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86. 북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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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화살의 실패를 뒤로하고 시위에 화살을 다시 걸려 하는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옆을 바라보니 이실리엘과 엘프들이 눈을 부릅뜨고 놀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뭘 또 잘못했나? 이실리엘까지?
그들의 눈빛을 본 나의 소의회 PTSD가 다시금 발작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지금 눈빛이 딱 그때 눈빛이랑 비슷했기 때문이다.
“러셀 무, 무엇이냐? 어, 어떻게 세계수의 활을 다룰 수 있는 것이지?”
당황이라는 단어를 모를 것 같은 엘프 로리엘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리엘이 XXYY 이야기 할 때 상대방 느낀 당황함보다 더욱더 큰 당황함 같았다.
“어? 아니 어떻겠냐고 물어도, 그냥 되던데?”
그리고 쓰라고 준것 아니었나? 아니, 당기니까 쏴지고 쏴지니까 맞고…. 그것뿐인데….
“예?”
그런데 이실리엘까지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 귀엽다! 당황한 이실리엘 이라니!
그런데 그런 귀여움에도 지금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트라우마가 자극되고 있었으니까….
내 말을 들은 로리엘이 엘프어로 다른 엘프들에게 뭐라고 통역하자 다른 엘프들도 ‘에레?’라며 뭔가 말도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이실리엘이 놀란 목소리와 함께 제일 먼저 나에게 달려들었고 주변에 엘프들도 잡고 있던 고삐를 내던지고 나에게 모여들었다.
엘프들의 머릿속에는 늑대 잡을 생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엘프들이 나에게 막 달려들어 손을 대려고 할 때 놀란 내가 외쳤다.
“자 잠깐 일단 저기 저기부터 도와주고. 뭘 해도 합시다.”
엘프들은 숲과 자연을 사랑하는 조용한 종족이 아니었던가? 이 세계의 엘프들은 좀 과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냐고 진짜! 행복으로 가득 차 봄 내음이 흘러넘치던 내 가슴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내 말에 엘프들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더니 이실리엘이 대표로 외쳤다.
“아…. 최대한 빨리 처리하도록 하죠!”
이실리엘의 기운찬 목소리가 언덕에서 울려 퍼지자 다른 엘프들도 고삐를 전부 리젤다에게 맡기더니. 불화살, 물 화살, 얼음 화살, 날카로운 바위나 흑요석으로 보이는 화살들이 공중이나 땅속에서 솟아올라 엘프들의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급한(?) 마음의 엘프들로부터 시작된 늑대들의 파멸을 예고하는 파도가 언덕 아래로 쏟아졌다.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하다가 기사들에게 머리가 깨져나가거나, 머리통에 돌로 된 화살을 맞고 침을 흘리고 기절하거나, 입안으로 물 화살이 계속 날아들어 배가 부풀어 움직이지 못하고 주저앉는 놈.
뭔가 엄청나게 서두르는 느낌이긴 한데….
결국 멀리서 헤럴드 님과 기사들이 세 마리째 늑대의 머리통을 부수는 걸 마지막으로 모든 늑대가 쓰러졌다.
그리고 내 주변에 몰려든 엘프들이 내 피부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실리엘 같이 만지지 말고 좀 말리라고!
“아니, 배나 가슴은 만지지 맙시다!”
“저기…. 그. 여러분들?”
리젤다가 안 되겠는지 엘프어까지 동원해서 뭔가를 말했지만, 엘프들은 뭔가 눈을 감고 내 몸을 한참 주물러댈 뿐이었다.
엘프들 사이에서 이실리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네요?”
“뭐, 뭐가 말이지?”
“분명히 인간인데 말이죠.”
“그, 그렇지 내가 인간이지? 오크는 아니잖아?”
나의 농담에 이실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럼 이분들은 내가 인간이 지금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훗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세계수의 활은 엘프만 쓸 수 있는데, 러셀이 어떻게 쓸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몸을 확인해봐도 다른 인간들과 비슷하거든요?”
“당연하지! 어머니 아버지도 다 인간이었는데.”
“아뇨, 그게 정령 친화력이 높아야지 정령들이 부탁을 들어주니까, 정령을 다룰 수 없으면 이 활을 쏠 수가 없거든요. 아, 그냥 쏠 수는 있어요. 다만 그건 그냥 활이죠.”
“아! 러셀 활을 들고 다시 한번 아까 그대로 죽은 늑대라도 한번 맞춰 보실래요?”
이실리엘의 부탁이니 해야지…. 나는 애처가니까 말이다.
나는 다시금 아까 활을 쏠 때의 기운을 느끼려고 활에 감각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내 몸을 여기저기 더듬고 있는 주변의 엘프들을 지나 저 멀리 쓰러진 늑대들이 머릿속에 나타났다.
화살을 전통에서 한발 뽑아 시위에 걸었다. 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목표물을 확인하고 공중으로 화살을 쏘아 올렸다. 엘프들은 신기하게도 내 동작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날 더듬고 있었다.
죽은 늑대의 몸에 느껴지는 온기, 땅 위에 올려진 놈의 육체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이번에는 다소 쌀쌀맞은 바람의 정령이 내 화살을 재빠르게 낚아채 늑대의 머리에 내던지듯 꽂아버렸다.
