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92. 말괄량이 리젤다의 결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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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성에는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다. 내성 앞마당에서 시작된 양고기 굽는 냄새와 연기는 새벽부터 안개처럼 깔려 언덕 아래로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반의 호기로웠던 외침처럼 오십 마리나 되는 양이 새벽부터 도축되어 불에 올려진 결과였다.
영지민들에게 대접할 양이 요리되어 좋은 향을 사방으로 뿌려대고, 내성 밖에서는 그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리젤다의 결혼식이 기대된다며 나누는 말들이 성벽 너머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다들 결혼 준비로 바쁜 것 같지만 나는 뭐 그냥 목욕이나 하고, 수염 깎고 옷이나 깨끗한 걸로 갈아입었다.
어떤 옷을 입고 결혼식을 하고 싶냐는 장모님의 물음에, 나는 주저 없이 갑옷을 이야기했다.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결혼하기도 하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다만 리젤다는 긴 드레스를 입어 달라고 부탁했다. 입혀보고 싶었거든.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대충 결혼식에 대한 내용을 헤럴드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북부 귀족의 결혼식은 증인 셋이 주관한다고 했다. 나는 아는 귀족이 없으니, 결혼식의 증인이 될 귀족 셋은 헤럴드님과 장인 장모님이 맡아 주시기로 했다. 혹시나 신전의 사제가 주관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건 아니라고 해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뭐 결혼식도 귀족 셋이 ‘우리가 증인으로 둘의 결혼을 보증한다.’ 이러고 환호 한번 하고 끝이라고 했으니 별건 없었다. 다만 먹고 마시는 연회가 밤새 이어진다고 했고 아침에 신방의 창 너머로 처녀의 혈이 묻은 흰 천을 흔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거 전생에 어느 나라에서도 비슷한 전통이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리젤다도 북부의 전통이라는 그걸 잊고 있다가, 그 사실을 장모님께 듣고는 부끄러움에 떨었다. 공개 처녀 인증이라니 아니 반대인가 이젠 처녀가 아닌….
정오를 알리는 세계의 태양이 머리 위에 걸리기 직전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내성 광장에는 피처럼 붉은 드레스와 흰 꽃으로 된 화관을 쓴 리젤다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가슴과 등이 엄청나게 파진 드레스였는데, 오우야….
장모님이 어떤 드레스를 입힐까. 나의 의향을 물어보기에 최대한 매력적이라고 대답했는데, 웃으며 나가시더니 사위에게 이런 선물을 하셨다니. 역시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잘 포장(?)된 장모님의 선물은 이따 밤에 뜯어봐야겠다. 아주 꼼꼼하게 말이다.
광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멀리 있는 리젤다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붉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리젤다의 뇌쇄적 아름다움에 자연스럽게 침이 삼켜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꿀꺽
모여든 사람들을 지나 광장 중앙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나쳐 광장 중앙으로 향하는 나에게 다들 축하의 말을 던져주었다.
“아가씨를 잘 부탁합니다.”
“축하드려요~”
“아가씨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나는 광장 중앙의 바깥쪽에 도착해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후우
그리고 최대한 절름거리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는데, 내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게 보이자 리젤다의 귀가 점점 붉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볼도 약간은 상기된 모습이었는데, 그런데도 얼굴에는 밀려오는 노을 같은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천천히 결혼식의 세 증인 앞에 섰다. 그리고 리젤다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이실리엘과의 첫날밤 때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장가는 처음이니….
결혼식의 세 증인 중 헤럴드님이 내가 리젤다의 옆에서 서자 결혼식을 진행 하셨다.
“나 북부 눈꽃 기사단의 단장 헤럴드 블랙 포레스트와 두 명의 증인이 함께. 리젤다 화이트힐과 러셀 그레이트 스웜프의 결혼을 보증한다!”
네? 그레이트 뭐요? 내 성이 왜 갑자기 대 늪지가 되었지?
내가 이게 무슨 영문이냐는 표정으로 헤럴드님을 바라보자 그는 그냥 씩 웃어버릴 뿐이었다. 영감님 뭘 하시려면 좀 알려주세요. 그냥 리젤다만 성 붙이면 내가 없어 보이니까 챙겨주신 건가?
아니, 그리고 좀 멋있게 막 그런 거 있잖아. 펜타곤 아니 팬드래건이었나? 이지스 막 이런 멋진 거 말이야 대 늪지가 뭐냐고. 뭔가 질척거리고 곰팡이 날 것 같은 성이었다.
