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83. 북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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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초지와 숲들이 드문드문 연결되어있는 구릉지는 절경이 따로 없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양과 염소 떼와 목동들 사이사이 점처럼 흩어져있는 호수와 연못들 북부가 엄청 척박하고 힘든 곳이라고 들었는데 엄청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실리엘과 리젤다를 양쪽 품에 끼고 아그라프에 올라 느릿느릿 이동하니 세상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일까? 예전에 북부를 여행할 때는 뭔가 좀 춥고 척박한 느낌이었는데.
전생에 인터넷에서 읽었던 글이 기억 속에 떠 올랐다.
솔로의 겨울은 계절이 아니라 가슴에서 느껴지는 한줄기 한기로 시작한다는 말이었던가? 내 가슴엔 온기가 찾아왔으니…. 봄이구나!
우리 앞뒤로 이동 하는 기사들의 행렬을 바라보다, 문득 궁금함이 떠올라 내 앞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헤럴드 님에게 물었다.
“그런데 헤럴드 님은 바쁜 일 없으신가요? 저희 호위 병력이 다소 과한 것 같습니다만.”
북부 눈꽃기사 서른에 평 기사 여덟 명, 마법사 둘, 거기 기사단장까지. 엘프 수호자 열 명은 논외이다. 아니, 내 장가 행렬에 조선시대 함 지고 가는 것도 아니고,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헤럴드 님이 화들짝 잠에서 깨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흠. 첫 마을에서 일부는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괜찮으실까요?”
“어? 헤럴드 님은 안 돌아가시나요?”
“늙은이가 방해입니까?”
“아, 아뇨 그 기사단장님이라고 하시니까 저 같은 은퇴 용병이나 따라다니시기엔 좀 과하달까? 뭐 저보다 우리 이실리엘을 따라다니시는 거겠지만.”
내 말에 이실리엘이 그게 무슨 말? 이런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재빠르게 이마에 입을 맞춰 새빨개진 이실리엘이 망토 품으로 숨어들어 버리게 만들고 헤럴드 님을 보았다.
헤럴드 님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북부 오 왕국의 임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수림, 대산맥에서 내려오는 마물, 몬스터들의 방어로 중부대륙의 안전을 확보하고 엘프들의 동향 파악 정도 되겠죠?”
내 말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헤럴 님과 주변의 기사들의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엘프 동향 파악은 모를 줄 알았나?
“어떻게 알았냐? 하는 표정들이신데….”
“뭐 조금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는 거니까요. 어차피 대수림에서 중부로 밀려 나오는 몬스터는 비교적 적거든요. 놔두면 문제가 되겠지만 북부 오 왕국 중 두 개가 대 수림 근처에 자리 잡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엘프들이 숲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으니까요.”
내 말에 근처에서 말을 타고 가던 로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산맥은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오 왕국이 그런데도 대수림과 대산맥까지 넓게 방어하고 있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고, 그렇다고 엘프들을 적대하느냐? 그것도 아닐 겁니다.”
“자주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거든요. 수백 년씩 한가지 무기를 자기들 딴에는 익숙하게 다루려고 ‘연습’을 하는 엘프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괴물 같은 무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과. 평화를 사랑하니 건드리지만 않으면 단물이 살살 흘러나오는 벌통이라는 걸요.”
“뭐 잘못해서 벌통을 건드리면 벌통에서 튀어나온 매서운 병정 벌 한 마리, 한 마리가 끔찍한 피해를 주지만 말이죠.”
주변의 북부 기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헤럴드 님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이실리엘이 다시 날 바라보며 벌통이 뭔데?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망토 속으로 집어넣으려 이마에 키스하려고 하자 나를 밀어내며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허! 남편님이 말씀하시는데! 근데 이실리엘의 눈망울을 보니까 내가 잘못했다. 아냐 아마 이실리엘의 눈망울을 보고있으면 세상 모든게 내 잘못일 것이다.
앞을 보자 여전히 헤럴드 님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정리하면 엘프들을 보호하고 엘프들과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 엘프들의 물건은 가치가 높으니까요. 그리고 혹시 모를 돌발 사태를 위해서 동향을 파악한다. 정도로 정리하면 되겠네요.”
“엘프들은 인간의 보호를 받을 만큼 약하지 않다!”
말을 타고 옆으로 온 로리엘이 화가 난다는 투로 말했다. 하긴 내가 말하고도 그냥 들으면 웃긴 말이니까.
“그 보호라는 건 좀 의미가 다른데, 너희를 나서서 지켜주는 게 아니라... 그 뭐냐 그렇지! 잡스러운 벌레가 꼬이지 않게 해준다는 거지.”
“잡스러운 벌레?”
