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84. 북부 3
* * *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다며, 좀 더 빠르게 이동해 마을로 들어가 여관에서 묵자는 헤럴드 님의 의견에 내가 반대를 표했다.
“어째서?”
헤럴드 님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따듯한 여관을 놔두고 굳이 밤이슬을 맞겠다고 하니까 말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여관주인이 될 때 자신에게 했던 맹세 영원의 스튜를 먹지도 끓이지도 않겠다는 그 맹세 말이다.
물론 도적 새끼들 때문에 한 번 깨지긴 했지만. 진짜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다.
“영원의 스튜를 먹느니, 야영하며 차라리 사냥하는 게 좋습니다.”
헤럴드 님은 영원의 스튜가 왜?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북부 음식 문화는 좀 끔찍한 편이긴 하다. 전생의 영국 정도 될까? 리젤다를 보면 북부인들이 미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자칭 남부 최고 여관주인의 요리를 저녁에 맛보여주기로 다짐했다.
딱 긴장해라 아주 다른 건 못 먹는 몸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우리는 해가 지기 전 냇물이 흐르는 숲과 목초지 경계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시작했다.
북부 기사들은 목초지에 자리를 잡을 것을 권했다. 사방에서 습격해 오는 것을 알기 쉽기 때문인데 엘프들이 있으니, 굳이 식수와 땔감이 먼 곳에 있는 목초지에 자리 잡을 이유는 없었다.
로리엘에게 저녁 식사감을 부탁하자 로리엘이 엘프들과 숲으로 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뇌조 열댓 마리와 큰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왔다. 남부의 작은 사슴이 아니라 무슨 소만 한 사슴이었다.
이 정도면 이 많은 인원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교적 북부에 익숙한 엘프들이 야생 허브들도 따다 주었다.
먼저 모닥불을 피우고 냇가에서 돌을 주워 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돌을 달궜다.
“러셀 뭘 만드나요?”
“무슨 음식인지 궁금해요.”
이실리엘과 리젤다가 옆에 와서 물었다.
“이게 바비큐 같은 건데, 무척 맛있거든? 잠시만 기다려봐.”
그리고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사슴을 손질했다. 배를 가르는 게 아니라 목에서부터 가죽을 통으로 벗겨야 했다. 야영 나오면 솥이나 조리도구를 가지고 다니기 힘든데, 우리끼리 사용할 작은 솥은 있지만 그걸로 이렇게 많은 인원이 먹을 수는 없으니, 이런 조리 방법이 좋은 것이다.
목을 자른 사슴의 목구멍으로 내장을 쏟아내 손질하고 가죽을 통으로 벗겨냈다. 대장을 조금 남겨 안쪽에서 묶고 뒤집은 채 냇가에서 한번 씻어 왔다. 고기는 적당히 먹기 좋은 크기로 각을 뜨고 잡아 온 뇌조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손질했다.
그리고 아까 벗겨낸 가죽을 뒤집어 고기와 달군 돌을 번갈아 가면서 집어넣는다. 중간중간 엘프들이 뽑아온 허브를 쥐어뜯어서 넣어주는 걸 잊지 않으며 말이다.
치익
달궈진 돌을 넣을 때마다 김이 솟아오르며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오오….”
기사들이 그 냄새에 기대감이 가득한 소리를 낸다. 현지에서 합류한 기사들과 헤럴드 님은 쟤들 뭐 하는 거지? 하는 표정이지만 내 음식을 몇 달간 먹은 눈꽃기사들은 기대감에 눈이 초롱초롱했다.
모든 고기를 다 집어넣고 돌을 켜켜이 채우고 나면 뚫린 목을 가죽끈으로 묶는다. 그리고 겉의 털을 태우고 돌을 달궜던 숯만 남은 불에 올려 겉을 천천히 익혀준다.
시간이 걸리는 요리기에 천천히 뒤집어가며 익혔다.
온 사방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숲을 메아리쳤다.
두 번째 달이 떠오를 때쯤 음식이 다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깨끗한 곳에 방수가죽을 넓게 깔고, 기사 넷이서는 옮기다 고기가 찢어질 것 같기에 아래 나무까지 받쳐가며 사슴을 가져왔다.
“후 두근두근 한데?”
나는 수많이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단검으로 사슴의 배를 ‘주욱’ 갈랐다.
촤악~
사슴의 배가 중앙에서 양쪽으로 젖혀지며, 은은한 허브의 향과 잘 익은 고기의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얼마나 냄새가 좋았는지 사방으로 경계를 서던 기사들까지 뒤돌아볼 정도였다. 전생에 알고 있던 몰골의 전통음식이라는 ‘버덕’이라는걸, 모험가 시절에 몇 번 해봤는데 이게 상당히 괜찮은 조리법이라서 맛이 상당히 좋았다.
이렇게 큰놈으로 해본 건 처음이지만 말이다.