내가 갑자기 생겨난 성에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아우우우우우~
부웅~ 부웅부웅~
뎅뎅뎅뎅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북부의 양각 나팔 소리와 경계 탑의 종소리가 마을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장인어른 장모님과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당황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나는 헤럴드님에게 멈춰진 결혼식을 진행하라 이야기했다.
“끝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옆에 리젤다도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는데, 나는 리젤다의 허리춤에 손을 감고 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괜찮아. 우린 ‘오늘’ ‘지금’ 결혼해. 나를 믿어.”
리젤다가 내 단호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북부의 위대한 전통에 따라 이 둘을 부부로 인정한다! 축배를 들자!”
헤럴드님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나는 내성이 쩌렁쩌렁 울릴 듯이 소리쳤다. 왼손을 리젤다의 허리에 감고, 내 또 다른 엘프 아내의 이름을 말이다.
“이실리엘~!”
이실리엘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내성 벽을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그런데 나에게 대답해야 할 이실리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신기하게 내성 광장 공중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이 다들 머리 위를 바라보고 공중을 날고 있는 이실리엘을 확인하더니 놀라 입을 활짝 벌렸다.
성의 공중에 떠 있던 이실리엘이 활짝 웃으며 내게 대답했다.
“네, 러셀! 이거였군요! 신기해요!”
그리고 이실리엘의 옆에서 폭풍의 진 실리아가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해왔다.
“러셀 아기 롱윈드를 위해서 조금 더 힘써줬으면 좋겠어! 우리 정령들은 지금 노력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이야!”
예... 그 노력(?)해야죠….
우르르릉
실리아가 나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노의 우렛소리를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이실리엘 근데 이거 약속이랑 다른데?
밖에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일 때 러셀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아 물론 엘프들도 말이다. 그리고 모여든 헤럴드님, 이실리엘과 에반, 눈꽃기사 일곱, 엘프 수호자 열 명을 모아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잘 들어주세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죠. 러셀?”
이실리엘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밖에는 한창 결혼식이 준비 중인데 갑자기 자신의 반려가 무엇을 부탁한다며 병력을 불러 모았기 때문이었다.
“다들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결혼식 참석할 때 무장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무장이요?”
“네”
역시나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러셀을 바라보았다. 웬 결혼식에 무장? 이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좀 걱정되는 게 있어서요.”
그때 모인 인원 중에 러셀이 제일 기대하지 않았던 헤럴드가 앞에 나서서 말했다.
“러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다들 완전 무장하고 결혼식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없게 준비들 하게 알겠나?”
북부 기사들은 헤럴드의 명령에 가슴을 두드리며 무장을 위해 자신들의 방으로 사라졌다.
“러셀이 그렇다면 이유가 있겠죠? 로리엘 결혼식 중에 내성 성벽에서 사방을 경계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중앙에서 러셀과 신부를 보호합니다.”
“옛 이실리엘님!”
로리엘과 수호자들도 의심 없이 무장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러셀은 이실리엘이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리라 생각했지만 헤럴드님은 좀 의외라 생각했다. 그런데 영감님 왜 이렇게 나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요즘 눈빛이 부담스러워지긴 했는데 뭐 별일 있겠어. 러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러셀은 자신이 벌인 이 기괴한 일에 대해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도 그렇고 정상적인 여행은 아니었기에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다.
솔직히 인간이라는 게 몇 번 당하면 준비라는 걸 해야 한다. 머리가 있으면 말이다. 그간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았는데 항상 러셀의 삶의 큰 사건마다 따라오듯 일어났던 일이었다. 뭐 아닌 적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느낌.
특히나 신 이 새끼들이 나의 축제 현장을 망치기 위해서, 또 뭔가 저지를 것 같은 개 같은 느낌이 자꾸 들기 때문이었다.
피에 물든 신부 이런 거 타이틀로 좋잖아?
리젤다나 이실리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 있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런데 어차피 이실리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람의 정령들이 가만 있진 않을 테니, 일단 오늘은 리젤다를 챙긴다는 목표를 세우기로 했다.
한번 속으면 피해자.
두 번 속으면 바보.
세 번 속으면 공범이라고 했던가?
그래 내가 세 번을 속을 수는 없지. 이번엔 비웃어 주리라!
“이실리엘?”
“네 러셀?”
“혹시라도 어떤 사건이 터지면 실리아 말고 다른 상급 정령이라도 불러서 싹 쓸어버려도 돼.”
예?
내 말에 이실리엘도 로리엘도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그냥 생각하지 말고 다 쓸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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