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88. 북부 7
* * *
메에~
메에 에에~
딸랑딸랑
“워워 이 녀석들 이리로 가거라!”
컹컹!
양치기들의 양을 모는 소리와 목양견들이 짓는 소리가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모두 이실리엘의 리젤다를 위한 선물 덕분이다.
우린 이실리엘의 부탁(?) 덕분에 영주의 성에서 이틀을 더 묵어야 했다. 양을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영주가 영지 전역에 사람을 보내 양들을 모았고 다행스럽게 이틀 만에 양 천 마리를 모을 수 있어서, 삼 일 후에는 리젤다의 집으로 떠날 수 있었다.
대부분 가정에서 양을 키우니 비교적 쉽게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양을 모은 후 목동들과 약간의 호위 병력을 추가해서 이동하기로 했는데, 물론 우리를 호위하는 게 아니라 양을 호위하는 병력이었다.
발레리가 백단목 대금으로 주었던 보석 중, 남아있던 한 알을 영주에게 양의 비용으로 지급하려고 했다. 당연히 영주가 펄쩍 뛰면서 거절했지만, 영주가 거절하자 이실리엘이 다시금 자신의 백지수표 백단목을 꺼내려고 했고 결국은 나와 헤럴드님까지 나서서 이실리엘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실리엘의 단호한 모습에 영주가 어쩔 수 없이 보석을 받자 도움을 주어서 고맙다며, 이실리엘은 나중에 보답하겠다는 엘프의 보은 멘트까지 날렸다.
아직 이실리엘에게는 돈을 주고 물건을 구매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돈은 그냥 주는 거고, 고마움은 고마움. 별도랄까?
양 천 마리와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영주가 센스 있게 목동들까지 고용해주어 그나마 조금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는데, 그냥 우리끼리 끌고 갔으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겠다고 생각했다.
메에~
메에 에에~
리젤다는 양들을 보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시 괜찮아 졌다를 계속 반복하는 중이었다. 엄청 부끄러운 것 같았다. 하긴 자기 결혼 선물을 자기가 끌고 가고 있으니 말이다.
“러, 러셀?”
“왜 리젤다?”
“어…. 그…. 그, 양이….”
영주 성에서 모여드는 양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저 상태다. 이실리엘의 백치미는 전염성이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이 너무 웃겨서 나는 혼자 속으로 계속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여정은 천천히 리젤다의 고향으로 향했다. 양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메에 에에~
하지만 양을 끌고 구릉을 굽이굽이 이동하던 우리의 여정은 사흘째에 접어들어 한 분의 심기 불편한 엘프로 인하여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실리엘이 매우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늑대! 숲의 약탈자! 리젤다의 집으로 가는 여정 중 가끔 나타나 행렬을 습격했던 놈들. 지금 그 늑대들 때문에 이실리엘은 내가 잡혀간 이후 가장 큰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맹렬하게 분노한 이실리엘이 상급 정령을 불러내려다 나와 로리엘에게 제지당한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실리엘의 분노에, 앞에 부복한 로리엘을 비롯한 열 명의 수호자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수를….”
로리엘이 아주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 같은 수호자가 실수하다니, 로리엘은 망연자실한 느낌이었다. 고작 그것을 지키지 못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벌써! 두 마리 째란 말입니다!”
그렇다. 이렇게 이실리엘이 화가 난 이유는 천 마리 양 중에 두 마리가 어제, 오늘 습격으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첫 양을 잃고는 망연한 표정이었는데, 두 번째 양에서는 아주 분노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엘프 수호자가 10명이나 있는데 그걸 뚫고 양 떼에 접근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한쪽이 습격받을 때 도망치던 양들이 무리를 이탈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리젤다의 결혼 선물이 벌써 두 마리나 사라졌단 말입니다. 더 이상 실수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실리엘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였다.
그녀의 매서운 분노를 접한 수호자들이 그때부터 양 떼 근처로 접근하는 맹수들을 인정사정없이 사냥하기 시작했다.
케겍
멀리서 다가오던 늑대가 머리통에 구멍이나 엎어졌다. 이실리엘의 분노를 잠재우려는 엘프들은 매 같은 눈으로 온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말 안 듣는 양을 발로 찼던 용병도 엘프들의 매서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다행스럽게 불같이 타오르던 이실리엘의 분노는 이틀이 지나서 멈출 수 있었다.
왜냐하면 양이 복사되었거든.
