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71. 전투식량과 이단 심문관 시트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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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평원의 풀들을 춤추게 하던 빗줄기가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긴 우기가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러셀은 요 며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즐거운 기분이었다. 주변이 정상화를 찾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겹게 내리던 빗줄기마저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솔직히 그간 사건 사고가 너무 많긴 했다. 자신이 바란 것은 그저 조용한 여관 주인이었는데, 망할 놈의 도적새끼들부터 게 새끼에 문어새끼까지... 새끼들이 총출동이었다. 줄줄이 사탕으로 말이다.
그래도 평원 엘프들은 부상이 심한 서넛을 제외하고는 채집과 사냥으로 자신들의 밥벌이는 하고 있었고, 수인들도 마을 일손을 돕거나 엘프들의 일을 돕고 있었다.
또 얼마 전 전투식량 사건으로 앓아누운 발레리가 기운을 차리고 나서, 전투식량을 그란폴에 팔아보겠다며 샘플을 가지고 어제 그란폴로 향했다.
스스로 알아서 일하는 직원이라니!
왠지 기운을 차린 다음날 아침에 자신도 이제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며 각오를 다지기에, 역시! 직원 상담은 지친 직원들을 일으켜 세우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내가 뭘 딱히 해주진 않았는데...
그래도 뭐 아플 때 이야기라도 들어주면 기운이 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원래는 알음알음 소문을 내서 전투식량을 모험가들에게 팔려고 했는데. 도적들과 게 그리고 문어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나의 야심찬 사업계획은 제자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데, 발레리가 나서주면 아무래도 내가 하는 것보다 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관의 발전을 위해 일하러 간다는 발레리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더니.
“저도 이제 한 식구니까요...”
라며 뭔가 소녀가 고백 하는듯한 얼굴로 말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애사심’까지 생겨나다니!
역시 사람은 좀 아파보고 그래야 정신을 차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얼마나 소중하겠나. 아플 때도 챙겨주는 가족 같은 회사, 아니, 여관이니까 말이다.
“그래! 우린 한식구라는 사실을 잊으면 절대 안 돼 알았지?”
발레리가 아주 부끄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를 보내고 북부에서 온 기사들에게 찾아가 말했다. 우기가 중반을 넘어가고 있고 엘프들의 거주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우기가 끝나고 북부로 가는 걸 생각해 보자고 했더니. 행동도 빠르게 수도로 마법사를 데리러 아니 잡으러(?) 간다고 스무 명이 그날로 달려 나갔다. 뭔가 잔뜩 흥분해서 말이다. 마법사님이면 모시고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사냥을 간다는 듯이 광기에 차서 말하는데 솔직히 좀 걱정이 되었다.
원래 칼 밥 먹는 애들은 전생처럼 PTSD 같은 정신쇼크 조심해야 하는데. 저렇게 집단 광기에 찬 걸보니 기사들의 삶도 녹녹치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매일 칼 휘두르고 피를 봐야 하는데 정상인게 이상하긴 하지...
가만 보면 벨릭이 삼십 명이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기사들은 원래 엘리트 아니었나? 무슨 뇌가 근육으로 찬 애들을 모아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발레리는 그란폴의 여관 식당에서 자신을 볼모로 잡고 있는 관대한 주인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개인 전투식량이라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분명 저번에 호되게 당한 후로는 전투식량이라는 거 쳐다보기도 싫었는데 저번에 여관에서 밥을 못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러셀이 뜨거운 물만 넣으면 먹을 수 있는 개인용 전투식량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러셀은 세심한 남자였다.
물론 러셀의 대리인(?)인 발레리는 러셀을 따라다니면서 개인용 전투식량을 만드는 전 과정을 지켜봐야했다. 러셀은 자신을 ‘비서’라고 불렀는데 무슨 직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분신처럼 따라다니면서 자신을 대리하는 일이라니. 애첩이랑 비슷 한건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러셀은 전투식량 제작 과정을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으라며, 자신을 완전히 자기 사람을 만들겠다는 야욕을 숨기지 않는 대범함도 보여주었다. 러셀의 소유욕이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이렇게 대범하게 원하다니, 그 정도로 평가해주는 것인가 해서 아주 조금 기쁜 생각도 들었다. 아주 조금...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한 편이었다.
첫째로 찌거나 밥을 한 곡물을 말린다. 우기가 아니면 바람 잘 드는 그늘이나 햇볕에서 말린다고 했는데, 우기라서 큰 솥을 조금 뜨거울 정도로 은은하게 달구면서 거기 찐 쌀이나 보리, 귀리, 밀 등을 넣고 계속 볶듯이 말렸다. 다 마른 곡물을 러셀은 알파 곡물이라고 불렀다.