쫙 벌어진 큰 사슴의 가슴에 담겨있는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고기와 기름진 국물.
그 대단한 위용에 다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단 사람들에게 돌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전생에 이렇게 현지 사람들은 돌을 손에다가 쥐고 몸을 따듯하게 한다는 걸 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앗 러셀 너무 뜨거워요!”
리젤다가 손에 뜨거운 돌을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웃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었다.
“그거 그렇게 한 손에 들고 있지 말고. 오른손, 왼손 옮겨가면서. 그렇지 하하.”
엘프들이 따듯한 돌을 쥐고 호들갑스럽게 오른손, 왼손 옮겨가는 모습에 기사들이 다들 흐뭇한 오빠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흐뭇한 광경이었다.
나는 먼저 내부에서 손질한 내장들을 꺼내 자르고 고기와 뼈에 붙은 고기들을 꺼내 한쪽에 쌓아두었다. 그리고 이건 가죽까지 먹을 수 있기에 리젤다와 둘이 칼로 잘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북부의 살찐 뇌조도 안에서 다 익어 다양한 고기를 맛볼 수 있었고, 심장이나 염통, 간 같은 내장도 아주 잘 익었기에 다 같이 몰려들어 산처럼 쌓인 고기를 신나게 먹었다.
양이 적고 음식 먹는 모습도 예쁜 엘프들도 사슴 갈비를 물어뜯으며 거친 식사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
기사들은 각자 소금 정도는 가지고 다니기에 소금을 찍어 먹으라고 했는데, 그냥 먹어도 맛있다며 다들 신나게 먹어대고 있었다.
“오... 이건 정말 대단하군요!”
헤럴드 님이 사슴 다리뼈 한 짝을 물어뜯으며 말하고 있었다. 손과 입에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게 이미 꽤 많이 드신 것 같았다.
딱 기다려 단장님 자꾸 나 따라다니면 아주 그냥 여행 끝날 때면 바짓가랑이 붙잡고 울고불고 매달리게 해줄게. ‘러셀의 음식 말고는 이제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는걸?’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말이다.
나는 헤럴드 님을 음흉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화려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들 몇군데 모닥불을 피우고 잠이 들었다. 나는 이실리엘과 리젤다 사이에서 잠이 들었는데 이실리엘이 정령의 기운으로 몸을 따듯하게 해주어 밤새 따듯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남은 고기와 각자의 육포나 식량으로 간단히 때우고 길을 서둘렀다. 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마을에서 헤어져야 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은 두 번째 태양이 떠오를 때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는데, 주먹만 한 돌을 켜켜이 쌓아 올린 석축으로 이루어진 방벽을 가지고 있는 제법 큰 마을이었다. 집들도 벽면은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북부의 전형적인 마을입니다. 나무보다 돌로 된 집들을 선호하는 북부인들의 취향이 잘 반영된 마을이라고 할 수 있죠.”
헤럴드 님이 내가 마을을 둘러보며 신기해하자 뒤를 돌아보며 말해주었다.
대수림 가까운 쪽에 있는 북부 마을들은 다들 나무집이어서 내가 북부를 여행할 때도 이런 가옥 형태는 본 적이 없었는데, 신기해하는 내 모습에 옆에서 리젤다가 말했다.
“저희 영지도 저런 모습이에요.”
석축 위에 경계를 서던 사람들이 맨 앞에 눈꽃기사를 보자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을 광장에 도착한 우리 앞에 마을 촌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헤럴드 님에게 연신 굽신거리며 뭔가 이야기를 하다 사라졌다.
북부는 무를 숭배하는 경향이 강해 일반인들이 기사들에 대한 존경심이 높다더니, 진짜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다들 기사들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리젤다의 오빠 에반은 먼저 가서 준비해두겠다며 리젤다의 제지에도 기사 둘과 먼저 달려가 버렸다. 깜짝 방문은 못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을에서 북부 눈꽃기사 네 명과 헤럴드를 제외하고 다른 병력은 다들 다른 길로 흩어졌다. 나를 찾기 위한 그들의 여정이 끝이 난 것이었다.
게 사건에서 목숨도 구해주고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브라한과는 포옹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닙니다. 러셀님, 남부에서의 여정은 맛있는 음식과 목욕, 잠자리로 환대해 주셔서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이실리엘이 전해주라는 선물을 그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나를 찾아준 보답이라고 했다. 그의 손에 이실리엘의 선물을 올리고 당황해하는 그에게 딱 한 마디만 해주었다.
“엘프의 보은입니다.”
입을 벌리고 멈춰선 브라한과 기사들을 보며 생각했다. 알아서 팔아 회식(?)이라도 하겠지?
그때 옆에서 이실리엘이 마을을 두리번거리더니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나에게 물어왔다.
“러셀, 근데 양은 어디서 사는 거죠? 천 마리를 다 한 번에 살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우리 귀여운 엘프는 양 천 마리에 꽂힌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