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101. 세계수 2
* * *
한참을 이동하던 엘프들이 멈추어 섰다.
이실리엘과 엘프들을 쫓아 다다른 곳은 세계수에서는 아직 한참 먼 곳이었는데, 이실리엘은 세계수 근처까지는 숲길로 갈 수 없어 이제는 숲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숲길은 여기까지예요. 더는 갈 수 없으니까 이곳에서 나가죠.”
그리고 그녀가 잠시 멈춰서 숲의 정령의 언어로 길을 부탁하자 곧 숲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숲길의 출구가 다시 나타났다.
숲길의 출구로 나와 맞이한 것은 대수림의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그리고 이실리엘과 로리엘의 기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긴 여행이긴 했지. 나를 찾아서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 왔으니까 말이다.
“돌아왔어요!”
“돌아왔습니다! 이실리엘님. 짧지만 즐거운 여행이었군요.”
그런데 나의 그런 생각을 깨버린 로리엘의 반응. 짧아? 엘프들의 시간개념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는 대화였다. 좀 길게 느끼려면 한 십 년 아니, 백 년은 여행해야 하려나?
둘이 기쁨에 젖는 걸 두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절벽 위였는데 저 멀리 세계수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아름다운 강과 초지, 꽃과 화초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하여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엘프들의 마을에 있을 때도 이렇게 가까이는 와보지 못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한쪽 수풀을 헤치고 새로운 엘프들이 나타났다. 여덟 명 정도 되는 무리였는데 숲을 경계하는 레인저들로 보였다. 엘프들이 사는 대수림을 경계하는 정찰병들인데. 아마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보고 확인하러 온 것 같았다.
새로 나타난 엘프들과 이실리엘, 로리엘을 포함한 엘프들이 인사를 나눴지만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닌지 그냥 평범해 보이는 인사였다.
잠시 후 우리는 그들을 따라서 모두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는데, 절벽을 돌아 나와 강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때쯤 맹렬한 허기가 찾아왔다.
아마 숲길의 부작용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강변에서 엘프들이 물고기를 잡아 와 몇 마리씩 구워 먹고서야 길을 다시 나설 수 있었다.
식사 후에 엘프들이 향하려는 곳이 세계수 쪽으로 보였기에 이실리엘에게 물었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해 이실리엘?”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실리엘에게 물었다.
“러셀, 먼저 보고하러 다녀와야겠어요.”
“보고?”
아 수호 궁수라는 게 군인 비슷한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복귀 신고 같은 것이려나? 하긴 다녀왔으면 상관에게 당연히 보고해야 하겠지?
“그래, 그럼 보고 해야지. 그럼 어디로?”
“세계수 쪽으로요.”
“할머니께는 그럼 그다음인가?”
“할머니도 세계수 근처에 계시니까 먼저 보고하고 가도록 해요.”
장조모님이라고 해야 하나? 이 세계는 호칭을 딱히 어렵게 나누진 않으니 그냥 할머님이라고 하면 되겠지? 다리도 치유해주셨다고 들었는데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려야 했다.
“이실리엘?”
“네, 러셀?”
“그 할머님 선물 같은 것 준비 안 해도 되나?”
그래, 그걸 생각 안 했다. 이쪽(?) 처가는 처음 가는데 빈손이라니. 내 양손이 부끄러워졌다. 리젤다에게 갈 때도 이실리엘이 챙겨주었는데….
“엘프들은 딱히 선물을 주고받지는 않으니까 괜찮아요. 러셀이 가장 큰 선물이죠.”
‘오오! 역시 나의 이실리엘….’ 그녀는 말하는 것도 아름다운 엘프였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해 저녁때가 될 때쯤. 세계수 근처에 한 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정령들이 날아다니며 마을에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내가 이실리엘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병들이 날 막아섰다.
하지만 로리엘이 나서서 뭐라고 말하자 다들 놀란 눈으로 이실리엘에게 뭔가 사과하는듯한 모습으로 물러났다.
“인간은 출입을 못 한다는 말이었다. 의장님이 계신 곳이니. 이실리엘님의 반려라니 사과하고 물러난 것이다. 그나저나 엘프어를 못하니 불편함이 좀 크군.”
로리엘이 뭔가 툴툴거리는 모습으로 말했다. 솔직히 이곳에 처음 올 때는 엘프들도 다 아는 북부어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북부어는 여관주인이 되기 위해 남부로 내려가면서 북부 상단에 끼어갔기에 어느 정도 말을 배울 수 있었고, 리젤다의 집으로 가기 전에 리젤다에게 장인 장모님 앞에서 실수하지 않으려 북부어까지는 어떻게든 배웠지만 엘프어는 너무 어려웠다.
“엘프어는 너무 어려운 것 같아.”
“엘프보다 더 엘프 같으면서 그런 소릴 하니 우습군.”
“응?”
