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96. 말괄량이 리젤다의 결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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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이 정리될 때쯤 헤럴드님이 내 쪽으로 말을 달려오셨다. 궁금한 게 많으리라, 나도 궁금한 게 많으니 말이다.
내 앞에 도착한 헤럴드 님의 모습은 피를 흠뻑 뒤집어쓸 만도 한데, 눈꽃기사의 수장이라 그런지 갑옷 여기저기 성에만 낀 모습이었다.
“러셀님, 대체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거죠? 그리고 저놈은?”
헤럴드님이 가리킨 쪽에는 마을 사람들이 끌고 들어오는 거대한 늑대가 보였다. 아직은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데 지금은 뭐라고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 영화에서 봤다고? 아니 전생에서는 국룰이라고 말해줄까?
“글쎄요. 저도 잘…”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일단 습격이야 오는 내내 일어나고 있었으니 불안함에 준비시킨 거라 둘러댈 수 있지만, 은 화살은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내가 대답할 내용을 머릿속에 굴려대고 있을 때, 이실리엘이 내 쪽으로 급하게 뛰어오며 외쳤다.
“러셀! 가야 해요.”
이실리엘은 먼저 지고 있는 태양을 가리켰다. 점심이 시작될 때 시작되었던 전투는 어느덧 해 질 녘까지 이어졌던 것이었다. 늑대들의 피로 붉게 물든 성 밖의 초지처럼 하늘이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다음 손가락은 내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기다리고 있을 리젤다에게 늦지 않게 가라는 것.
나는 이실리엘을 품에 안았다. 항상 그녀에게서는 숲 내음이 났다. 그리고 바람의 냄새도. 따듯하고 넓은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 가슴도.
“이실리엘 고마워.”
이실리엘을 안은 품속에서 뜨거움은 열기가 올라오고 이실리엘의 귀가 노을과 함께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품 안에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이실리엘이 말했다.
“그, 실리아가 아가를 빨리 가져야 한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저, 저도….”
고개를 들어 실리아를 바라보고 엄지를 척 올려주었다.
“뭔데? 그게 무슨 뜻인데?”
실리아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말했다.
나는 실리아를 바라보고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는데, 실리아가 신호를 눈치챘는지 머릿속으로 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무슨 말인데?’
‘너, 최고라고 걱정하지 말아. 노력해볼게’
미소 짓는 실리아를 뒤로하고 말에 올라 성으로 내달렸다. 전장의 피 냄새가 바람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고 언덕 위의 내성에서는 아직도 양고기 굽는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내성 위를 바라보자. 리젤다의 방으로 보이는 테라스에 붉은 꽃잎 한 장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전투에 승리하고 개선하는 나를 위해, 마치 깃발을 펄럭여 주듯이.
말을 달려 내성으로 들이치며 개선장군처럼 외쳤다.
“리젤다!”
내 목소리에 꽃잎이 테라스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말에서 내려 다리를 절룩이며 내성 입구로 걸어갔는데, 갑자기 내성 입구의 양개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며, 붉디붉은 꽃잎 하나가 남색 꽃술을 휘날리며 내 품으로 날아들었다.
“러셀!”
품에 날아든 내 새 신부와 키스를 나누었다. 피를 뿌린 결혼식이었지만 무사히 다 끝난 것이다.
승리한 자는 전리품을 취해야 하는 것.
장모님이 공들여서 해주신 포장을 이제 벗겨봐야 할 때였다.
그녀를 품에 안아 들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 시녀들이 조용히 방문을 닫아주었다.
탁
아침에 일어난 리젤다는 찌르는 통증에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분명 어젯밤에 조금 아프긴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이런 통증이라니.
인상이 찌푸려졌다. 고통이 심하진 않은데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이랄까?
“읏….”
먼저 일어나있던 러셀이 그런 리젤다의 모습을 보고 걱정의 말을 건네왔다. 그리고 포션 한 병을 건네주었다. 하긴 이 정도 통증은 하급 포션 한 병이면 충분하긴 하지.
“괜찮아? 좀 더 누워 있을래?”
리젤다는 러셀이 준 포션 병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기 하복부에 느껴지는 통증에 대해서 생각했다. 리젤다는 지금까지 용병 일을 하면서 전사들이 자신들의 흉터를 자랑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건 증거였다.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러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그의 것이 되었다는 증거 말이다.
리젤다는 잠시 생각한 후 포션은 조금 나중에 마시기로 했다. 남겨진 통증을 좀 더 느끼며 자신이 이제 완전히 러셀의 것이 되었다는 느낌에 더 빠져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러셀이 자기 엉덩이 밑으로 손을 집어넣는 것이 느껴졌다.