틱
멀리서 놈의 머리통에서 튕겨 오르는 화살이 느껴졌다.
“우와아!”
“에레?!”
“에레 에라!”
이실리엘의 감탄과 엘프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나를 향해 쏟아졌다.
“대단해요. 러셀! 지금 네 정령이 러셀을 도와주었어요! 계약도 하지 않았는데 정령들이 친구처럼 도와주었다고요!”
이실리엘이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나는 정령사는 아니니까 계약은 못 했는데…. 예전에 계약을 시도해본 적은 있지만 대차게 까였었다. 계약해주지 않더라도 정령이 정령석을 이용해서 부르면 최소한 궁금해서 와보기라도 한다는데 한 마리도 오지 않았거든.
당시 정령을 소환해주었던 정령사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이런 능력에 눈뜬 것도 이실리엘에게 활을 받은 다음부터였다.
솔직한 말이지만 내 용병 등급은 마지막에 금 등급 이었다. 그 금 등급은 이실리엘의 청혼을 받고 떠나올 때 들린 중부왕국에서 받은 것이었고.
내가 만 년 은 등급으로 있었던 이유는 내가 어떤 이능도 허락받지 못한 육체였기 때문이었다. 마력, 신력, 육체적 이능등 그 어떤 것조차 말이다.
신전은 내가 의도적으로 회피했지만 다른 것들은 돈을 벌거나 정보를 얻는 대로 시도해보았는데 나와의 인연은 없었다.
할 수 없이 육체와 기술을 한없이 단련할 수밖에 없었고 활 한 가지라면 인간 중에 나를 넘어설 사람이 없을 때까지 단련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량이 어느 정도 올라 활을 잘 쏜다는 엘프들을 찾아갔을 때, 엘프들조차 몇을 제외하고는 이길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나도 그럼 정령 친화력이 높은 건가? 예전에 계약해보려고 했는데 못 했거든. 정령들이 하나도 안 나타나서.”
내 말에 이실리엘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요 이상하네요? 왜 안 나타났을까요? 정령들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누굴? 나를?”
“네 그럼요.”
내가 뭔가 이해 못할 표정을 하자 로리엘에 내 눈에 손을 대더니 뭔가를 했는데 갑자기 눈알이 빠질 것같이 아파져 왔다.
“크핫! 이, 이게 무슨!”
‘내 눈! 내 눈!’
당황하는 것도 잠시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 돌아오자 총천연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졌다.
“우악. 이게 무슨?”
총천연색의 세상에서는 갖가지 정령들이 우리의 주변을 수놓고 있었다. 이실리엘 주변에 제일 많이 날아다녔는데, 이놈들이 나한테까지 날아와서 빙빙 돌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리젤다가 옆에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자 로리엘은 또 말도 없이 리젤다의 눈에 테러를 감행했다.
“꺄악! 누, 눈이!”
하지만 리젤다도 나처럼 뾰족한 비명을 지르고는 한참 눈을 부여잡고 있다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신비한 모습에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우와! 이것이 정령이군요!”
“정령과 정령력들이 눈에 보이게 되는 거예요. 정령안이라고 하죠.”
한참을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헤럴드님이 자기 말을 찾아서는 이쪽으로 달려왔다.
“고맙습니다. 이실리엘님, 러셀님 덕분에 쉽게 처리했네요. 마수들은 상당히 민첩해서 잡기가 힘든 편이거든요.”
“아뇨. 당연한 일입니다.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네 덕분에 허허”
말투만 영감같이 하는 영감님, 아까 훨훨 날아다니시더구먼.
헤럴드님 뒤로는 전장은 정리가 한창이었다.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을 위한 슬픔과 눈물이 구릉지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구릉지의 수많은 연못과 호수가 희생자들의 슬픔이 모여 만들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갈기늑대의 가죽을 양도받을 수 있었는데, 북부에서는 이걸로 갑옷을 만든다고 했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가벼워 아주 비싼 갑옷이 된다고 했기에, 비교적 상태 좋은 걸로 6개만 챙기고 나머지는 양보했다.
처가 가져가면 점수 좀 받으려나? 이실리엘의 집에 반 정도 선물하자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나 다친 사람 가족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상인들에게 양보했다. 나의 말에 용병들과 상인들이 무척 고마워했다. 마지막 태양이 산등성이에 걸려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재빠르게 상인들을 뒤로하고 아그라프에 있던 엘프들과 합류해 근처에 야영지를 만들었다.
늦기 전에 불을 피워야 맹수 같은 놈들이 덜 달려들기 때문이다. 한참 나뭇가지를 모으고 불을 붙이니 모닥불이 하늘 위로 불꽃을 날리며 타올랐다. 날아 올라가는 불꽃을 보니 아까 생각이 나서 희생자들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길 기원했다.
그리고 모닥불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가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 세계는 죽음이 정말로 흔한 세계인 것 같아.”
“훗~ 꼭 러셀은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라도 구경한 것처럼 말하네요.”
이실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엘프들의 통찰, 혜안 그런 건가? 아니 근데 경제개념은 왜 대체….
문과생 이실리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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