“모든 엘프가 정령과 친하다지만 그 차이는 있다. 등에 멘 그 활도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많은 엘프 친구들이 그걸 쓸 수 있다면 놀라고 말 것이다. 그런데 말을 못 한다니.”
로리엘이 자조감 섞인 웃음을 흘렸다.
“로리엘은 수호 궁수가 되려고 했는데 활을 잘 못쏴서...”
이실리엘이 옆에서 로리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알려줬지만 로리엘은 부정하며 말했다.
“그, 아닙니다. 이실리엘님, 저는 단검을 더 잘 다루고 싶은 것이지 활을 못 쏘는 것이….”
로리엘의 부정에 이실리엘과 같이 여행했던 엘프 몇몇이 웃으며 이쪽을 바라봤다. 딱히 말을 자주 걸진 않지만 가끔 남부나 북부어 몇 마디 정도는 하는 것이 따라다니면서 말을 좀 익힌 것 같았는데, 아마 지금의 우리 대화를 알아들은 것 같은 눈치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 저 멀리 그 백단목이란 것으로 지어진 것 같은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건물이 특이하게도 전부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입구에 경비를 서고 있는 엘프들도 보이고 이실리엘처럼 세계수 꽃잎으로 만든 옷을 입은 엘프들도 몇몇 보였다.
이실리엘이 그들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말을 걸자 다들 활짝 웃으며 이실리엘에게 화답을 해주는 모습이 보였다. 동료쯤 되는 건가?
그리고 이실리엘이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키며, 꽂은 꽃을….
“근데 머리에 꽃은 또 언제 꽂은 거지?”
이실리엘의 머리에 꽃을 보고 무심코 혼잣말을 했는데, 로리엘이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이실리엘이 언제 꽃을 꽂았는지 알려주었다.
“아까 마을 들어서기 전 급하게 꺾어 꽂으셨다.”
“근데 엘프들은 풀 나무 잘 안 꺾는 거 아니었나?”
“혼인 때는 예외다.”
그래 지구의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의 엘프는 너무 미화되긴 했지. 거긴 과일만 먹는다잖아. 여기 엘프들이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삼계탕 두 마리를 씻은 듯이 비우던 로리엘이 떠올랐다.
근데 급하게 꺾었다니 뭘 또 자랑하시려고….
이실리엘이 반가운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한창 관찰하고 있는데 로리엘이 주뼛거리며 조용히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러, 러셀? 그,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다.”
“뭔데? 물어봐 안 아프게 살살.”
“뭣?”
“농담이야 뭔데?”
내 고급 농담을 이해 못하는 로리엘 이지만, 질문은 받아주기로 했다. 엘프들에게는 역시 어려운가?
“그 엘프들은 첫날밤을 치러야 부부가 되는데, XX로 YY 하면 역시 정식으로 YY 하기 전까지는 부부가 아니겠지?”
얜 좀 적당히 할 필요가 있는 녀석이었다. 왜 자꾸 XX에 집착하는 것이지?
그래 이젠 하도 들으니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까짓거 성교육 시킨다고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말해주지 뭐.
“XX로만 YY하면 부부라고 볼 수 없을 수도 있지. 정식 YY 해야만 부부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아기도 생기고 XX로만 하면 글쎄 연인이라고 봐야 하나?”
“뭣! 저 정말이냐? 여, 연인?”
로리엘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 수상쩍었다. 이거 뭔가 있는 것이다. 혹시나 마음에 둔 남자라도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 했다.
“그래, 아주 친밀한 연인들이나 하지 않을까? 왜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생겼어?”
“치, 친밀한… 그런 것인가… 마음…? 글쎄 잘 모르겠다.”
로리엘은 조금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잘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호오 이 차도녀 아니 차엘녀의 마음에 든 남자가 있다니 이럴 때는 적극 푸쉬를 해줘야 한다.
”긴가민가할 때는 고백해보는 게 제일이지“
”저, 정말인가?
“당연하지, 혼자 좋아하는 상황은 잘 안 일어나거든. 상대방이 뭔가를 했으니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거지. 그러니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지.”
“과연 그렇군…. 그런데 이, 이실리엘님이 허락하실지….”
“에이, 아무리 상관이래도. 이실리엘이 그런 그것까지 뭐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이실리엘은 당연히 로리엘이 좋다면, 허락. 아니, 축복해주지 않겠어?”
“과연…. 잘 알았다 러셀”
로리엘의 귀는 조금 붉어져 있었다. 얘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희귀한 장면인지라 신기하긴 했다.
그렇게 로리엘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고 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엘프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실리엘이 붉게 물든 볼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 봐도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래 이건 안 봐도 비디오였다.
‘저기 있는 게 제 남편이에요!’
‘네 옛?’
이런 거겠지?
그리고 잠시후 엘프들의 안내를 따라서 올라간 곳에서 우리는 압도적 아름다움의 의장님이라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