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61. 실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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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리엘이 절규하며 주저앉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실리엘이 활을 쏘지 못한 이유는 러셀이 공중으로 끌려올라갔을 때, 이실리엘이 이미 물의 정령을 소환해 러셀의 전신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실리엘의 물의 정령이 없었다면 러셀은 수면에 충돌한 순간 괴물이 먹기 좋게 내부의 모든 뼈가 조각난 고깃덩이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셀을 보호하려던 이실리엘의 노력도 허망하게, 이실리엘이 불러놓은 물의 정령도 러셀과 함께 강 하류로 사라져 버렸다.
이실리엘은 분노했다.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감히 내 반려를 미물 따위가!’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왔는데! 아직 벨이 알려준 키스도 못해본 자신의 반려를 납치해가다니.
‘감히! 감히!’
러셀을 찾아와야 했다. 중급 물의 정령이 보호하고 있으니 놈이 쉽게 러셀을 먹어치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러셀이 저 미물에게 먹히기 전에는 반드시 찾아와야했다.
이실리엘은 지금 이 순간 모든 생각을 놓아버렸다. 지금은 러셀을 찾아야겠다는 생각과 끝없는 분노만이 이실리엘의 몸속에 끓어올라, 전신을 내달려 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정 표현이 격렬하지 않은 엘프 그것도 높은 엘프가 분노라니. 아마 엘프 대의회에서 이실리엘의 저 모습을 보았다면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분노가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실리엘의 분노에 마법같이 대기가 멈춰 섰다. 내리는 빗방울도 공기의 흐름도 갑자기 정지된 듯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이, 이게 무슨.”
촌장과 헨슨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이실리엘님 안됩니다. 부, 분노로 정령을 불러내서는 안 됩니다. 제발!”
로리엘의 절규가 멈춘 대기를 뚫고 울려 펴졌다.
그리고 그때 멈췄던 대기가, 그리고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던 빗방울이, 방향을 바꿔 천천히 수평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폭풍우나 태풍처럼 모든 대기가 이실리엘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호자와 촌장, 헨슨은 눈도 뜨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했다.
천천히 돌던 대기가 이제는 맹렬하게 눈도 뜨지 못하게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안 됩니다. 이실리엘님 제발!”
로리엘이 다시 절규하듯 외쳤으나 강맹한 바람에 소리마저 흩어져버렸다.
그리고 대기를 울리며 이실리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셀데 바 안다 베일 엘로 이데. (Seldë va Anda Vailë Ello Idë.)
긴 바람의 딸이 당신을 부릅니다.
이실리엘 롱 윈드 그녀의 이름이다.
이실리엘은 고대 엘프어로 달빛을 머금은 이슬이라는 뜻으로, 그녀의 할머니가 밤에 태어난 그녀를 축복하기 위해서 지어준 이름이다. 할머니의 바람답게 그녀는 달빛을 머금은 이슬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운 엘프로 자라났다. 아름다운 엘프, 그 엘프들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높은 엘프 중에도, 그녀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자라났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롱 윈드라는 그녀의 성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세계수 주변에 퍼져 사는 높은 엘프 열두 핏줄, 그리고 그 열두 핏줄 중, 같은 높은 엘프들 사이에서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대 정령 핏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엘프들은 정령의 사랑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난다. 세계와 함께 시작된 세계수 그 세계수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사대정령력이, 세계수에서 태어난 엘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어여뻐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정령의 사랑을 받는 엘프 중에 유달리 정령들의 총애를 받는 핏줄이 있었으니, 그것이 엘프 사대정령 핏줄 이라는 멜팅 플레임 (Melting Flame) 녹아드는 불꽃, 롱 윈드 (Long Wind) 긴 바람, 루티드 어스 ( Rooted Earth) 뿌리내린 대지, 어로딩 워터 (Eroding Water) 침식하는 물, 네 가문이었다.
이 엘프 네 가문의 핏줄들은 엘프들 사이에서 조건만 맞춰진다면 정령왕도 소환할 수 있을 거라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모든 엘프들은 사대 정령 핏줄 네 가문을 존경을 담아 엘프 고대어로 이렇게 부른다. 아라타 엘렌 (Arata Elen) 높은 별 이라고 말이다.
정령계 바람의 정령들의 영역. 구름과 번개, 바람으로 이루어진 늘씬한 미녀 정령이 무료함을 못 이겨 하급 정령들의 엉덩이를 번개로 쏘아주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빠직”
“으악... 정령 왕님께 이를 테야!”
“네놈이 잘못한거야! 중간 땅 구경한 것 자랑이나 하고!”
