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68. 실종 8
* * *
문어로 인해 마을에 남겨진 상처는 우기의 빗물과 함께 천천히 씻겨 내려가고 있었고 마을 한편에 나의 여관에서는 반대로 기쁨과 즐거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세계였다.
그날 한참 후에야 한나 아주머니의 말을 이해한 리젤다는 새빨간 얼굴로 이실리엘과 사라졌고, 로리엘은 답답한 표정의 벨이 한참 귓속말을 한 다음에서야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로리엘은 벨의 귓속말이 끝나고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걸려다 벨에게 끌려가고 말았는데, 뭘까? 궁금하긴 했는데, 벨의 반응으로 봐서는 좋은 일은 아닐 것 같기에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로리엘만 생각하면 엘프 소의회의 충격이 떠올라 트라우마로 남겨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웃었다.
그날 저녁 한나 아주머니가 경사스러운 날이라며 여관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한잔씩 서비스하셨다. 분명 창고 열쇠는 이실리엘에게 있을 테니. 이거 이실리엘이 허락했단 말인가?
생각보다 이실리엘은 용감하신 높은 엘프였나 보다.
포도주 잔을 받은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그냥 사장님한테 축하한다고 하시면 됩니다. 나중에 다 알게 되요!”
라고 한나 아주머니께서 하시는 바람에 영문 모를 축하만 계속 받고 말았다.
이상한 일은 그 담음 날에도 일어났다. 다음날 이실리엘이 어디서 구했는지 자기 머리통만한 연꽃을 머리에 꽂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저거 머리나 잘 가눌 수 있나?
(약간 요런 느낌으로?)
“이실리엘 그 꽃은 뭐야?”
이실리엘이 꽃을 꽂은 이유가 궁금했던 내가 묻자 이실리엘이 대답을 잘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어제부터 뇌에 과부하가 걸리신 듯한 느낌이었다.
“어... 저기 그게... 이게...”
그때 에밀이 다가와서 나에게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미소는 불안한 미소인데...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러셀, 저거 내가 구해 드린 거야! 잘했지?”
“응? 에밀이 구해줬다고? 아니 예쁘긴 한데... 꽃이 너무 큰 거 아닌가 해서...”
“이실리엘님처럼 예쁜 엘프는 저 정도 크기는 꽂아야 한다구!”
아니, 예쁜 거랑 꽃 크기랑 무슨 상관이... 이해 못할 에밀의 말에 궁금증이 증폭될 쯤. 에밀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아참, 러셀은 인간이라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말이지. 엘프들은 신혼 때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거든. ‘나 이제 반려 있어요.’ 이런 뜻이야, 작은 꽃을 꽂으면 잘 안보이잖아 내가 어제 목욕하면서 이실리엘님한테 이야기 듣고, 새벽에 늪지 연꽃 핀데 까지 가서, 제일 예쁘고 제일 큰 연꽃으로 가져 왔다구!”
오오... 저것은 나의 아내가 되었다는 사실을 광고하는 광고판이렷다. 저렇게나 자랑하고 싶었다니...
‘나 이제 임자 있어요... 헐...’
머리에 꽃 꽂은 이실리엘을 보고는 엘프들이 다들 다가와서 뭐라고 말해주더니 축하한다는 말이었나 보다.
그러나 이실리엘의 머리를 보고 감상에 빠진 것도 잠깐. 나의 직업병이 발동하고 있었다.
“그 연꽃 피는데 가면 연꽃이 많나?”
“응? 당연하지 아주 엄청나게 대단하게 피어 있다구”
“그래 그렇단 말이지?”
“왜? 연꽃이 필요해?”
“아니 연잎하고 뿌리가 필요해.”
“응?”
다음날 아침 나는 여관 문 앞에서 새벽 일찍 연잎과 연근을 구하러 간 에밀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나의 메뉴가 단조로워 졌다는 손님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간만에 실력발휘를 하기로 한 것이다.
오늘의 아침메뉴! 그. 이름 하여! ‘연잎 밥’ 크... 내가 이 판타지 세계에서 연잎 밥을 생각해낼 줄이야! 아무리 봐도 이거 엘프들이 너무 좋아할 것 같은 메뉴였다. 은은한 연향이 나는 밥이라니! 엘프들이 환장하고 먹는 즐거운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여관 문 앞에서 하염없이 에밀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 우기의 빗속을 헤치며 에밀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토란잎 모자와 토란잎 우비를 입고 엘프 서넛과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헉헉... 러셀! 이정도면 충분할까?”
엘프들의 등에는 연잎 한 짐과 가슴에는 굵은 연근 서너 개 씩을 각자 들고 있었다.
“안 뛰어와도 되는데... 괜찮아? 양은 충분해 충분~”
“휴... 아니 바로 앞에서 뛰기 시작한거야. 부엌으로 가져갈까?”
아니, 분명 연꽃 핀데서 부터 뛴 게 분명한데! 거짓말을 하는 요망한 엘프라니! 에밀 너는 오늘 토란잎 모자가 귀여워서 봐주기로 했다.
에밀들의 도움을 받아 연잎과 연근을 부엌으로 가져갔다. 부엌은 한창 내가 부탁한 일로 바쁜 중이었는데. 한나 아주머니는 쌀을 씻고 계셨고 애니는 귀리를 토끼자매는 견과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홀 테이블에서는 리젤다와 이실리엘이 건조한 크랜베리와 건포도를 자르고 있었고 말이다.
