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105화 (105/352)

〈 105화 〉 103. 세계수 4

* * *

다음날 해가질 무렵 이실리엘과 엘프의 전통 혼례복이라는 나뭇잎으로 만든 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세계수.

이실리엘과 정식으로 부부가 되기 위해서 세계수를 향해서 가는 것이다.

옆을 바라보자 내 손을 잡고 따라오는 이실리엘의 모습.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지어주는 그녀의 얼굴.

긴 금발이 숲을 휘도는 바람에 찰랑이며 나부낀다.

숲은 거대한 예식장. 주례자는 세계수. 우리는 이끼 깔린 숲길을 버진로드 삼아 주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숲길과 마찬가지로 가공된 물품이나 장신구 같은 것은 지니면 안 되고 옷도 숲에서 난 것이어야만 했는데, 다행스럽게 이실리엘의 할머니께 혼례복을 손수 지어서 준비해두고 계셨다.

그런데 나뭇잎으로 만든 옷이라 그런지, 알몸에 나뭇잎 한 장 걸친 그런 느낌이랄까?

옷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와서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뭔가 좀 부끄럽네.”

“후훗, 엘프의 전통 옷을 입은 러셀은 귀엽네요.”

이 엘프는 거울도 안 보는 것인가? 나는 거울이 있으면 이실리엘에게 자기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숲을 수놓는 화려한 반딧불과 요정, 정령들이 내는 불빛을 이정표 삼아 새로운 세계의 아담과 이브가 된 우리 둘은 손을 잡고 세계수를 향해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세계수까지 가는 길은 평탄하고 나무 이끼가 깔린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땅이었다.

세계수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자 세계수의 굵은 뿌리들이 동산이나 언덕처럼 여기저기 솟아올라 있었고, 머리 위에서는 진하디진한 나무의 향기가 폭포에서 쏟아지는 포말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 사이를 지나 거대한 줄기 가까이에 다다르자 예전에 보았던 엘프의 신방에 은은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이실리엘이 그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녀는 모텔은 한번 가봤으니 두 번째는 쉬운 것처럼, 나를 끌고 신방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역시 뭐든지 처음만 어려운 것이니까.

우리가 신방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히고 신방이 서서히 떠오기 시작했다.

“우왓. 이거 떠오르는데?”

“가지에 앉을 거예요.”

우리를 태운 엘프의 신방은 조용히 떠올라 세계수의 가지 위에 열매 같은 모습으로 내려앉았다.

이실리엘이 나와 손을 잡고 바닥에 보이는 세계수의 가지에 손을 대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서 가지에 손을 대자 갑자기 어지러움이 몰려왔고 그렇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을 뜨니.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상한 공간에 도착해 있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여자가 그 공간 한가운데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식물? 사람? 드라이어드나 알라우네의 상위 호환처럼 생겼는데 아무래도 그거겠지?

녹색 피부, 꽃잎으로 된 치마, 나무뿌리로 된 것 같은 신발, 머리에는 빛나는 꽃장식, 긴 머리카락은 마치 풀잎처럼 보였다.

거대한 세계수 앞에 식물로만 이루어진 인외의 존재.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러셀? 반갑습니다.”

“어…. 세계수… 님?”

“네 맞습니다.”

“그…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물론 신들을 만나면 물어보고 따져야 할 것이 많았지만. 제일 별로 감정 없는 분이 등장하셨고 어떻게 보면 저분은 장모님 같은 존재니까 말이다.

“후훗… 장모님이라니 듣기 좋은 소리네요.”

또 머릿속이 읽히고 있었다. 제발…

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으로 절규하고 있을 때 그녀가 따듯한 목소리로 나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괜찮아요. 러셀, 편하게 궁금한 걸 물어보셔도.”

군 생활을 할 때 부대 방문한 사단장님이 애로사항 다 말하라고 했다고, 다 말하면 그거 눈치 없는 건데, 그렇지만 나는 이 세계 이등병이니까 하라면 할 것이다.

“그, 제가 어떻게 전생의 기억을 가졌는지, 여긴 어떤 세계인지, 왜 저는 아무런 능력도 못 쓰는지, 왜 갑자기 엘프들 같은 능력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한 게 너무도 많습니다.”

“와아… 정말 궁금한 게 많군요. 그럼 하나씩 알아볼까요?”

그녀가 조금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러셀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러셀의 영혼이 태어난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러셀의 세계에서는 환생이 없거든요.”

“넷? 그럼?”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생에 수많은 종교에서 말하던 환생이 사기라니.

“네, 러셀의 세계는 딱 한 번 인생을 살 수 있고, 사후에는 영혼이 잠들어요. 언젠가 있을 그 날을 위해서. 참고로 그날은 비밀입니다.”

“어… 그러니까…?”

“맞아요. 이곳에서 환생했기에 영혼에 녹아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러셀이 이곳에 환생한 이유는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데, 괜찮을까요? 앉아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그녀가 손끝을 살짝 움직이자 바닥에서 뿌리가 솟아올라 큰 테이블과 의자가 생겨났다. 그리고 러셀이 의자에 앉자 테이블 위에 꽃잎에 담긴 향 좋은 수액과 과일들이 생겨났다.

