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06. 세계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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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끝나고 사흘 후 로리엘이 이실리엘의 할머니 댁으로 찾아왔다.
그녀의 등과 양손에는 뭔가 짐이 상당히 많았다.
“로리엘, 그건 다 뭐야?”
로리엘이 가지고 온 엄청난 짐을 보고 말했다. 무슨 이사라도 하는 분위기였으니까 말이다.
“앞으로 남부에서 살 것이니 짐을 좀 가지고 왔다.”
“산다고? 파견 아니었어?”
“그 아무튼 기간이 기, 기니까 말이다.”
하긴 100년 파견인데 이 정도 짐은 필요하겠지. 그나저나 이렇게 짐이 많으면 이동하는 데도 불편할 것 같은데.
“근데, 이거 가지고 갈 수 있을까? 양이 너무 많아 보여서.”
“부피만 크고 무게는 그렇게 무겁지 않다.”
“어디.”
확실히 로리엘의 짐은 부피만 크고 무게는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았다. 뭐 좀 나누어 들어주면 되니까. 나도 신발이 생겼으니 이 정도는 나누어 들어줄 수 있었다.
“다른 엘프들은?”
“오늘이나 내일 도착할 것이다.”
로리엘은 손님방으로 안내되었고 우리와 같이 이실리엘의 할머니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한밤중 갈증을 느껴 눈을 떴다. 저녁에 할머님께서 주셨던 과일주를 생각 없이 너무 많이 받아마셨나 보다. 머리맡에 물을 찾았지만, 주전자가 비어있어 식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방에서 나와 거실을 지나치는데 거실 소파에 달빛을 받으며 로리엘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뭔가 하늘하늘 비치는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달빛에 반사되 고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로리엘?”
“아, 러셀 무슨 일이지?”
내 부름에 로리엘이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달빛 속에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목이 말라서 물 한 잔 마시려고, 로리엘은 잠이 안 와?”
“음…. 그렇다….”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야?”
“음…. 걱정이라…. 러셀? 궁금한 게 있다.”
이 친구는 정말 호기심과 질문이 많은 친구였다. 질문은 항상 XX YY 타령이지만 오늘은 왠지 분위기가 달랐다.
“뭔데?”
“그 혹시 갑자기 여자가 고백해오면 남자들은 싫어하는가?”
“갑자기? 예상 못한 고백 같은 느낌인가?”
“마…. 맞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맘에 드는 사람이, 로리엘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모르나 보구나?”
오! 로리엘 드디어 고백하는 것인가?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조금만 자극해줘도 몸이 달아오르게 되어있다니까.
“아, 아니다! 그, 그런 것이. 그래 치, 친구 이야기다!”
로리엘은 나에게 뻔한 거짓말을 시도했다. 뭐 부끄러울 수 있으니까 믿어주는 척할 수밖에.
“음…. 그 친구가 로리엘 만큼 예쁜가?”
“그, 그래. 나, 나만큼 예쁘다. 아니 그, 내가 예쁘다는 게 아니고”
역시나 예상된 반응. 마음속에서 음흉한 미소가 떠오르며 로리엘을 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이 정도에서 참아주기로 했다. 이러다 얘가 울 것 같아.
“로리엘처럼 예쁘다면 남자가 아무리 생각지 못했다고 해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거야. 예쁜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으니까.”
“그, 그런가?!”
“그럼 남자라면 당연한 거지. 그러니까 그 친구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로리엘도 내일 출발 할 수도 있으니 얼른 자둬.”
“알았다. 고맙다 러셀. 이실리엘님이 러셀을 왜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로리엘은 달빛 속에서 약간 붉어진 얼굴로 부리나케 방으로 사라졌다. 확실히 누굴 좋아하는 것 같은데 누구지? 남부로 가겠다고 하는 걸 보니 남부에 있는 남자인 것 같은데.
설마 진짜 벨릭인가? 아닌데… 대체 누구지?
‘그래, 뭐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겠지’
몰려오는 갈증에 궁금증은 뒤로하고 부엌에서 물을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서 방으로 가자 침대 위에 달콤하게 잠든 이실리엘이 보였다.
이불을 조심히 들추고 이실리엘의 가슴 사이로 기어들어 가자, 좋은 향과 포근한 느낌이 밀려들어 곧 잠이 쏟아졌다.
북부 다섯 왕국의 가장 뛰어난 기사들로 구성된 눈꽃 기사단의 수장 헤럴드가 화이트 힐에서 가장 가까운 다섯 국왕 중 헥토르가 통치하는 엘튼에 도착했을 때 성안에는 다소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행정관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병사들도 다소 웅성거리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한번 알아보게”
헤럴드가 기사 한 명을 보내 지나가던 행정관 한 명에게 연유를 물어보라 지시했다. 잠시 후 사색이 된 기사가 헤럴드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다크 우드가 삼주 전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크 우드가?”