연잎은 비 오는 날 따와서 그런지 아주 깨끗했다. 이 세계는 농약도 없고 공해도 없으니 그냥 따서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우선 쌀과 귀리를 적당한 비율로 섞는다. 여기에 에밀이 따온 연근을 잘 잘라서 다시 섞어주고 견과류들과 건포도와 건 크랜베리를 넣는다. 이것을 1인분씩 덜어서 연잎에 잘 싸주는 것이다. 아참. 약간 싱거울듯하게 소금으로 간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걸 켜켜이 쌓아 올리고 찜통에 쪄내면 된다.
원래 밤, 대추 같은걸 넣어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 건포도, 크랜베리를 넣었다. 뭐든지 요리는 단짠단짠 아니겠나?
종업원(?)들이 늘어나니 아침 준비가 수월했다.
하 요거 한식은 된장찌개로 시작해야 하는데 간장이나 된장이나 둘 다 메주가 있어야 하는데 메주 띄우는 게 엄두가 안 나서 아직 시도를 못해보고 있다.
전생에 외가에 갔을 때 할머니가 담는 걸 몇 번 도와드린 적은 있어서 대충 레시피는 기억하고 있는데 언젠가 한번 시도해봐야지 마음만 먹었다.
국은 그냥 토란과 고기를 넣고 토란국을 끓이기로 했다. 마침 무도 몇 개 먹을 만한 게 있었다.
무를 기름에 달달 볶다가 살짝 데쳐 껍질을 벗긴 토란을 넣고. 고기 잘라 넣고 푹 끓이면 완성! 밑반찬으로 담아두었던 피클과, 에밀이 요즘 매일같이 평원에서 먹을 수 있는 채소라고 따오는 것을 데쳐서 무쳤다. 소시지도 채소랑 볶아서 추가하고.
찜통에서 증기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엘프인 이실리엘이 제일먼저 반응한다.
“흐음... 러셀, 연잎 향이 아주 좋아요.”
“오늘은 내가 아주 배부르게 먹여주려고 준비했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나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어차피 첫째 마님은 곧 배가 몇 달 동안 불러 오실지도 모르는데...”
그 소리에 이실리엘이 부끄러움으로 내 뒤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리젤다도 얼굴이 부끄러움에 물들고. 아줌마들의 19금 토크는 정말 세다 세.
시간이 조금 지나고 집게로 조심스레 연잎 밥, 한 쌈을 꺼내서 접시에 펼쳐 보았다. 한겹씩 연잎을 펼칠때마다 뜨거운 김이 확확 솟아올랐다.
“하 정말 향이 좋다.”
나는 그것을 한 숟가락씩 떠서 이실리엘과 리젤다에 입에 넣어주었다. 입에 넣고 조금 씹자마자 둘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말했다.
“와아... 꼭 연꽃을 따먹는 것 같아요.”
설마 엘프는 연꽃도 생으로 먹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향이 정말 좋아요. 뱃속에서 코로 막 향이 나오는 것 같아.”
리젤다의 소감도 재미있었다. 향이 좋은 음식을 먹으면 그런 느낌이 들긴하지.
“자 다들 와서 한입씩 먹어봐.”
내말에 애니와 토끼수인 둘도 달려들어 맛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입씩 맛을 보더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 져서는 말했다.
“엄청난 맛이야 러셀!”
“어머, 사장님 이건 정말 신기하네요. 향이 정말 깊어요. 은은하고”
“확실히 사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내야. 그치 나나야?”
“확실히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겠네요. 에이미 언니”
요 두 마리 꼬마토끼들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다. 부엌에서 향이 홀 안쪽으로 퍼져 들어갈 때 쯤.
아침식사를 찾는 하이에나 벨릭이 마틴, 엠마를 데리고 위층에서 내려왔다.
“우와! 이거 무슨 좋은 냄새지~ 꼭 꽃향기 같은데~”
“이런 개수인 같은 코를 가진 놈을 봤나.”
“가서 앉아! 이놈아 밥 줄 테니까!”
내 호통에 벨릭이 냉큼 자리를 찾아 앉자 가운데 뷔페식 차림이 시작되었다. 국과 연잎 밥, 그리고 반찬 몇 가지의 조촐한 식사였지만 다들 아주 만족 해 하면서 식사를 이어갔다.
특히나 에밀이 좋아했는데.
“러셀. 정말 이게 우리가 따온 연잎으로 만든 거라고? 쩝쩝...”
에... 엘프가 오크처럼 밥을 먹고 있었다! 아주 게걸스럽게 말이다.
“하 향이 너무 좋다. 꼭 꽃밭에서 식사를 하는 것 같아.”
에밀의 앞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엘프 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에밀과 다를 바 없는 밥을 먹고 있었고 말이다.
“하, 너무 맛있어서 매일 먹고 싶을 거 같아.”
로리엘이 감격에 찬 눈동자로 말하자 에밀이 말했다.
“매일 먹고 싶으면 러셀의 세 번째 아내가 되면 됩니다! 자! 하고 싶으신 분?”
에밀이 마치 광대처럼 사람들을모으자 용병과 엘프들이 앞 다투어 손을 들었지만, 이실리엘의 매서운 눈동자에 눈치를 보며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근데, 벨릭 저 새끼는 왜 손들고 있냐?'
“야! 너 손 안내려?”
“와하핫~”
“하하하~”
기사들과 용병들의 웃음이 여관의 아침을 깨웠다.
맛있는 음식과 따듯한 목욕, 깨끗한 객실로 모시는 엘프의 눈물 여관의 아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