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47. 발레리 루테니아 1
* * *
저녁이 오기 전 이실리엘과 마을 내부를 산책했다.
산책 중. 이제는 거의 완성된 물레방앗간 앞에 여기저기 널린 목재가 보이기에, 그 위에 나란히 앉았다.
‘물레방앗간 데이트라...’
전생의 여러 영화가 생각났지만, 애써 고개를 흔들어 음란마귀를 지워버렸다.
목재 위에 앉아 바람을 맞으면서, 이실리엘과 그동안의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떠나고서는 어떻게 되었어?”
“의장님께 찾아가서 여행에 오를 수 있게 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계수의 수호궁수는, 세계수 주변을 벗어나려면 의장님의 허락이 필요하니까요.”
아 수호궁수는 ‘군인 같은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또 어디 갈 때 보고도 해야 하다니...
“그리고는 북부 왕국으로 간 거구나?”
“예, 거기서 사정이야기를 하고, 제가 남부로 간다니까, 본인들이 러셀을 찾아주겠다고 해서,
숲에 머물면서 벨한테 중부 대륙어를 배웠어요.“
“난 엘프어 어려워서, 한마디밖에 못 배웠는데...”
“그... 그 치만 제일 중요한 말이니깐...”
이실리엘의 귀가 붉어진다. 내가 청혼한 걸 다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실리엘은 미래는 어떻게 하고 싶다. 그런 거 없어?”
“나는 원래 은퇴하면, 이렇게 작은 여관이나 하면서, 사람들 만나면서 즐겁게 살고 싶었거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러셀이 그러고 싶다면 저도 좋습니다.”
이실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크흠... 결혼식만... 하고 다시 여기서 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긴 하는데, 이실리엘 생각은 어때?”
“저는 러셀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빨간 귀 엘프가 대답했다.
“러셀?”
“응?”
“여기도 별이 아름답습니까?”
“음 바빠서 보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별... 또 볼 수 있을까요?”
“그럼 앞으로는 같이 보겠지... 평생...”
“평생... 같이...”
태양이 뉘엿뉘엿 지평선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만큼, 붉게 물든 이실리엘에 귓가에, 늪지에서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들의 노래가 마을과 늪지대를 돌아 평원으로 낮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때 마을 입구로,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 둘이 들어섰다.
발레리가 웜포트라는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작은 마을이라 마차를 전부 넣을 수 없어, 목책 근처에 마차를 세우고, 자신과 호위를 제외하고는 야영을 하기로 했다.
마을에 들어가 촌장에게 인사를 하고, 가죽을 사들이러 왔다는 것을 전달했는데, 촌장이 조금 난처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건 일단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지.”
발레리는 찜찜함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일단 내일 이야기하기로 하고는 촌장 집을 나섰다.
발레리가 촌장 집을 나와 마을에 한군데 있다는 여관으로 향하는데,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건장한 기사로 보이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마을 안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던 것.
그중 갑옷을 입고 있는 한 명을 보았는데, 어두워지는 중이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북부 눈꽃 문장 같은 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인들은 가문의 문장이나 왕국 문장의 암기가 필수이기에, 자신도 대부분 문장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지만.
이 남부 최남단에서 북부 정예기사라니, 어두워서 잘못 보았겠지. 하며 여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관 근처에 왔을 때, 발레리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엘프 마을도 아닌데, 수십 명의 엘프가 근처에서 야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엘프가...”
사람의 마을에 엘프들이 아니, 엘프 마을인데 사람들이 사는 건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조합에, 혼란한 마음으로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발레리가 여관 문을 열고 내부로 첫발을 내디뎠다.
여관내부의 밝은 빛이 비치는 홀에는, 여러 개의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테이블에는 북부 눈꽃기사들과 높은 지위로 보이는 엘프들.
그리고 용병들이 저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손님인가?”
검은머리 남자가 자신을 보고 물었다.
“네? 네네넷!”
내부에 식사하던 사람들에 발레리가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늪지대에 용이라도 나타났단 말인가?'
작은 마을에 있기에는 뭔가 엄청난 무력이, 여관 안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침 방이 딱 하나 남는데 2인실 4 동화야.”
