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56화 (56/352)

〈 56화 〉 55. 우기 2

* * *

아침을 먹고 손님들의 점심 음식을 한나 아주머니와 애니에게 부탁했다. 오늘 에밀과 평원으로 같이 쥐를 잡으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전투식량을 만들어 두려면 쥐 가죽이 좀 많이 필요하다. 예전에 만들어둔 건 거의 다 사용했고, 다른 건 몰라도 쥐 가죽 구하는 것이 큰 문제 중 하나였는데, 에밀이 쥐는 비올 때 많이 잡을 수 있다고 했으니. 미리 잡아서 준비를 해두려는 것이다.

“일단 저녁 전에는 돌아올 건데, 늦으면 저녁 준비 좀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 러셀, 내가 엄마랑 알아서 할 테니까.”

멀리 나갈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몰라 부탁을 한 것이다.

애니가 자신만 믿으라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보통 가슴을 두드리면 ‘탁탁탁’ 하면서 뭔가 믿음직한 느낌이 나야 하는데, 애니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니 쑥쑥 들어가는 쿠션감만 느껴지고, 소리도 안 나고 뭔가 좀 야릇하기만 했다.

“그, 그래 잘 부탁한다.”

가슴을 두드리는 애니를 뒤로하고 여관 입구 쪽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리젤다가 다가와 방수 로브를 입혀주었다. 그리고 이실리엘이 마지막으로 후드를 씌워주었다.

“러셀, 다녀오세요.”

“조심해서 다녀와 러셀”

“어, 그래 다녀올게”

두 여자에게 받는 배웅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 직장 출근하는 가장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밖에는 아직도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앞에 하염없이 내리는 비와 뒤의 아름다운 목소리의 두 아내 후보의 배웅을 받으니, 그간 내 인생이 떠오르며 조금 웃긴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높은 엘프와 예쁜 남색머리 아가씨의 배웅을 받으며 여관을 나서는 나를 보면, 전생의 사람들은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전생에 나라를 구했어?’ 라고 물어봤을 것이다.

나는 분명 전생에 할머니 한분을 교통사고에서 구하려다 죽었지만, 신에게 어떤 혜택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난한 산골 영지 사냥꾼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아니, 신이 있다면 그래도 사람 구하다 죽었는데, 조금은 편하게 살게 해줘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양친이 마을로 쳐들어온 오크에게 무참히 살해당하고, 그 시체도 찾을 수 없었을 때는.

‘솔직히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닌가?’

‘아니, 착한일하다 죽었는데. 이걸,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리고 십오 년간 용병생활을 하다가 다리를 잃었을 때는.

‘시팔, 인생 좆같네. 내가 이제 사람구하나 봐라, 신 새끼 진짜 씨….’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둘의 배웅.

지금까지의 내 삶의 과정과 이 순간의 감정을 전생의 감성으로 표현하자면. 딱 떠오르는 게 한가지다.

훈련소 입소해서 첫 주차 훈련 끝나고, 종교행사 가서 초코과자 받은 기분이랄까? 더군다나 남들 하나도 못 받는데 나만 두 개 받은 그런 기분.

아마 지금 어디선가 성가가 흘러나온다면 눈물로 회개가 터져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상상에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내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았는지 이실리엘이 물어왔다.

“러셀, 뭐 즐거운 일 있어요?”

“어? 아냐 그냥 추우니까 들어가 있어 초코과자들”

“네? 초…. 뭐요?”

어리둥절해하는 이실리엘과 리젤다를 뒤로하고 마을 입구 쪽으로 걸었다.

엘프들을 위해 갈대로 지붕을 엮어 지은 집에서, 에밀이 나를 봤는지 같이 채집을 다니는 엘프들과 문을 열고 나왔다. 넷 다 토란잎으로 만든 모자와 우비를 입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이실리엘이나 리젤다도 한번 입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러셀, 준비 됐어?”

“어, 포대는 3개랑 삽만 준비하면 되나?”

“응. 그거면 충분해”

어제 에밀과 쥐 잡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다보니, 포대가 필요하다기에 창고에 있던 린넨 자루를 세 개 준비해 놨다. 나는 쥐를 잡을 때 화살을 쏴서 잡았는데, 에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쉽고 편하게 잡는 법이 있다고 해서 포대를 준비한 것이다.

토란잎 모자를 귀엽게 뒤집어쓴 엘프들과 목책 밖으로 나갔다. 비 내리는 평원은 춤추듯 풀잎만 출렁거리고 빗소리에 모두 묻혀 잠든 듯 고요했다.

며칠 내린 비로 옆에 강물이 불어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수위도 좀 늘어난 것 같고, 강가에 갈 때 조심하라고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에서 평원 쪽으로 조금 걸어서 움직였다. 쥐들은 평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기에 멀리 움직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얼마 안 되어 에밀이 볼록하게 솟아오른 흙더미를 발견해냈다.

“러셀, 여기!”

에밀이 소리친 곳에는 한 아름 정도 되는 흙더미가 소복하게 쌓여있었고, 그 흙더미 옆으로 작은 구멍이 나있었다.

“이건가?”

