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3. 애니 2
* * *
그 큰 도시에 있다는 몸을 파는 여자들처럼 도발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협박해보기도.
달래기도.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해 보아도 러셀은 요지부동이었다.
‘한번 주물러보니 별로였던가?’
별별 상상을 다 해보았다. 하지만 러셀은 넘어오지 않았다.
‘내가 나이가 너무 많은가? 더 어린 여자를 좋아하나?’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치료비를 내느라 자신의 지참금도 모두 사용해버려, 혼사 길이 막혀 나이가 차버린 자신이 눈에 차는 상대는 아니겠지만, 알몸을 주물렀지 않은가!
어떤 날은 화가나 밤에 방에서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관 손님 중에 한 명이 러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느껴졌다.
‘저 남색 도둑고양이 같은 년!’
눈매도 꼭 고양이 같은 년이 하는 짓도 고양이 같은 것이었다.
이미 러셀은 내가 점찍었는데, ‘내 건데!’ 저년이 앞에서 꼬리를 쳐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몰래 그년의 음식에 침을 넣기도 밤에 저주하기도 했지만
그년도 나도, 러셀이 이미 높은 엘프라는 우리보다 훨씬 높은 사람의 남편감이었다는 사실을 듣고는, 허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머리 위에 매달린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먹기 위해서, 두 마리 여우가 열심히 점프했지만 우아한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콕 콕 쪼아서 다 따먹어버린 기분이랄까?
러셀 앞에서는 별것 아닌 척했지만... 나는 둘째, 부인이라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마음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러셀은 나만의 것이어야 했는데 말이다.
그날 밤 허탈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러셀 때문에 자기만 이렇게 혼자 침대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지?
그렇게 울고 있을 때 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엄마에게 태어나서 처음 남녀 관계에 대해서 조언을 들었다.
엄마는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가 공백지로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이다.
엄마는 우리가 여기로 도망쳐 오기 전 살던, 그 영지 영주의 유모였다고 하셨다.
원래 비교적 나이가 많은 사람이 유모를 하는데.
엄마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아빠와 아이를 가졌으나 그 아이가 열병으로 죽자 부푼 가슴을 풀대가 없는 처지에, 당시 영주의 부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젖이 나오지 않아 유모가 되셨다고 했다.
영주가 어느 정도 자란 후 유모 일은 그만두셨고, 본인이 키웠던 아이가 전 영주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비교적 어린 나이에 영주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셨다고 했다.
어린 영주는 처와 첩들을 얻고 잘 사는 듯했지만
어느 날 한밤중 몰래 성에서 나와 어머니를 찾아왔다고 했다.
“오! 유모 정말 보고 싶었소!”
“영주님 어떻게 이런 밤중에 이곳까지?”
“유모...”
영주는 찾아와서 그간 못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름다운 처와 매력적인 첩들에 처음에는 아주 행복했으나 처와 첩들의 다툼, 시기, 질투 등에 질러버렸다고 하셨단다.
그러다 보니 모든 걸 다 받아주던 유모였던 엄마가 그리웠던 것이고, 엄마에게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영주가 갑자기 키스했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예쁜 년도, 몸매 좋은 년도 다 필요 없으니 마음씨 넓고 이해심 많은 엄마가 자신의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
아무튼 그 바람에 엄마는 기겁하고 그 영지에서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지만 결국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건, 예쁘고 아름다운 년들이 옆에 있다고 해서 너무 상심하지 말고 남자가 언제와도 편히 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결국은 그는 나에게 돌아올 것이란 걸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애니는 결심했다.
내가 러셀이 언제든 와서 쉬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기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큰 사건이 생겼다!
러셀의 둘째 부인 후보가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주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을 때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기도 했다.
내가 퍼부은 저주가 그렇게 효과가 좋았나? 마녀의 핏줄이 섞여 있나? 나에게?
힘들어하는 러셀을 보니 괜스레 가슴이 아팠다.
‘남색 도둑고양이 년 비실비실 해서는...’
나라면 아이도 쑥쑥 잘 낳아 줄 텐데, 저리 허약하면서 러셀의 둘째 부인 자리를 탐내다니!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러셀의 첫째 부인이 마을에 도착했다.
와... 예쁜 여자? 저것은 단순히 ‘예쁜’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녀가 지나갈 때는 꽃향기가 난다.
그녀가 웃으면 풀벌레도 숨을 멈추는 것 같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시간이 얼어붙는 것 같다.
심지어는 착하기까지 했다.
여관 일을 돕겠다는 말에 러셀이 때도 밀고 마사지도 경험시켜주라고 해서, 엄마와 둘이 러셀이 자신을 주물렀을 때처럼 온통 부끄럽게 만들어주려 했는데.
