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57. 우기 4
* * *
“아뇨, 안 됩니다.”
에밀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엘프 아가씨가 뭘 잘 모르는구먼. 이게 최고라니까?”
톰슨씨도 에밀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뇨, 저도 무두질은 해봤지만 배설물에 썩히다니요. 안 될 말입니다!”
“아니, 재를 우려낸 물에 담근다니 들어본 적도 없다고!”
지금 논쟁하는 둘은 에밀과 마을의 톰슨씨이다. 톰슨씨는 마을에서 무두질 잘하기로 유명한 분인데, 예전에 무두장이 밑에서 견습공생활을 하셨었다고 했다. 내 전투식량에 사용한 가죽도 이분이 만들어 주셨는데 에밀과 지금 무두질에 관해서 다소 격한(?) 논쟁을 하고 계시는 중이다.
지금 이 둘이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이유를 따지려면, 사과나무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여관에 사과나무를 심어달라는 내 부탁에 에밀은 자신이 마을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나와 이실리엘의 부족원이 되었다고 생각한 에밀은 그 사건 이후 자신의 채집시간과 쥐 잡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를 비서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여관주인이고 이실리엘도 내말을 잘 듣는 것이 이 부족의 족장은 나로 보이며. 자신은 채집과 사냥을 하는 전사이니 당연히 족장을 따라야 한다는 것, 나름 뭔가 설득력이 있어서 내버려두고 있는 중이었다. 뭐 가끔 도움도 되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오늘 내가 소금에 절여놨던 쥐 가죽을 무두질하는 분에게 맡긴다고 하자, 에밀이 돕겠다며 따라 나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통에든 절인 가죽을 톰슨씨에게 넘기고, 그것을 톰슨씨가 똥물에 넣으려하자, 에밀이 경악하며 그걸 막아서며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아니, 털 뽑는 데는 똥물에 썩히는 게 최고라니까 그러네. 이 아가씨가”
“안될 말입니다. 더럽게 똥물이라니요! 잿물에 담그면 털이 아주 잘 빠진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생가죽으로 써도 상관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게 생가죽을 털 달린 채 쓰니 먹기 위해 가죽을 칼로 자를 때 털이 같이 잘려서 솥으로 들어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뭐 그걸 트집 잡을 모험가들은 없겠지만 전생 감수성의 나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문제였고.
그래서 결국 쥐 가죽의 털을 다 뽑아야 했다. 쥐 가죽을 생가죽 말린 게 아닌. 좀 더 제대로 된 무두질을 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무두질에서 둘이 털을 뽑는 방식을 두고 의견 충돌이 생긴 것이다.
톰슨씨는 자신이 배운 대로 똥물에 가죽을 며칠 담가 털을 뽑는 방식을 쓴다고 했고, 에밀은 똥물에 넣고 뽑는 방식은 너무 더럽다며, 평원 엘프들이 사용하는 재를 내린 잿물에 담가 털을 뽑는 방식으로 하는 게 좋다고 주장 한 것이다.
“아니, 둘 다 진정하시고...”
“러셀, 그냥 다시 가져가면. 내가 부족원들과 무두질을 할게! 이제 다들 기운을 차려서 러셀이 부탁한거라면 앞 다투어 해줄 거라고. 이렇게 더러운 방식이라니!”
“아니, 엘프 아가씨 이게 좀 더러워 보여도, 다들 이렇게 한다니까?”
톰슨씨는 귀여운 엘프 아가씨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니, 그 모습이 자못 귀여운지 화는 못 내고 그냥 허허 하고 웃으면서 억울함을 토로할 뿐이셨다.
둘의 주장은 한참을 계속되었는데 결국 나는 에밀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톰슨씨 죄송합니다. 에밀이 저렇게 반대하니 맡기질 못하겠네요.”
그래 공짜로 해준다는데 한번 에밀에게 맡겨보자 싶어 톰슨씨에게 일단 사과를 드렸다. 제 딴에는 생각해서 해준다는데 거절하기도 애매했기 때문이다.
“아니, 죄송할 게 뭐있어. 미안하면 나중에 맥주나 한잔 달라고”
“어휴 당연하죠. 제가 대접 할 테니 여관으로 꼭 오세요.”
“하하, 그럼 당연히 가야지 공짜 맥주라는데.”
톰슨씨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셨다.
결국 가죽은 좀 더 깨끗한(?) 방식으로 하겠다는 에밀에게 맡겨졌다.
“러셀, 걱정 말라니까. 내가 자매들이랑 러셀이 원하는 대로 무두질 해둘 테니까”
“그, 그래 뭐 잘 부탁해.”
왠지 기뻐하는 에밀에게 맡긴 게 잘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묘하게 기뻐하니 일단 완성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내가 했던 방식은 쥐 가죽의 털을 다 뽑은 다음에 팔다리를 묶고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풍선같이 된 쥐 가죽의 목을 묶어서 햇볕에 하루 이틀 말린다. 그럼 동그란 상태가 되는데, 그때 목에 묶은 끈을 풀어서 입구에 속빈 갈대를 끼워 넣고, 계속 말리면 동그란 상태로 마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 마른 가죽에 갈대를 제거하고, 깔때기를 꼽아 전투식량을 채워 넣고 입구를 다시 끈으로 묶으면 전투식량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에밀은 저걸 가져가서 털을 뽑고 동그랗게 말려야 하는데, 지금은 우기니 결국 여관 벽난로나 엘프들이 거주하는 집에 있는 모닥불에 말려야한다.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하는데 뭐 엘프들이니까 기본은 할 것이고, 내일쯤 샘플 하나 들고 가서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걱정의 눈빛을 받으며 에밀은 가죽이 든 통을 낑낑대며, 엘프들이 거주하는 집으로 가져갔다.