“그럼 계속 이야기해보죠. 앞에 있는 건 편하게 드셔도 됩니다.”

편하게? 황금으로 번들 거는 과일과 핏방울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붉은 열매, 꽃잎에 담긴 수액에서 흘러나오는 향은 그냥 봐도 일반적인 게 아닌데?

앞에 차려진 다과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신이 팔려있을 때 그녀의 이야기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러셀이 이곳에 환생한 이유는, 저희가 러셀을 선택해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넷? 하필이면 왜 저죠?”

대체 왜 나인지가 제일 궁금했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니까.

“러셀, 알아듣기 쉽게 지구의 상식으로 이야기해볼까요?”

“그래요. 한 종이 계속된 근친교배로 유전자풀이 단순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죠?”

“어 개체가 약해지고 유전질환이나 전염병 같은데 취약해지겠죠?”

그래, 고등교육을 하면 한 번쯤은 배우는 내용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네 맞습니다.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러면 단순해진 유전자풀을 건강하게 만들려면요?”

“어? 피 섞음?”

“네, 피 섞음을 할 때 그럼 제일 좋은 대상은 무엇일까요?”

“어…. 근친이 이루어지기 전. 원종과 최대한 가까운?”

“러셀은 전생에서 우등생이었겠군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는데, 조금은 찔렸다. 그… 저도 재수는 한번 했는데요…

“그런데 저희가 대화를 나누는 것과 그게 무슨 상관이죠?”

유전자랑 피 섞음이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 여기서 왜 태어났는지 말해주는 것 아니었나?

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답해주지 않고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영혼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영혼이 생겨나는 것은 육체적 번식과 비슷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가집니다. 생명의 싹이 튼 육체 안에는 부모 둘에게 받은 작은 영혼의 조각이 심어지죠. 작은 씨앗이던 그것은 어머니의 육체 안에서 발아해 자라면서 미성숙한 영혼으로 자라납니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미성숙한 영혼은 행복, 분노, 사랑, 미움, 시기, 질투 등의 감정 등을 양분으로 자라나 완전한 영혼이 됩니다.”

“감정은 영혼을 자라나게 하는 영양분 같은 것이거든요. 그러니 좋은 감정을 많이 먹이고 자란 영혼은 아름답고 강하게, 부정의 감정에 사로잡힌 영혼들은 악하거나 타락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저희가 대화를 나누는 것과 그게 무슨 상관이죠?”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데도 말을 계속 이어갈 뿐이었다.

“이 세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아주 아름답지만, 삶과 죽음이 가벼운 뭐 그런 곳 같습니다.”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이 세계는 정원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곳에는 많은 신들이 있지만 우리는 정원 지기 같은 존재일 뿐. 우주에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뿐이거든요.”

“그러니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는 심기어진 존재들. 저희는 그들을 관리하는 정원지기.”

“러셀이 있던 세계에서는 콩의 원산지가 어디였죠?”

“한반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네 그러면 이 넓은 우주의 수많은 차원에 사는 인간의 원산지는 어디일까요?”

“어? 서, 설마? 지구?”

“네 맞습니다. 위대한 분께서 지구에 인간을 만드셨고. 저희 정원지기들이 인간이라는 모종을 다른 차원에 심고 가꾸는 것입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에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그, 그렇지만 우주에는 수많은 행성과 은하계가 있고, 인간이 다른 곳에 아니면… 다른 생명체라든지….”

“러셀.”

“네?”

“동물원에 가본 적 있습니까?”

“예, 물론이죠.”

나는 전생에 동물원을 좋아했다. 항상 봄 소풍은 그곳이었으니까.

“혹시 동물원에 갇힌 짐승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아십니까?”

난 저것을 안다. 어릴 때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으니까.

한자리에서 머리를 흔들거나, 계속 배회하거나… 특정한 공간 안에 갇혀버린 생물들은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호소한다. 고등할수록 더 심하겠지?

“지구가 있는 세계는 오로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주조차도 말이죠. 자신들의 세계에 자신들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구의 인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러니까 우주가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가능성. 무한한 공간. 인간들이 결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며 끝없이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공간.”

맙소사 그녀의 말은 지금 결국 지구가 있는 차원 자체가 거대한 동물원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저희들의 세계는 그렇지 못합니다. 신이 직접 통제하며 한계가 명확한 곳이기에 이곳은 온실 같은 곳, 심어진 모종들에도 문제가 생기고 있지요.”

그녀가 문제를 언급했을 때 그녀의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어두웠다.

“문제라면?”

“심긴 모종들의 영혼이 너무 한곳에서 오래 번식한 나머지 몇 번 분화하면 더 이상 분화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엘프들이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는 엘프들의 번식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 종족 자체가 약하기도 했지만, 몇 번 분화하고 분화하지 못하는 영혼은 곧 말라죽기 때문이죠.”

“어? 그럼 제가 여기 온 것이?”

“네 영혼의 풀에 다양성을 주기 위해서.”

뭐야? 결국 씨수말 같은 걸로 뽑혀 온 거라고? 영웅 까지도 바라지 않았다. 용사도 말이다. 하지만 씨수말 이라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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