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75. 전투식량과 이단심문과 시트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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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되기 전 그란폴을 출발한 마차는 웜포트를 향해 쉬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시트라는 기대감 반 두려움 반에 내달리는 마차에 몸을 기대고는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신경질쟁이 년이 말을 걸어왔다.
“저 사제님...”
“예, 말씀하시죠.”
“죄송한데. 제가 부탁 하나면 드려도 될까요?”
시트라가 '이년이 뭘 부탁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지?' 하는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또 웬 걸레 년이 교단에서 발행하는, 처녀인증서를 달라는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순결과 자애의 교단 사제들은 자신들의 담당 영역인 순결에 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순결한 여자를 판별할 수 있고, 처녀 논쟁이 벌어지는 일이 생기면 교단에서 처녀를 판별해 인증서(?)를 발행해 주기도 하는데, 가끔 그걸 부탁하는 걸레 년들이 있다. 인증서를 이용해 시집을 잘 가보려는 수작이다.
그런 부탁이라면 잡아 찢으리라 마음을 먹고 신경질쟁이에게 물었다.
“부탁이라면?”
“그…. 혹시 피로 회복의 기적을….”
“네?”
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부탁이다. 뭐별로 신성력이 소모되는 것도 아니고, 몸이 피곤한가?
“예, 뭐 그 정도라면 자 그럼….”
“자! 잠시만요. 제, 제가 아닙니다.”
시트라가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말하자 신경질쟁이 년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가 아니라, 말에게….”
“넷?”
“이대로 계속 가다 보면 저희는 아마 웜포트에 있는 러셀의 여관에 저녁이 지나서야 도착할 것입니다! 러셀의 여관의 저녁 식사는 놓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니라 말에게!”
이게 뭔 개소리야? 라고 생각하며 옆에 발레리를 보았는데 발레리도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부 소년조차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이고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이것을 진짜 뭐지? 라며 발레리는 이거 마차에서 내려야 하나? 심각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을 먹고, 따듯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목욕을 한 후. 깨끗한 침대에서 푹 자면. 아... 오늘 같은 날은 좀 추우니, 러셀이 또 구운 돌을 가죽에 감아 가져다주겠지?”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 어? 구운 돌을 가죽에….”
“아니, 그거 말고.”
“깨끗한 침대에서 푹?”
“아니, 아니!”
갑자기 반말로 다그치듯 외치는 시트라의 기세에 기가 확 죽은 목소리의 릴리아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말했다.
“그…. 따듯한 물에 목욕을….”
“따듯한 물에 목욕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국에는 목욕 문화가 발달 되어있다. 몸을 정결하게 하고 기도드리는 문화가 있으므로 성국의 사제 수녀들은 항상 몸을 정결하게 하려고 목욕에 힘쓰는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파견 임무를 나오면 씻을 수가 없으니. 아주 목욕 생각이 간절한 편인데 여관에서 목욕을 할 수 있다는 정보가 이단 심문관 시트라에 귀에 흘러들어 온 것이었다.
시트라에 손이 빛나며 성력이 물결치듯 떠올랐다.
“체력의 축복! (Blessing of Stamina), 불굴! (Indomitable)”
시트라의 손에서 두 가지 축복이 말들에게 쏟아졌다. 이제 저 말들은 지쳐 쓰러지지 않으리라.
러셀의 마차가 웜포트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깊이 파인 웅덩이도 마차에 달려들려고 했던 늑대도 마차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저녁 준비가 한창인데 어제 웜포트로 갔던 발레리가, 여관 창문을 두 달째 노크하는 빗줄기를 뚫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러셀님!”
“어 발레리 수고했어. 이야기는 잘 되었고?”
“그러니까 내가 왔겠지?”
“오우 릴리아나 누님. 어서 오세요.”
반갑게 인사한 릴리아나는 전투식량 계약을 위해서 왔다고 했다. 그리고 릴리아나 뒤로 사제복 차림의 은발에 눈 위에서부터 긴 상처가 있는 여자가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신가?”
“네 러셀님 제가 그란폴의 여관에서 두 달이나 묵고 계시다기에 이곳으로 모시고 왔어요. 잘했죠?”
발레리가 칭찬해달라는 듯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발레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발레리가 기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니 더 열심히 일하겠지?
“역시 우리 식구라니까? 다들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자리가 부족하니 저녁은 같이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그럼요!”
“난 상관없어 러셀”
“저도 괜찮습니다. 형제님.”
“이실리엘 셋을 테이블로 안내해 주겠어? 새로온 손님께 숙박비랑 다른 것 설명도 드리고 알았지?”