“뭐 일단 맡겨보자...”
발레리는 지금 식은땀을 흘리며 러셀 앞에 앉아있다.
“그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예... 그 저기...”
발레리는 백단목을 든 멜빈 아저씨를 우기가 시작되기 전 서부로 보내고, 러셀의 여관에서 즐거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자신의 호위와 마사지를 받으려다가 절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충격에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을 정도였다.
서부로 복귀하는 멜빈 아저씨와 상단의 생활비용을 제외하고, 전부 러셀에게 계약금과 중간 지불금으로 가진 돈을 전부 지불했는데, 정작 자신이 러셀의 여관에서 사용할 비용을 계산하지 않은 것을 어젬밤 알게 된 것이었다. 분명 돈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실을 안 순간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처음 백단목을 받았을 때 러셀에게 계약금으로 자신이 가진 보석 전부를 지불했었다. 그러나 그와 별도로 금화 몇 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멜빈 아저씨가 자신에게 이야기 하지 않고 목재를 구하러 갈 때 호위에게 받아간 사실을 몰랐던 것이 실수였다.
어제 자신의 돈주머니를 열었을 때 자신에게는 남은 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호위인 마리나와 둘이 멍하니 얼굴만 보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상인으로서 최대의 실수였다. 자신이 가진 돈도 알고 있지 못했다니 아버지가 아신다면 뭐라고 하실까?
매주 여관비를 지불 하는 첫 태양일이 다가왔다.
조용히 러셀을 방으로 불렀다.
“죄, 죄송합니다. 러셀님. 그 제가 바보같이...”
“응?”
“바보같이... 제가 여관비로 쓸 비용을 남겨두지 않고. 러셀님에게 전부 지불해버려서...”
“응?”
“도... 돈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방값을 매주 한 번씩 받고 있다.
뭐 그래도 지금 돈 되는 손님이라고 해봐야 호크네 파티원이었던 4명과 발레리와 그 호위 두명, 돌아가면서 여관을 이용하는 기사 몇 명이 전부였다.
릴리아나 누님은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그란폴로 돌아가셨다. 무척 아쉬워하시면서 말이다.
리젤다에게는 이제 돈을 받을 수 없고, 엠마, 벨릭, 마틴은 도저히 돈을 받을 수가 없어서 받지 않은지 한참 되었다. 더군다나 벨릭의 눈을 보면 내가 돈을 내야할 판이니. 이놈은 이제 평생 무료 손님이나 마찬가지라고 봐야했다.
다크엘프들에게도 리젤다가 아플 때 큰 도움을 받았기에 한 달 무료로 묵게 해준다고 했으니. 이거 완전 공짜 여관이 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지금은 평원 엘프들와 수인들의 정착 비용을 지원하고 있으니 돈이 술술 빠져나가는 중이다. 애초에 옷 한 벌 없이 도착하신 분들이랑 옷부터 식사까지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기가 끝나고 엘프들의 집들이 완성되고, 기본적인 생활도구들만 갖춰지면 돈 들어갈 일은 당분간 없을 테니 다행이긴 했는데.
이실리엘이 구출해온 엘프들 때문이라고 해도, 어쩐지 와이프가 벌어온 돈 까먹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마음의 호수에, 아침에 찾아온 발레리가 바윗덩이를 던져 넣었다.
아침을 먹고 발레리가 찾아왔기에 이번 주 방값을 주는 줄 알고 기대했는데, 자신의 방에서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발레리의 방으로 갔더니 발레리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죄, 죄송합니다. 러셀님. 그 제가 바보같이...”
“응?”
“바보같이... 제가 여관비로 쓸 비용을 남겨두지 않고 러셀님에게 전부 지불해버려서...”
“응?”
“도... 돈이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발레리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돈이 떨어졌다고?”
“옛 제가 아무 생각 없이 계약금을 전부 지불해버려서...”
“그... 혹시 저희 상단이 돌아올 때까지. 지불을 유예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그래주시면 제가 두... 두 배로 지불하겠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이 철없는 아가씨에게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알게 해주기로.
“음... 발레리양? 그 상단이 언제쯤 돌아온다고 했지?”
“어... 제가 여기올 때 사개월정도 걸렸으니... 팔개월정도...”
“음 그렇군... 발레리양?”
“예, 옛?”
“그 발레리양의 상단에도 그, 뭐 좋은 말씀이랄까? 이건 딱 지켜야 하는 것이나. 뭐 그런 것이 있나?”
“네? 어... 저희는 사소한 상품이라도 혼자 판단하지 말라는. 뭐,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이...”
“음... 정말 좋은 말씀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좋은 말씀이라며 발레리를 칭찬했다. 발레리는 자신의 상단을 칭찬하자 기쁨에 찬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곧 일어날 일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리여관에도 그런 게 하나있지. ‘우리여관에 무료는 있어도 외상은 없어’라는 말이지.”
“옛!?”
“돈이 없어? 그럼 일을 해야지!”
발레리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