“응, 얘들은 이렇게 흙더미를 쌓아두고 옆으로 구멍을 뚫어서 입구를 만들거든. 보통 큰 굴 하나에 구멍이 두세 개니까 연결된 구멍은 근처에 찾아보면 더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시야에 비슷한 흙더미들이 보였다. 엘프들과 흩어져 연결된 구멍을 찾기 위해서 다른 구멍들을 확인했다. 일단 구멍을 찾으면 에밀이 손을 들고 구멍 안으로 소리를 쳤다. 그렇게 하길 몇 번.

한 구멍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는데 신기하게 에밀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울려왔다. 엘프들이 손을 들어 에밀에게 신호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여긴 구멍이 두 개로 보이니까. 한 개를 막아 줘야해.”

내가 가져온 포대를 한쪽 구멍 입구에 씌우더니. 그걸 엘프 둘이 단단히 누르고 앉는다.

“러셀, 이제 힘을 써야해. 여기 이 흙을 수평으로 깎아 내봐.”

나는 에밀의 지시대로 소복하게 쌓여있던 흙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삽질을 몇 번 하니, 소복하게 쌓여있던 흙 옆으로 수평으로 나있던 굴 입구가 어느새 수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에밀은 내손에 들린 삽을 가져가 고랑을 몇 개 파서는. 수직으로 난, 굴 입구로 물이 흘러들게 만들었다.

주변 물들이 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반대편 굴 입구를 막고 있는 엘프들이 우리 쪽을 향해 소리를 쳤다.

“나온다!”

나는 에밀과 함께 그쪽으로 달려갔다.

두 엘프가 테두리를 꽉 누르고 있는 린넨으로 만든 마대는, 불룩불룩 거리며 연신 비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찌익 쮜익~”

마대의 안쪽이 빠르게 차오르고 반 정도 찬 느낌이 들자 엘프들이 입구를 잽싸게 끈을 돌려 묶었다. 그리고는 다른 마대로 다시 재빠르게 입구를 막았다.

잠시의 틈으로 쥐 한 마리가 튀어나왔지만 에밀의 삽자루를 얻어맞고는 그대로 쥐포가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대 두 개가 어느 정도 차고 더 이상 마대를 두드리는 느낌도 없자, 엘프들은 두 번째 마대의 입구도 빠르게 끈으로 돌려 감아 묶었다.

그리고 에밀이 손에든 삽으로 마대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찍!”

‘어우야….’

쥐들의 단말마가 후두룩거리는 빗소리에 묻혀 금방 사라졌다.

마대 두 개를 신나게 두드리던 에밀이 마대의 움직임이 없어지자 손을 멈췄다. 엘프들이 기대감이 가득 찬 표정으로 마대의 끈을 풀어 안의 쥐들을 확인했다. 한 마대에 스무 마리 정도 되는 것 같다. 쥐를 확인한 에밀이 얼굴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때?”

그리고 그때 아직 죽지 않은 놈이 있던 건지 마대안쪽이 꿈틀 하자 손에든 삽으로 다시 마대를 한 대 후려친다.

“퍽”

“어때 쉽지?”

“어…. 어, 어 그래. 대, 대단하네.”

에밀의 손에든 삽과 토란잎으로 만든 앙증맞은 모자. 비에 흠뻑 젖어 에밀의 머리카락을 타고 내리는 물방울. 그리고 에밀의 해맑은 미소가 어우러져 상당히 기묘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러셀, 러셀은 가죽이 필요하다고 했지?”

“어, 그렇지.”

“얼마나?”

“음 많으면 좋지?”

에밀이 서있는 뒤쪽 하늘에 번개가 치고 삽을 어깨에 얹은 에밀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뭐…. 뭐가?”

왠지 섬뜩한 분위기에 말을 더듬으며 되묻자 에밀이 대답했다.

“아니, 그 러셀이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으니까. 우리도 은혜를 갚고 싶은데…. 그, 지금은 우리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말이지…. 어떻게 ‘엘프의 은혜’를 갚아야 하나 다들 고민이었거든. 자매들 중에서는 농담으로 인간들이 좋아하는 그, 몸으로라도 갚아야 하는 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니까?”

‘이것이 진짜 얀데레 엘프인가!’

에밀의 말에 화들짝 놀란 내가 다른 엘프들을 둘러보자 엘프들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아, 아니,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마라 소의회 다시 끌려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내 말에 엘프들이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건 우리도 인간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상황에서, 높은 엘프이신 이실리엘님의 반려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하니까. 감정에 휩쓸린 느낌이 좀 있지. 헤헤.”

에밀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농담으로 어색하고 이상한 분위기를 털어내고. 뭔가 더 말해봐야 나만 손해겠다는 생각이 들어, 빨리 다음 굴을 찾자고 외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우리 넷은 근처 쥐 굴을 돌면서 비슷한 과정을 되풀이해 계속 쥐들을 잡았다. 마대 세 개가 꽉 차오를 때 까지 말이다.

마대 세 개를 넷이 끙끙대며 들고 와서 여관 입구 옆 발코니에 쏟아내자, 로리엘이 여관 입구에 서서 비오는 걸 보다가 그 광경에 기겁을 하고 도망가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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