“네 러셀~”
이실리엘이 테이블을 닦다가 부리나케 달려와 셋을 데려갔다. 오늘은 진짜 오랜만에 스튜를 끓였는데 괜찮겠지? 생각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시트라는 여관 종업원이라는 이실리엘이라는 엘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금발의 엘프라고? 높은 엘프의 핏줄이라는 건데 이런 작은 여관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일박에 이 동화에요. 목욕과 식사는 무료고요. 마사지와 오일마사지 장비 관리도 있는데 필요하신 게 있을까요?”
“어 첫날이니까 다 한번 해보지요. 뭐….”
시트라는 아무래도 좋았다. 높은 엘프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빨리 성국에 보고해야 했다. 북부 이 새끼들. 협정이 지켜지고 있지 않았다. 북부의 5 왕국의 임무는 대산맥과 대수림의 방어와 엘프들의 동향 파악인데, 높은 엘프가 최남단까지 내려왔는데 성국에 언질조차 없었다니!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때 윗 층에서 남자 몇 명이 내려왔는데 때맞춰 문밖에서도 갑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때 이상은 없고?”
“순찰 중에 특별한 일은 없었어.”
“그래? 그럼 밥이나 먹자고,”
그들의 가슴에 눈꽃 문장을 보았을 때 시트라는 자기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북부 눈꽃기사가 몇이지? 안으로 들어온 둘과 위층에서 내려온 다섯까지 일곱? 이 새끼들은 왜 동향 파악해서 보고는 안 해주고 높은 엘프랑 같이 몰려다니고 있는 거야?
그리고 뒤이어서 이층에서 내려온 엘프 열 명. 웬 엘프가 이렇게 많은…. 그들의 부츠를 보자 시트라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세계수 잎으로 만든 부츠? 수호자? 열 명이나?
하긴 높은 엘프가 병력도 없이 혼자 움직이진 않았겠지. 늪지 최남단에 높은 엘프와 수호자 열 명, 북부 기사 일곱 명.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조금 후 여관으로 들어오는 평원 엘프들도 제법 숫자가 많았다. 수인도 몇몇 보이고.
이단 종교, 이상한 여자들, 높은 엘프, 북부 기사들, 수호자, 많은 엘프들에 수인까지 이 씨발 이거 뭐지? 이단 심문관에 날카로운 판단력으로도 뭔가 조합이 안 되는 정보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자 뇌가 판단을 거부하고 있었다.
“첫째 마님 그건 저희가 할게요.”
한쪽 테이블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트라가 그곳을 보자. 아까 그 높은 엘프가 여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뭐야? 첫째 마님이라고?’
시트라는 부엌 안쪽에서 일하는 여관주인을 바라보았다. 30대 초반이나 20대 후반, 근육질 팔에 아까 살짝 보았는데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퇴역 군인이거나 은퇴한 모험가.
‘저 새끼가 높은 엘프를 따먹었다고?’
엘프들과 우호 증진을 위해서 혼인 동맹을 하려고 해도, 엘프들이 왜 결혼을, 동맹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 해서 성사가 안 된 게 몇백 년인데, 세계수 주변에 사는 그냥 엘프도 아니고.
높은 엘프를? 저 새끼 저거 뭐 하는 새끼지? 첫째라는 걸 보니 둘째도 있다는 소린데….
“사제님?”
“사제님?”
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트라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이런 실수를...
“넷 자매님….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마차 이동에 피곤하셔서 그런가 봐요. 그래도 이제 기운이 나실 거예요. 오늘 메뉴가 스튜래요! 완전 기대된다. 그렇죠?”
뭐? 스튜라고? 전 여관주인 새끼의 빛나는 머리가 생각났다. 그 번쩍이는 머리통에 철퇴를 처박아주었어야 했는데!
그런가? 이년들은 날 농락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유인한 것인가? 그 개 같은 음식이라고?
‘빨간 가슴 큰 착한 년, 넌 그런 년이 아니었잖아! 제발 아니라고 해줘 제발!’
발레리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그 음식이, 자신 앞에 다시 드리워진다면 마음이 꺾여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 자신들의 테이블로 큼지막한 접시들이 날라졌다.
접시 위에는 뭔가 부드럽게 보이는 덩어리 한 개, 각종 채소를 오일과 상큼한 식초로 버무린 샐러드 조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 두 조각, 곡물 덩어리 한 개, 그리고 큼지막한 고기와 채소들이 듬뿍 들어간 국물이 먹음직하게 움푹한 접시 위를 수놓고 있었다.
“어…. 이것이?”
“아, 이것이 사장님 말로는 ‘정통’ 스튜래요. 다른 여관에서 파는 건 스튜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부끄러운 ‘쓰레기’라고 말씀하셨어요.”
쓰레기를 두 달 동안 먹은 시트라가 전율했다.
‘진리가! 진실이! 왜곡되고 있었구나. 이것이 내가 도달한 진리이자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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