양 떼 안에 임신한 양 두 마리가 새끼를 낳아 다시 천 마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 너무 귀여워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매섭게 분노하더니, 이실리엘은 아그라프 위에서 새끼 양 두 마리를 품에 안고 기쁨에 차 있었다.
천 마리라는 숫자는 그녀에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던 것 같다.
로리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엘프들에게 천이라는 숫자는 제일 높은 숫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만 마리를 말 할 때는 천 마리가 열 무리 있다고 표현한다나?
그러니 뭔가 꽉 찬 최고의 선물을 하고 싶었던 이실리엘에게 한두 마리가 사라진 것은 분노할만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실리엘님이 화가 나실 만했다”
자책하는 로리엘을 위로해 주었다. 근데 너 무슨 잘못을 한 거니?
화이트 힐 영지는 그야말로 언덕에 위치한 영지이다. 봄이 되면 이 언덕에 수없이 많은 흰 꽃이 피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화이트 힐이라고 부른다.
며칠 전 영지로 먼저 돌아온 에반은 매일 이렇게 경계 탑에 올라 러셀의 일행이 올만 한 방향을 살펴보는 중이었다. 품에 넣었던 육포를 뜯으며 점심의 허기를 달래던 에반의 눈에 저 멀리 사람의 행렬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 멀리 지평선에 있는 구릉에서 두 마리의 아그라프가 터벅터벅 걸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온다! 그분들이 오신다!”
에반이 크게 소리치며 경계탑의 종을 치자 집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에반이 있는 방향의 성문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오신데요!”
“신랑감을 모시고 오신다는구먼!”
“우리 아가씨가 벌써 신랑감을 모시고 오신다니!”
“엘프님도 오신다고 했어요!”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신이 나서 외쳤다. 활기찬 말괄량이였던 리젤다는 영지민들에게 사랑받는 아가씨였던 것이다.
러셀을 행렬을 계속 살펴보던 에반의 눈에 뭔가 이상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러셀의 행렬 뒤로 뭔가 하얀 것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무척이나 큰 무리가 되어 성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설마?”
자신이 출발 전에 엘프님이 양 천 마리를 사겠다고 했는데 설마 진짜? 에반은 성 쪽을 바라보았다. 성안에 계신 부모님은 저걸 보고 뭐라고 하실까?
성 쪽에서 형과 두 분의 부모님이 성문 쪽으로 오고 계신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어제 닭보다 더 큰 새를 잡겠다고 호수까지 다녀오셨는데….
밀려오는 양 떼를 보면 에반은 동생이 생각보다 너무 특이한 아니 그 상대의 상대가 특이한 분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화이트 힐 영지는 너른 언덕 위에 있는 고즈넉한 모습이었다. 언덕을 빙 두르고 돌을 쌓아 만든 성벽과 언덕 위의 내성과 감시탑, 언덕에 위치한 민가들은 특이하게 언덕을 파고 들어가 굴을 파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언덕에는 푸른 풀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자 성벽에 사람들이 몰려 올라가서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열린 성문 입구에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우리 뒤로 밀려오는 양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우와아~”
“아가씨의 결혼 선물인가 봐요!”
“양이 천 마리는 되겠어? 아가씨가 무척 사랑받으시나 봐~”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자 옆에 앉아있던 리젤다는 부끄러움에 내 망토 안으로 숨기 바빴고, 이실리엘은 자신의 선물이 뭔가 큰 평가를 받자 아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성문 앞에 다다르자 아그라프를 멈춰 세웠다.
앞에 에반과 에반과 비슷한 사람 두셋이 보였기 때문이다. 딱 봐도 가족으로 보였기에 인사를 하기 위해 아그라프에서 내렸다. 옆에 리젤다와 이실리엘도 나와 함께 내렸다.
“리디!”
중년 부인의 부름에 리젤다가 그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리젤다의 눈매는 아버지 쪽 유전인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주 순한 인상이셨다.
“엄마!”
리젤다의 아버지로 보이는 분이 이실리엘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숲의 자녀 중 높은 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한 가족이 되려고 왔습니다.”
이실리엘의 한마디에 영지가 환호로 불타올랐다.
“우와와와악!”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나도 인사를 위해 리젤다의 아버지 쪽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사람들의 환호가 멈추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다, 다리를 저셔….”
“맙소사, 아가씨….”
어? 이거 장애가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신랑 결격사유인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