다크 우드라면 화이트힐 바로 옆이 아닌가? 자신들이 화이트힐을 출발한 지 십오일이니까 그전에 공격받았다는 말이 된다.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전후 관계를 확인해야 했다.
헤럴드는 일단 내성으로 향하기로 했다.
“하! 하! 가자!”
아그라프의 속도를 올리자 뒤에 실린 소금에 절인 두 발로 걷는 늑대의 사체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북부의 다섯 왕국은 다소 특이한 형태의 국가를 이루고 있다.
대륙에 흩어져있던 용맹함과 정의감 넘치는 기사들이 모여들어, 북부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마물들을 밀어 올리고 세운 북부 다섯 왕국이기에, 중부왕국과의 국경만이 그들의 유일한 국경이고 북부 전선과 다섯 왕국 내부에는 따로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도와 도시의 형태도 다소 특이한데 북부 전선의 군사적 요충지에 세운 가장 큰 성 다섯 개가 그들의 다섯 수도이고. 그 수도 주변의 거점에 세워진 성과 요새들이 각각 그 주변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성과 요새들을 다스리는 것이, 오십의 남작, 삼십의 자작, 열다섯의 백작, 열 후작 그리고 다섯의 공작이며 그들의 정점에 다섯 왕이 있기에 국가라기보다는 일종의 군사 조직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북부의 이런 통치 구조는 대륙에 색다른 용어를 탄생시켰는데 ‘군사 연합 국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강력한 무력과 군사력을 가진 군사 연합 국가 그것이 북부 다섯 왕국의 진정한 얼굴이었다.
헤럴드가 엘튼의 국왕 헥토르를 만나러 회의실로 들어섰을 때는 국왕과 행정관 그리고 마법사들의 회의가 한창이었다.
“어서 오게 헤럴드경.”
“다섯 무력에 경의를.”
다섯 국왕은 북부에서 가장 뛰어난 무력을 가진자들 그렇기에 존중받는다. 헤럴드는 오랜만에 만난 엘튼의 국왕 헥토르에게 군례를 올렸다.
헤럴드가 국왕에게 군례를 올린 이유는 중부나 남부의 거추장스러운 귀족식 인사는 북부에서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고, 무력의 정점인 국왕에게는 군례를 올리는 것이 북부에서는 존경의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높은 엘프님과 러셀님의 안내는 잘 마치셨는가?”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헤럴드의 임무를 알고 있는 엘튼의 국왕 헥토르는 먼저 높은 엘프와 그의 반려에 내한 내용을 물어왔다. 한동안 시끄러운 문제였는데 이제는 해결 국면에 이르고 있었고, 무엇보다 믿음직한 헤럴드가 직접 움직이고 있으니 다소 안심이 된 상태였다.
“아 그리고 성내가 소란스럽던데 다크 우드가 공격받았다고요?”
헤럴드는 보고전 궁금함을 먼저 해소하기로 했다. 다크 우드라면 화이트 힐의 옆이기에 문제가 생겼다면 꼭 확인해야 했으니까.
거긴 대습지의 현자님의 처가가 아닌가…
“삼주 전 방어선 안쪽의 영지임에도 다크 우드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네. 영지에 주둔 중이던 기사 대부분이 사망하고, 병사 절반이 죽거나 부상. 영지민의 삼 분의 일이 사망한 개국 이래 최대의 피해네.”
엘튼의 왕 헥토르는 아주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의 타격이 심각했다. 자작 영지인 다크 우드에는 이십 명 정도의 기사가 있었을 텐데 전멸이라니.
“원인은 무엇입니까?”
“생존한 병사들과 영지민들의 보고로는 늑대와 코볼트 무리를 이끄는 걷는 늑대였다고 하네.”
“걷는 늑대 말입니까?”
“두 발로 걷는 늑대라니 믿어야 할지…”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눈꽃기사 둘이 가죽에 싼 무엇인가를 회의실 내부로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회의실 중앙에 내려 두었다.
“저건 무엇인가?”
“저것이 두 발로 걷는 늑대입니다.”
“뭐, 뭐라?”
눈꽃기사들이 가죽을 벗겨내자 안에 건장한 육체와 늑대의 머리를 가진 특이한 사체가 튀어나왔다.
“이 이것이!”
“오오, 이것은 처음 보는 종류의 마물입니다.”
회의를 위해 모여들었던 마법사나 행정관들이 그 신기한 모습을 몰려들어 확인하며 말했다. 특히나 마법사들은 처음 보는 마물에 눈을 빛내며 그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기를 갈망하는 모습이였다.
헥토르도 눈을 크게 떠 사체를 확인하며 말했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아니, 잡았단 말인가? 보고에 의하면 재생력이 트롤보다 대단해서 몇 번이나 목을 베어냈음에도 결코 죽이지 못했다고 했는데.”
“대습지의현자님께서 신기한 방법으로 잡아내셨습니다.”
“대습지의 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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