벗은 몸을 보니. 손대는 것조차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여관 일을 돕겠다고 했을 떄 귀한 몸으로 태어나서 뭐 할 줄 아는 거나 있겠어? 하는 생각도 잠시, 예쁜 미소를 띠면서 뭐든지 열심히 하는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아 이 여자에게는 이길 수 없겠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심지어 내, 여관에서 입는 옷을 빌려주려고 했는데, 묘하게 가슴이 작았다!
러셀에게는 내 옷이 가슴이 커서 빌려줄 수 없었다고 했지만, 아니다!
저 엘프의 가슴이 큰 것이었다.
뭐하나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하지 않으려 했던.
러셀에게 간만에 협박을 좀 하고 말았다.
“마님은 참 좋은 분인 것 같아 그치?
그런데 위층에 누워있는 리젤다도 그렇고 러셀이 둘에게는 마음을 써주는 것 같은데...
나는 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까나?
흠... 내 알몸을 홀딱 벗겨놓고, 엄마 앞에서 기름을 발라 주무르던, 이야기를 들으시면 마님이 뭐라고 하실까?”
라는 협박 말이다.
러셀이 난처해하니까 더 재미있긴 했는데.
토끼들이 엄마에게 그 사실을 고자질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다.
“애니 엄마가 말했지 않니? 조바심을 내지 말고 천천히 기다리라고?”
“그... 첫째 마님을 보면 제가 러셀이 돌아올 안식처가 될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자꾸 조바심이 나요. 그리고 그 높은 엘프는 1000년도 더 산데요, 저 모습 저대로! 하지만 저는 늙어갈 테니까...”
“흑...”
“대모의 혈통 애니님 대모님 말씀이 틀림이 하나 없습니다. 자고로 수컷이란 암컷에게 올라타 허리만 흔들어댈 줄 알지. 뭐하나 혼자 할 줄 모르는 생물입니다. 또한 아무리 예쁜 암컷이라도 몇 번 취하면 금방 싫증이 나기 마련이지요.
결국 수컷들이 좋아하는 것은 '예쁜' 암컷이 아니라 '새' 암컷입니다.
그러니 대모님 말씀대로 기다리시기만 하면 결국 애니님에게도 기회는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수컷에게 이것저것 자상하게 해준다면 수컷은 애니님을 잊지 못하겠죠.
만약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저와 저의 동생이 그 기회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에이미가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을 믿어 달라 말했다.
의심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어 애니가 물었다.
“너희 근데 남자 경험은 있어?”
에이미와 나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녀도 그녀의 동생도 처녀였기 때문이다.
애니는 믿을 수 없는 토끼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러셀이 낚시를 하러 간다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래 머리나 식히지 싶어 광주리를 하나 들고 러셀을 따라나섰다.
첫째, 마님은 재주도 많은지 강에서 물고기를 척척 건져내셨다.
큰 물고기가 너무 탐스러웠는데, 여관 손님인 엠마가 몇 마리 구워 먹고 싶다니. 러셀은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품에서 단도를 꺼내 물고기의 배를 따 손질하는데 첫째, 마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흣 안 되겠어요. 저는 운디네랑은 그렇게 친하지 않아서! 다들 피해요!”
그러나 다들 움직이지 못하고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러셀은 뭐가 신나는지 풀밭에 널브러져 웃기만 하고 있었다.
옷에서 물을 짜내는데, 모든 여자가 붉어진 얼굴로 웅크리고 있었다.
‘어휴...’
러셀과 첫째, 둘째, 마님의 반응을 보니 얘들 키스는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반응은 아직 손도 제대로 못 잡아봤을 것 같은 반응인데?
왠지 이런 애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이럴 때는 물기 한번 짜내고, 춥다고 러셀 품으로 좀 파고들기도 하고 그래야지, 이래서 언제 손잡고 언제 키스라도 하겠냐!
너희들이 뭐라도 진행을 해야, 나한테도 순서가 올 것인데!
무엇보다 가장 문제는 러셀이다.
자신은 그렇게 밀가루 반죽 하듯이 마구 주물러대더니!
정작 자기 여자들한테는 손도 못 대는 바보.
왠지 다 같이 한심해서 러셀한테 좀 도움을 주기로 해주기로 했다.
“두 마님은 러셀님이신데 부끄러워하시다뇨!
자자 제가 나뭇가지를 다시 주워와 불을 피울 테니.
러셀님은 두 분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꼭 안고 계세요!”
러셀에게 윙크해주고 나뭇가지를 줍기 위해 뛰어갔다.
‘어때? 고맙지? 잘해줘야겠지?’
애니는 엄마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러셀에 대한 계획이 바뀌지만, 러셀을 향한 마음은 바뀌지 않는 애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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