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94. 말광량이 리젤다의 결혼 6
* * *
먼저 실리아를 불렀다.
“실리아! 성 밖에만 비를 뿌려줄 수 있어?”
“비? 비구름이 없어서 비는 안 되는데…. 어, 어디 보자?”
실리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저 멀리 호수를 보고 소리쳤다.
“물만 뿌리면 되는 거지? 얼마나?”
“저놈들이 흠뻑 젖고, 땅도 흠뻑 젖을 만큼?”
내가 손가락으로 성벽 밖의 늑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놈들은 성벽 위로 펄쩍펄쩍 뛰어오르거나 코볼트들은 성문에 돌 같은 것을 던져대며 쿵쿵 부딪혀오고 있었다. 숫자가 많아 성문이 울컥울컥 움직이는 게 숫자를 줄이지 않으면 압력에 성문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그건 어렵지 않지!”
실리아는 대답하자마자 그야말로 번개같이 호수 쪽으로 사라지더니, 호수 위에서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 물을 빨아올리고 있었다. 실리아가 만든 용오름이 호수의 물을 재빠르게 빨아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성벽 아래 활을 쏘다 말고 다들 멈춰서, 그 광경을 경외하는 눈빛을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물을 빨아올린 그 작은 용오름이 북쪽 성문 앞까지 빠르게 다가오더니 공중에서 소리를 내며 한순간에 흩어져 버렸다.
촥
쏴아아아아
마치 성벽 밖으로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실리아는 상급 정령답게 바람을 완벽하게 움직여 빗방울이 성벽 안쪽으로 날아들지 못하게 하면서, 호수에서 퍼 올렸던 물을 북문 밖에 일정하게 흩뿌렸다.
“이실리엘 벼락! 중앙으로!”
내 신호에 이실리엘이 실리아에게 벼락을 쏘아내라고 지시했다.
실리아가 하늘로 손을 들어 올리자 높은 하늘에 떠 있던 작은 먹구름에서 신리아의 손으로 굵직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성벽에 있는 사람들은 시야가 밝아지며 순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으악 내 눈!”
“눈이!”
다음부터는 사람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실리아가 손에든 번쩍이는 벼락의 창을 늑대들이 모여있는 곳 정중앙에 던져 내리꽂았다.
꽈르릉
벼락이 물에 젖은 지면을 달려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수백 마리의 코볼트와 늑대들이 마치 꽃처럼 피어나며 떨어진 번개를 중심으로 몸을 떨며 대지에 구르거나 침묵했다. 벼락의 가운데 있던 늑대들은 새카만 숯덩이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개 타는 냄새가 대지에 진동하며 피어올랐다.
꺼헝!
“뭐야 이거! 엄청나잖아?”
자신의 벼락 한방에 반절에 가까운 늑대들이 대지를 구르자 실리아가 신이 나서 외쳤다.
“롱 윈드의 남편인 인간 수컷은 재주가 많구나?”
“인간 수컷 점점 더 맘에 들잖아? 아가 롱 윈드가 아니더라도 이실리엘과 너의 새끼라면 내가 책임지고 돌봐주겠어!”
저 말을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애들 넘어져서 정강이에서 피 나고 그러면 실리아가 뛰어나와 막 다 땅을 갈아버리려나?
내가 실리아의 말에 당황하고 있을 때 아름다운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러셀 저기요!”
이실리엘이 다급히 외치며 손가락질하는 곳을 바라보니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두 발로 벌떡 일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번개의 충격에 정신을 차리려는 것 같았다.
“로리엘!”
내가 로리엘을 부르자 이미 로리엘은 당연히 자신의 차례라는 듯, 손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기의 거대한 불화살을 꺼내 들고 놈의 머리통을 겨누고 있었다. 항문은 안된다 로리엘아 정상적으로 쏘자 정상적으로!
화그르르륵
내 마음의 기도를 알아들었는지 로리엘이 쏜 불화살은 이글이글 타오르며 성벽에서 내리꽂혔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드는 놈의 머리통에 정확히 꽂혀 들어갔다. 그러자 놈의 머리통이 마치 마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지우개로 지운 듯이.
“우와와앗!”
“잡았다!”
성벽 위의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로리엘도 모처럼 얼굴에 웃음을 띠고 신이 난 표정이었다. 양 두 마리 잃고 이실리엘에게 혼나 시무룩해진 얼굴을 본 것이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번 사건으로 금방 기운을 차린 모습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늑대나 코볼트들이 아직도 똑같이 성벽으로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이런 제기랄!”
“로리엘! 끝까지 봐!”
내 외침이 다시 들리자 로리엘이 다시 자신의 목표였던 머리 잃은 늑대를 바라보았는데, 놈은 머리가 없어진 채로 우두커니 서서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다 갑자기 머리통이 사라진 절단면에서 마치 새로운 머리가 두더지가 땅속에서 솟아오르듯 쑥 하고 올라왔다.
로리엘이 비롯한 수호자들이 다급하게 각자 전문 분야의 정령의 힘이 담긴 화살을 놈에게 날려댔지만, 놈은 바로바로 신체를 수복시키며 성문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거 아무리 봐도 딱 그건데?
