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84화 (84/352)

〈 84화 〉 82. 북부 1

* * *

러셀이 도착한 곳은 대여섯 채의 오두막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숲속이었다.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는지 인기척은 없었고 여기저기 거미줄이 수놓아져 있었다.

주변에는 전나무와 가문비나무들이 많았는데 전형적인 북부 수림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우리 때문인지 오두막을 자기 집으로 삼았던 다람쥐 같은 설치류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여긴?”

러셀의 말에 이실리엘이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여긴 제가 러셀을 기다렸던 곳이에요.”

아…. 여기가 내 소식을 기다리며 이실리엘이 벨에게 중부대륙 어를 배웠다는 그곳이구나, 이실리엘의 추억의 장소라니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조금 멀리서 화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가씨!”

“힉!”

마을 앞쪽으로 난 오솔길에서 여기사 넷이 매서운 표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에 놀란 벨이 갑자기 기겁하면서 우리 뒤로 숨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다 이실리엘을 발견하자 이실리엘과 친분이 있었던지 인사를 해왔다.

“앗 이실리엘님 안녕하세요?”

“저희 아가씨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폐가 되었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즐거웠고.”

“저희는 저희 아가씨를 가주님께 ‘모셔’ 가야 해서…. 죄송합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기사들은 벨을 어깨에 들쳐메고 그들이 왔던 오솔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벨은 기사의 어깨에 짐짝처럼 들쳐메져서는 이실리엘에게 소리쳤다.

“이실리엘 그 돌아가는 길에 꼭 들러줘 알았지?”

“그…. 그래 벨…. 근데 기사님들이 좀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으…. 응 괘, 괜찮을 거야. 아마도…. 아마도….”

여기사들이 멀어지며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가 가출하는 바람에 저희는 단장님께 끌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세요? 네? 아가씨 저희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으신 거죠? 정말 너무하세요!”

여기사들의 원망과 한숨이 숲길을 따라 멀어져가고 기사들의 대장 브라한이 그 모습에 허허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브라한의 모습은 뭔가 시원한 걸 한잔한 모습이었다. 벨이 가출했다더니 덕분에 고충이 많았나보다 생각했다.

그때 리젤다의 오빠 에반이 다가와 쭈뼛거리며 물었다.

“러셀님, 세계수의 숲이 있는 대수림으로 먼저 모실까요? 아니면 그…. 저희 집으로?”

러셀이 이실리엘과 리젤다를 쳐다보자 이실리엘이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는 러셀에게 말했다.

“저는 그, 먼저 꽃을 꽂았으니까. 리젤다의 집부터 들리기로 해요.”

그 소리에 리젤다가 이실리엘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감사해요. 이실리엘님...”

“그…. 저희는 가족이니까요.”

무슨 발레리를 시작으로 뭔가 유행어가 된 듯한 ‘가족이니까요.’가 이실리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여관 여자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된 건가? 왜지? 나만 모르는 뭔가가 여자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뭘까?

한참 궁금함에 빠져있을 때쯤 가슴을 두드리는 북부 기사들의 경례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여기사들이 사라진 길에서, 체고가 낮고 털이 긴, 야크 같지만 엄청나게 큰 짐승을 끌고 기사 넷이 나타났고, 북부 기사들은 그들을 보고 인사한 것으로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러셀님?”

머리에 흰 백발의 남자가 나에게 인사를 해왔다. 그의 얼굴에는 여기저기 흉터들이 남아있었는데 아주 강인한 인상의 사내였는데 매끄럽게 손이 탄 검의 손잡이와 가죽 갑옷이 그가 노련한 전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러셀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러셀이 북부 귀족에게 경의를 표하는 인사를 했는데 상대방도 깜짝 놀라 마주 인사를 해왔다.

“허허 용병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눈꽃 기사단의 단장 헤럴드라고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신경 써주신 덕분에 북부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헤럴드는 조금 놀라고 있었다. 북부를 경악에 빠트렸던 국경에 나타났던 높은 엘프의 남편이 용병이었다는 이야기는 현재 북부 수뇌부들의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높은 엘프가 남편감을 찾아달라기에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를 찾아주었는데, 문제는 그가 용병이라는 사실이었다. 용병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예의 없고 거친 인물이 많은지라 뭔가 사고를 칠 확률이 높았고, 그 용병을 십오 년이나 했다는 건 정말 인성이 심각한 문제가 많은 인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브라한의 보고로는 점잖고 지혜로운 인물이라는 평가였지만. 헤럴드는 인간에 대한 평가는 좋을 때 얼마만큼 좋은 인물인가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 얼마만큼의 인간성을 유지하는가가 좋은 인간의 평가 기준이라 생각하는 헤럴드 였기에, 직접 보기 전까지 러셀이라는 인물의 평가는 보류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리가 불편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동 수단을 준비했습니다. 이동하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실까요?”