바람의 상급 정령 중 폭풍의 진(Storm Jinn) 실리아는 정령계에서 오늘도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엘프들은 정령을 사랑하고 또 정령을 자주 불러내 놀아 주지만 자신 같은 상급 정령을 부를 수 있는 엘프는 그리 많지 않다.
더군다나 자신을 부를 수 있는 엘프도 자신을 잘 불러주진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못 움직이면 다른 바람의 상급 정령처럼 나무 한두 그루 못쓰게 되는 게 아니라, 지상에 재앙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나무 따위 때문에 정령계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다니!”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 것이 엘프들이 나무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며 애써 자기 위안을 해보지만 애초에 폭풍의 진을 소환하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부르고 싶어도 못 부르는 엘프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폭풍의 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바람은 포근하고 매서운, 날카롭고 부드러운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바람의 상급 정령, 특히 폭풍의 진 정도 되면 정령친화도와 함께 부드러운 내면에 분노하는 감정을 머금어야 하는데, 부드러운 내면은 모르겠지만 엘프들은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 종족이니, 전쟁 중이라면 모를까 평소에는 불려나갈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자신은 엘프들이 참 좋은데...
바람의 하위 정령인 실프 같은 애들은 세상 곳곳을 구경하고와서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고 자랑도 하는데, 자신은 정령계에 처박혀 매일 심심함과 무료함을 어쩌지 못해 다른 하위 정령들에게 심술만 부려대고 있는 꼴이라니 자신이 한심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하위 정령들의 엉덩이를 번개로 두드려주며 심술을 부려대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정령의 문이 자신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정령의 문이 조금씩 열려가며 엘프의 고대어가 흘러들어왔다.
“뭐! 뭐야 이거! 누구야? 누군지 몰라도 이게 얼마만의 중간땅 나들이야!”
폭풍의 진 실리아가 다가오는 자유에 신이 나서 외쳤다.
“뭐야!? 이 느낌은 설마? 롱 윈드?!”
조금씩 열려가는 문으로 느껴지는 특별한 핏줄에 새겨진 정령력 ‘롱 윈드’였다.
실리아는 바람의 정령에게 사랑받는 롱 윈드 핏줄이 강하게 느껴지는 정령력을 느끼고는 감격에 사방으로 번개를 튀겨댔다.
“아하하하핫~ 롱 윈드가 나를 부른다!”
놀란 다른 바람의 정령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중간 땅에 작은 롱 윈드가 태어나면 바람의 정령들의 수장이 그 자리에 찾아가 약속한다. 롱 윈드가 다시 정령으로 되돌아 올 때까지 그 수명을 다할 때까지 그들이 중간 땅에서 결코 피 흘리며 죽게 하지 않게 하겠는 맹세를 말이다.
그래서 롱 윈드가 목숨의 위협을 받아 그 피가 중간 땅에 일정량 이상 흐르게 되면, 정령의 약속으로 인한 정령계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게 되고, 자신들이 한걸음에 달려 나가 감히 롱 윈드를 괴롭힌 것들에게 한바탕 깽판을 치게 되는 것인데, 그런 단체 소환도 아니고 롱 윈드가 자기만 쏙 골라서 불러주니. 실리아는 감동에 몸이 떨려왔다.
오랜만에 나간다는 기쁜 마음에 몸을 떨던 것도 잠시. 실리아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자신을 불렀다는 건 롱 윈드가 화가 났다는 건데. 롱 윈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진 몰라도 롱 윈드를 화나게 하다니!”
중간 땅을 깡그리 뒤엎어서라도 롱 윈드의 분노를 풀어주라 다심하며, 열려가는 정령계의 문에 몸을 밀착시키는 실리아였다.
“빨리! 빨리 열려라!”
그리고 마침내 정령계의 문이 활짝 열렸다. 한걸음에 달려 나가자 자신들이 사랑하는 롱 윈드의 바람을 머금은 정령 핏줄이 느껴졌다.
일단 롱 윈드 주변에 대기를 멈추고 자신이 강림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 대기를 천천히 회전시키다 그 속도를 높여 주변 모든 것들을 엎드리게 한다.
감히 이 몸 폭풍의 진 실리아가 강림했는데 미물 따위들이 서 있는 건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롱 윈드의 핏줄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롱 윈드 나는 폭풍의 정령 실리아. 어떤 도움이 필요해?”
“반... 반...”
“반 뭐?”
“반려를! 찾아주세요!”
“뭐어?!”
오랜만에 불려나와 자신이 무엇인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한 실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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