갑자기 왠 벌레 이야기냐는 표정을 지으며 로리엘이 되물었다.
“그 왜 노예 상인이나 엘프 사냥꾼들 같은 놈들이 대수림으로 못 들어가게 막는 거야.”
“흠…. 딱히 잘 막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로리엘의 말에 기사들이 단체로 ‘크흠 크흠’ 거리며 헛기침해댔다.
“뭐 그런 놈들은 워낙 미친놈들이 많아서, 대수림까지 땅굴을 몇 달씩 파서 통로를 만들거나, 마법 주문으로 날아 들어가 마법 문을 열거나, 마음먹고 숨어들려면 막을 수가 없긴 해. 뭐 최소한 대량의 인원이 난입해서 헛짓을 못 하게 막아주는 거지”
“그렇게 알게 모르게 인간들이 노력을 해왔다니 엘프들이 빚을 진 것이군?”
로리엘의 말에 이실리엘도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보다 엘프들은 인간과 같지 않게 오해나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빠르게 납득하는 모습을 보인다.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는 그런 모습이 없어서 엘프들의 숲에서 생활할 때도 좋았지….
“그렇지, 괜히 미친놈들이 대수림에 들어가서 엘프들을 화나게 했다가, 인간들의 국가나 단체에 관심이 없는 엘프들이 튀어나와서 관련자를 찾는다고 주변을 들쑤시면, 피해가 막대하니까 서로서로 보호하는 거라고 볼 수 있지.”
“원래는 서로 사절도 보내고, 최소한의 상호 교류도 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그러면 좋은데 말이지, 어느 쪽에 엘프 사냥꾼이 감시를 뚫고 들어갔는지 알려주기도 하고, 내부에서 몬스터가 밖으로 몰려 나가는 것도 알려주고, 그러면 서로 도움이 되니까.”
이실리엘이 내 품속에서 쏙 튀어나와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인간들이 자꾸 숲을 침범해 엘프들을 납치하거나 숲의 왕들을 화나게만 해서, 저희는 인간들이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을 전혀 몰랐네요. 돌아가면 대의원님께 말씀드리고 그 사절이랑 정보 교환이라는걸 말씀드려봐야겠어요.”
“그래, 그러면 좋지. 이웃이니까 말이야.”
나는 다시 이실리엘의 망토 품에 넣고, 왼쪽의 리젤다가 서운할까 리젤다의 이마에도 키스해주었다. 망토 속이 난방을 넣은 듯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헤럴드는 잠깐의 러셀과의 대화 후에 믿을 수 없는 충격에 사로잡혀있었다. 브라한이 점잖고 지혜로운 인물이라고 했을 때. 아니, 용병 출신이 점잖으면 얼마나 점잖고 지혜로우면 얼마나 지혜롭겠냐 하는 생각을 했었다.
용병들은 글도 모르는 놈들이 대부분이고, 피에 절어 살아가니 제정신인 놈들이 드물고 그들의 지혜라고 해봐야, 사람 대가리나 몬스터 대가리 어떻게 해야 잘 따나 그런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하면 할수록 지혜? 이건 그냥 지혜로운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 러셀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해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고 있을까? 북부 오 왕국의 개국 이래 최대 숙원이었던 엘프들과의 사절과 정보 교환 그것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엘프들에게 의향을 묻고 부탁했지만, 엘프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인간들과 교류는 없다. 엘프들의 일은 엘프가 해결한다.’
왜 다소 자신들에게 적대적인지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흘러갔다. 그게 수백 년이었다.
그의 말대로 엘프들은 벌통이었다. 자신들을 건드리면 사방으로 병정 벌을 보내는 벌통, 그리고 아주 가끔 인간의 왕국이나 인간들의 삶이 궁금한 엘프들과 밖으로 여행을 나온 엘프들이 전해주는 물건들은 북부 왕국의 짭짤한 부수입원이었다.
그렇게 적당한 관계만이 길게 유지되고 있었는데 러셀과의 대화 중에 그간의 실마리가 풀리려 하고 있었다.
뭐? 지혜롭다고?
헤럴드는 브라한을 바라보았다.
‘이 새키야! 이건 지혜로운 게 아니라, 현자님이시잖아!’
헤럴드는 러셀을 보며 생각했다. ‘남부! 남부에서 현자님이 찾아오셨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국왕들에게 이 내용을 보고할 때는 러셀의 이명을 ‘대습지의 현자님’으로 하리라 마음먹었다.
해럴드는 기사도를 숭배하고 음유시인의 이야기의 맹렬한 신봉자였기에 자신이 생각한 ‘대습지의 현자님’이라는 이명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어느 음유시인의 노래에서나 접할듯한 뭔가 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이명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헤럴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러셀이 분명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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