기사단장인 헤럴드라는 사람이 끌고 온 납작한 야크 같은 동물은 아그라프라는 가축이라고 했는데 북부에서 사는 순한 동물로 이동 수단이나 짐을 싣고 다닐 때 쓰는 것이라고 했다.

리젤다가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니 순한 눈망울로 울었다.

­미오~

특이한 울음소리였다.

“오랜만에 보네요. 집에 있을 때는 자주 타고 다녔는데”

리젤다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가 좀 말괄량이셨던 것 같았다.

“이거 몇 명이나 탈 수 있는 거지?”

“아마 열 명도 탈 수 있을걸요? 근데 등에 매트만 깔려있으니 네 명 정도 탈 수 있겠네요.”

리젤다가 연신 신기하게 생긴 생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엄청나게 좋아하는 모습에 이걸 집에 한 마리 길러?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오르시지요.”

러셀은 헤럴드에게 같이 아크라프에 오를 것을 권했다. 헤럴드의 러셀에 대한 평가에 예의가 바른 청년이라는 내용이 추가되며, 러셀의 두 부인과 러셀, 헤럴드가 아그라프에 오르자 일행이 이동을 시작했다.

전투마에 탄 서른 명의 기사가 엘프들을 위해서 준비된 말을 끌고, 마법 문을 열기 위해 대기하던 마법사 둘과 대기하던 기사 몇이 추가되자 일행은 꽤 대규모의 일행이 되었다.

천천히 내가 탄 털북숭이가 기사의 손에 끌려 이동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체고가 낮고 다리가 여섯이라 그런지 흔들림도 없고 속도도 걷는 말과 비슷해 비교적 빠르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럼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기사단장 헤럴드가 웃으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러셀은 연장자인지라 예의를 갖추고 그의 이야기에 어울려 주었다. 헤럴드는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북부에 대해서는 잘 아느냐, 북부 음식 중 좋아하는 것이 있느냐 뭐 그런 것 말이다.

뭐 사소한 이야기였지만 머리 아픈 귀족들의 대화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헤럴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숲을 벗어나고 있었다. 길옆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사슴들이 물을 먹다 놀라 도망치고 북부의 긴 털 너구리들이 우리 행렬을 보고 재빠르게 길을 가로질러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숲을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나타나도 남부처럼 너른 들판은 나타나지 않았고 북부는 목축과 약간의 밭농사 정도가 가능한 지역이기에 양이나 염소를 치는 목동들이 많이 보였다.

리젤다의 집이 있는 곳은 북부 대수림과 대산맥의 중간쯤에 있는 곳이라고 했다. 우리가 마법의 문을 열고 나온 곳은 북부에서도 비교적 남부라고 했는데 리젤다 가문의 영지는 비교적 최전방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남부보다는 조금 차고 건조한 바람 대산맥의 초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실리엘 춥지 않아?”

“추우면 정령을 부르면 되니까 괜찮아요.”

이실리엘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좌·우측의 이실리엘과 리젤다를 당겨 내 망토 품 안에 두르자 앞에 헤럴드가 웃으며 말했다.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하하”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어주었다.

근데 처가에 갈 때는 무엇을 사가야 하지? 여기도 장모님이 씨암탉 잡아주시나? 장난기가 도져 에반을 불렀다.

“에반?”

“옛 러셀님.”

“그 남부에서는 처가에 방문할 때나 결혼 승낙받을 때 뭐 가지고 가야 하는 게 있나요? 아니면 지켜야 할 것이라든지? 제가 살던 곳에서는 장모님이 마음에 들면 살찐 암탉을 잡아서 사위에게 대접하는 게 국룰... 아니, 그 전통이었죠.

내 소리에 리젤다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그것이...”

“그런거라면 제가 나이가 있는 만큼 더 잘 알지요.”

에반이 난처해하며 아무 말도 못 하자 헤럴드가 웃으면서 말했다.

“북부는 상대 부모에게 결혼 승낙받으러 갈 때 양을 한 마리 끌고 갑니다. 허락받으면 그걸 잡아서 그날 잔치를 하지요. 그리고 결혼할때 신부의 집에 선물을 할 수도 있는데 보통을 양이나 염소 등을 합니다. 많이 선물할수록 신부가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안 해도 무관하고 귀족들은 가축 대신 돈을 내기도 하죠.”

뭐야 그런 게 있었어?

“양이나 염소는 한 마리에 얼마죠?”

“십에서 십오 동화쯤 할 겁니다.”

이실리엘이 내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다가 품 안의 가죽 주머니에서 백단목을 하나 꺼내 내 손에 쥐여주면서 말한다.

“일단 천 마리 정도면 어떨까요? 더 사고는 싶지만 끌고 가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통이 크신 첫째 마님이셨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