“또…. 또요?”
어젯밤에 그렇게 몇 번이나 러셀이 원하는 자세로도 해줬는데? 아직 부족하다고? 그래도 아내의 의무를 저버릴 순 없지 않나?
리젤다의 목덜미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포션을 마셔야 하나? 아니,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리젤다는 재빠르게 포션 병을 따 입에 물었다.
그때 엉덩이 밑으로 뭔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났는데, 러셀이 손에 든 건 흰 천 한 장이었다. 자신의 처녀 혈로 물든.
“어?”
그래 잊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 밖으로 저 천을 흔들어 처녀의 순결함을 알려야 한다고 했지? 리젤다는 당황해 포션이 목 너머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러셀의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꿀꺽꿀꺽
러셀이 테라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자신의 피로 물든 흰 천을 흔드는 것을 말이다.
밖에서 술과 고기로 밤새 술판을 벌인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와앗!”
“와아아!”
밖에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침대 옆에 벗어둔 붉은 드레스처럼 리젤다도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부끄러워 열기를 뿜으며 붉게 물든 귓가에 러셀의 목소리가 찬물처럼 쏟아졌다.
“또 하고 싶어?”
아까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들은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맞는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그러면 새신부가 너무 색을 밝힌다고 생각하려나? 안된다고? 그러면 아내의 의무가….
리젤다가 무슨 대답이 정답일까 고민하는 중이었지만 러셀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흣...”
리젤다는 결국 아침도 먹지 못하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두 개의 빈 포션 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점심이 다 지나고 방에서 나온 우리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시는 장인 장모님, 이실리엘과 함께 때늦은 점심을 먹었다. 어제부터 구운 양이 식탁에 올라왔는데 이실리엘은 웃으면서 양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어서어서 많이 늘어나야 해~”
가끔 엘프들의 감성은 이해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뭐 예쁘면 용서가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실리엘을 위해 남부에 가서도 양 몇 마리는 키워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먹는걸, 좋아하는지. 키우는걸, 좋아하는지.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말이다.
그 후에는 밖에 열린 잔치에 얼굴을 보이고 술도 몇 잔 하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렸다.
어제 전투 지휘에 다들 감동했다는 말을 전해왔는데 헤럴드님도 북부에서 산다면 장군직을 수여하는 것도 아깝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리고 한쪽에서 술 취한 에릭에게 붙잡혀 투정을 들어야 하기도 했다.
“아니, 나만 첫 전투에서 빠지게 알려주지도 않는다니, 갑옷 입고 오니 재미있는 건 다 지나고. 잔당처리뿐이었네!”
“형님은 늦게 오신 게 더 다행이었어요. 분명 성문 열고 무작정 돌격하자고 하셨을 거면서.”
그 후 일어난 에반, 에릭 형제의 말싸움을 피해 고기 접시를 들고 장소를 피해야 했다.
둘의 말싸움을 피해 이실리엘과 자리를 옮기고 있는데, 점심을 먹고 어디론가로 또 사라졌던 리젤다가 머리에 붉은 석류 같은 꽃을 꽂고 내성 문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보니 아마도 그동안 말은 못 했지만 이실리엘이 부러웠던 것 같았다.
“이실리엘님, 여기요.”
리젤다는 이실리엘에게도 자신과 같은 꽃을 머리에 꽂아주었다. 둘 다 똑같은 붉은색의 보석 같은 알갱이로 된 꽃을 꽂고 있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저 꽃의 의미가 나 임자 있어요. 그게 러셀이에요 라는 뜻이라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올랐다.
둘을 양쪽 품에 하나씩 끼니 세상이 아름답고 다 내 것 인양, 기분이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양쪽에 신부들의 머릿속에 코를 파묻고 번갈아 가며 냄새를 맡고 있는데 콧속으로 후리지아 비슷한 향이 흘러들었다.
맡아본 적 있는 향인데 근데 저건 후리지아가 아니고….
‘어? 붉은 석류 열매 같은 모습에 후리지아 꽃향기?’
이거 그건데? 이게 여기도 있다고? 확인을 해봐야 했다.
“리젤다 이 꽃 어디서 난 거야?”
“이거요? 근처 숲에 많이 피어있는데요?”
“거기 좀 가볼 수 있을까?”
세상에 많이?
이실리엘, 리젤다를 데리고 남문을 통해 나가 근처 숲에 도착하니, 리젤다의 말 그대로 붉은 꽃같은 열매들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꽃을 뿌리까지 뽑아 들어 그 모습을 보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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