 근처에 인간의 왕국이 생긴 지 오랜 시간. 인간들이 숲의 나무를 베어내거나 엘프들을 납치하는 등 그간 많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꿀꺽

모험가 새끼들, 정신 나간 나무꾼 새끼들이 그랬었지… 대수림의 귀한 나무를 벤다고… 엘프 노예를 팔아먹겠다고…

편지는 시작부터 그리프의 가슴을 고통스럽게 찍어누르고 있었다. 이제 화가 나신 엘프의 가장 높은 분이 직접 항의 서한을 보내셨구나, 북부 다섯 왕국의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 그리프 였지만, 그를 신경도 쓰지 않는 아름다운 목소리는, 연신 손가락에 묻은 고기의 기름을 빨며 계속 편지를 읽어 내려갈 뿐이었다.

“저희 엘프들이 북부의 인간왕국을 멀리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한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그간에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렇게 직접 감사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내드리게 되었습니다.

그간 노예 상인들이나 다른 나쁜 마음을 품은 인간을 막아내 주시느라 엘프들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인간왕국에 도움이 될 대산맥 주변의 몬스터들의 서식지를 표시한 지도.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작은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에스미가. 가장 드높은 엘프.”

편지의 내용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그리프의 빈 식탁 위로 엘프들이 가죽으로 만든 백을 몇 개 밀어냈다.

­촤르륵

‘이게 뭐지?’

편지의 내용에 정신이 없는 그라프의 앞으로 열린 세 개의 백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그의 앞으로 굴러왔다. 하나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각된 엘프들의 공예품이었고, 하나는 엘프들이 만드는 귀한 포션,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백색의…

“백색?!”

그리프는 수호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백단목!”

“인간들은 그걸 참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선물로 보내긴 하신다는데 에스미가님이 그런 걸 줘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 하셨어요.”

자기 앞으로 쏟아져나온 백단목 조각들에 정신이 팔려있는 그리프의 귓가에 수호자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잠깐, 한참 달그락거리며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던 엘프들이 식사가 끝났는지 서로 대화를 시작했다.

“음… 확실히 러셀의 요리만큼 맛있진 않군요.”

“인간 왕이 먹는 음식이 이렇게 별로라니. 기대했는데…”

“로리엘님의 말이 맞았습니다. 러셀의 음식은 특별한 것이라는…”

“이럴 줄 알았으면 저희도 파견을 신청할 걸 그랬어요.”

그리프는 분노했다.

요, 요리가 별로였다니. 요리사 이 새끼들! 오늘 온 손님들이 어떤 손님들인데! 주방으로 달려가 주방장을 엄히 문책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엘프들 앞에 놓은 접시를 보았는데, 음식에 대한 투정을 뱉어내는 엘프들의 접시는 씻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상태였다.

‘어?’

그로부터 삼 일 후 음식에 불만이 많은 네 명의 수호자님은, 맛은 별로지만 가끔은 먹으러 온다며 그리프의 어깨를 두드리며 길을 나섰다.

“또 온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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