여기다 삶아서 말린 고기와 잘라 말린 채소들을 넣고 간을 할 소금을 일정량 넣어주고 쥐 가죽 안에 넣는 것이다. 동그랗게 부푼 쥐 가죽에 내용물을 가득 넣으면 끓여먹는 전투식량이고 반 정도 부푼 쥐 가죽에 절반정도 채우면 개인용 전투식량이 되는 것이었다.
“여깃수. 내 펄펄 끓는 물 달라는 손님은 처음이네...”
가운데 머리가 벗겨진 뻐드렁니의 여관주인이 신기한 주문을 보았다는 듯 큰 맥주잔에 펄펄 끓는 물을 세잔 담아서 가져다주었다.
발레리와 마리나, 마크 앞에 뜨거운 물 잔이 하나씩 놓였다.
“고맙습니다.”
개인용 전투식량의 쥐 가죽 머리 부분을 칼로 잘랐다. 그리고 그 안에 끓는 물을 절반정도 채워 넣는 것으로 식사 준비는 끝이다. 그리고 그걸 나무잔에 잘 기대어 놓고 기다린다. 뜨거운 물만 끓여서 부으면 한 끼 식사 완성인 것이다.
기다리는 사이에 마리나가 발레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발레리 아가씨, 근데 어차피 저희는 물건대금 치르면 그만 두어야 하는데. 요즘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 아닌가요?”
마리나가 최근 너무 러셀의 여관 일에 열심인 발레리가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물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마리나, 나는 이제 이곳 식구가 되어버리고 말았는걸...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지...”
발레리는 이곳으로 오기 전 자신의 결심을 러셀에게 말했었다.
“저도 이제 한 식구니까요...”
부끄럽게 고백하듯 말이다.
러셀이 진짜 활짝 웃으면서 자신에게 확답을 받으려는 듯 물었었다.
“그래! 우린 한식구라는 사실을 잊으면 절대 안 돼 알았지?”
자신을 고개를 끄덕여 그의 소유욕을 충족시켜주었었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네? 그게 무슨...”
마리나와 마크는 발레리의 말과 붉게 물든 얼굴을 이해 못하고는, 머리위로 물음표만 떠올릴 뿐이었다.
전투식량의 내용물을 확인하던 마크가 말했다.
“이제 다 된 것 같은데요?”
셋은 쥐 가죽 윗부분을 좀 더 잘라내고 스푼을 꺼내서 전투식량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 고소한 냄새...’ 셋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가죽냄새가 좀 나긴 했지만 가죽 물통에서 나는 냄새보다야 훨씬 견딜 만 했다.
첫 수저를 떠먹었다.
‘아... 따듯하고 맛있다.’
셋은 자신들의 전투식량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의 웬 여자가 자신들을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시트라는 성국에서 섬기는 많은 신들 중 자애와 순결의 어머니 세인티나를 모시는 이단 심문관이다.
은발에 회색 눈 굳게 닫힌 입술, 이마부터 시작 되 볼까지 내려온 깊은 상처, 목에 찬 순결의 로자리오. 로자리오 뒷면이 붉은 색이기에 성국이나 자애와 순결의 교단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그녀의 신분을 짐작 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지금 특수 임무를 수행중이기에 사제의 모습을 하고 그란폴의 한 여관에서 두 달 가까이 묵는 중이었다.
시트라가 이곳 그란폴에 있는 이유는, 그란폴이 있는 아베느 왕국에서 일어난 변고를 조사하다 갑작스런 우기를 만나, 조사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그란폴로 피신해 왔기 때문이었다.
아베느 왕국의 파텔 남작령이라는 곳이 멸망했다는 보고가 성국으로 날아들었을 때에는 그저 대늪지에서 흘러나온 몬스터가 벌인 일이겠거니 성국 수뇌부는 생각했다.
그따위 일에 성국의 도움을 요청하다니. 아베느 왕국이 아무리 신생 국가라지만, 통치에 조금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견들도 나올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사소한일에 성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건 뭔가 정치적인 이유인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전 영주의 시체가 성국으로 인도 되었을 때는 성국이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나기에 충분했다. 죽어서도 썩지도 않는 시체는 물을 뿌리면 물조차 시체를 피하는 이변이 발생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데드도 아니고 마족의 소행도 아니고 마치 이세계가 이 시체를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 성국은 유능한 이단심문관들을 아베느 왕국으로 파견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마족들이 준동하거나 새로운 몬스터라면 아베느 왕국은 엄청난 피해를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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