“이실리엘!”
내가 다시 이실리엘을 부르자 이실리엘이 공중에서 내려와 내 옆에 내려섰다. 마치 요정이 하늘을 날아 하강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실리엘 혹시 늑대인간이나 라이칸스로프라는거 들어봤어?”
“어? 그게 뭔가요?”
이실리엘은 눈을 깜빡이며 완전히 처음 들어봤다는 듯이 물었다. 대수림에서 온 건 아닌가? 그럼 엘프들은 저건 처음 봤다는 건데….
“헤럴드님! 밖에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거대한 놈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두 발 말입니까?”
헤럴드님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걸어 다니는 늑대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 그런데 저거 어떻게 잡지?
“헤럴드님 혹시 맞상대 하시더라도 절대 상처를 입으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몰라 노파심에 헤럴드님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근데 오늘 보름달 뜬 밤도 아닌데? 내가 아는 그게 맞나?
“사제! 사제는?! 없나?”
분명 내성 옆의 언덕 한편에서 신전을 봤던 내가 사제를 찾자, 성벽 아래서 사람들에 밀려 떨어진 마을 주민 한 명을 돌보고 있던, 사제 셋 중 하나가 위쪽으로 달려 올라오며 대답했다.
“여기 눈과 얼음을 관장하는 북풍의 여신을 섬기는 사제 롤랜이 있습니다.”
“화살에 축복이 필요합니다!”
롤랜이 화살 세 발을 받아들고 기도를 시작했다. 사제의 두 손에 들린 화살에 성스러운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신들한테 이런 건 빌리기 싫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여신이라서 그래도 욕 안 하고 참았다.
“북부의 겨울과 추위를 관장하는 북풍의 여신이여 당신의 아들이 기도…….”
그때 갑자기 늑대 무리에서 덩치가 큰 늑대 세 마리가 성벽을 수직으로 내달려 성벽 위로 올라왔다.
“으아악!”
그중 한 마리는 이실리엘이 재빠르게 등에 멘 활을 꺼내 쏘아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놈은 다시 성벽 아래로 처박혔는데, 남은 두 놈은 성벽 위에서 경비병 하나를 발아래 두고 있었고, 하나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어 사람 둘이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다행스럽게 마을 사람 둘은 안쪽으로 굴러떨어져 늑대들이 밥이 되진 않았지만 둘은 그 충격에 성벽 아래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마을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늑대들을 유인했다. 엘프들은 재빠르게 사람들을 밀어내고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칼날이 박히지 않는 몸인지 서로 치명타를 주지 못하고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성벽 위의 소란에 에반이 말에서 내려 철퇴를 들고 성벽 위로 뛰어 올라왔다.
그리고는 뒤의 헤럴드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서약과 맹약을!”
헤럴드님이 그 소리에 호응하듯 소리쳤다.
“허가한다!”
에반이 성벽 위로 뛰어 올라와 나를 지나치는데 에반에게서 맹렬한 한기가 느껴졌다. 어? 이건?
그래, 이상하긴 했다. 분명 일반 기사들보다 뛰어난 눈꽃기사라고 했는데도 늪지에 있을 때 아무런 이능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말이다. 좀 전에 맹약과 서약이라는 에반의 말을 유추해볼 때. 눈꽃기사들은 힘을 빌려주는 존재에게 서약과 맹약을 한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은 등급 용병 이상 또는 금 등급 이상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신이나 정령 또는 그 정도 격의 존재에게 이능을 빌려 쓸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내려주는 힘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힘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맹약과 서약이다.
예를 들어 내가 불의 신에게 불꽃으로 적을 태울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치고 그 능력이 고블린 정도 태울 수 있다고 가정할 때 나는 이 불꽃을 고블린을 태우는 데만 쓰겠다고 신에게 맹약 또는 서약하면 고블린과 싸울 때 한정해서는 그들의 재앙이나 악몽이 될 수 있다.
물론 서약과 맹약의 조건이 지독할수록 힘은 더욱더 증가한다.
아마 눈꽃기사들의 조건은 북부 한정이나 자신들의 영토 한정이겠지? 그리고 허가권자도 있어야 하는 것 같고.
성벽에 오른 두 마리 늑대 중 한 마리는 엘프들과 성벽 위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병사들이 창으로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때 창에 몰려 성벽 외곽으로 밀려나던 놈의 앞에 에반이 달려들자마자 놈의 다리가 얼어붙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몸이 젖은 놈은 더욱 빠르게 몸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었는데, 놈이 이상함을 느끼고 뒤로 물러섰지만, 얼마 못 물러나 놈은 성벽 위에서 그대로 발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커겅 커겅
늑대가 겁에 질려 당황스러운 눈동자로 울부짖었지만, 놈은 곧 혓바닥까지 얼어붙었다.
그리고 에반의 철퇴가 놈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쨍그렁
유리가 깨지듯 맑은소리가 나더니 놈이 철퇴에 깨져 바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북부 눈꽃기사들이 철퇴 성애자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