“네... 넷!”
“이시리엘 손님들 일단 식사부터 하시게 테이블로 안내해 드려~”
남자의 말에 자신의 앞에 나타난 한 엘프, 예쁜 옷에 하얀 앞치마 얼굴...? 얼굴!?
발레리는 이 마을에 들어서고, 지금까지 놀랜 것 중에 가장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게 엘프라고? 자신이 서부에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엘프는... 뭐란 말인가?
‘이게 엘프라면 그건 오크인가?’
지금 테이블에 앉아있는 다른 엘프들도 대단한 미모지만, 이 엘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엘프의 안내에 홀리듯 테이블에 앉았다.
“식사는 잠시 후에 나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깊은 숲 속의 시냇물이 흐를 때 들리는 소리 같은, 청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랄까?
발레리는 멍한 얼굴로 그 엘프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호위인 여자용 병도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 남부 엘프들은 원래 저렇게 예쁜 걸까요?”
그때 한쪽 테이블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아우 형님! 오늘도 스튜야? 하! 정말 요즘 형님, 형수님들이랑 노신다고! 음식 너무 신경 안 쓰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소리에 왁자지껄 웃어댔다.
음식에 불만을 쏟아내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던 애꾸눈 용병은.
머리 검은 주인이 부엌에서 절룩이며 걸어 나와서, 자신의 뒷목을 잡아채자 비명을 터트렸다.
“혀... 형님 아니 우리말로! 아니 솔직히 요즘 음식이...”
“끄허억...”
여관 주인이 어떻게 했는지. 애꾸눈 용병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렸고, 다른 사람들은 또 그 모습을 보고 웃어댔다.
뭔가 왁자지껄한 여관이었다.
하긴 뭐 영원한 스튜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발레리였지만, 음식이 나오고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스튜를 퍼먹는 그 용병을 다시 한 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고기와 신선한 허브, 채소는 말린 채소를 쓴 것 같지만, 여행 중에 먹었던 어떤 스튜보다 고급으로 보이는 모습, 빵은 곰팡내 하나 없는 따듯한 빵, 와인도 한 잔씩...
저 용병은 평소에 뭘 먹는단 말인가?
“그... 저...”
발레리가 아까 자신들을 안내한 엘프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고 엘프를 불렀다.
“네? 뭐가 부족하신가요?”
“아 그게 아니라... 저희가 생각해보니 음식을 안 시킨 거 같은데...”
“아 저희는 숙박하시면 식사가 무료에요.”
“예!? 이... 이게 무료라고요?”
“네.”
엘프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발레리의 시간이 다시 정지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목욕 시간이 있는데 오일 마사지와 때를 미실 수 있는데 한번 해 보시겠어요?”
발레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연신 ‘네네’라고 대답하며, 주머니에서 6동화를 더 꺼내주고 말았다.
식사 후 방을 배정받고 가운을 입고, 여관 직원인 토끼 수인을 따라 목욕탕이란 곳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자욱한 안개와 함께, 큰 욕조 같은 곳에 담겨있는,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몇몇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앗 새 손님인가보다.”
안에 있던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아예... 안녕하세요.”
“그 가운은 벗고 밖에서 따듯한 물 떠서 몸 한번 씻은 다음에 들어와요. 이 여관은 이게 필수 순서랍니다.”
그녀에 말에 같이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다른 여자가 말했다.
“엠마는 완전 직원 같은걸? 후훗”
“훗... 뭐 저도 사제 그만두고 리젤다 언니 따라서 여기 평생 남고 싶을 지경이에요. 에브리나님”
엠마라는 여자가 뭔가 엄청나게 부럽다는 투로 말한다.
“리젤다 언니는 좋겠다. 러셀님 음식을 이제 평생 먹겠네...”
“뭐... 엠마 정도면? 러셀 두 번째 첩으로? 한번 리젤다... 몰래...? 푸훗”
“저, 저는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오... 오래 살고 싶어요!”
엠마라는 여자가 눈에 공포의 빛을 띄며 말했다.
여자와 토끼 수인의 설명대로 몸을 씻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아... 서부를 지나 남부까지의 여정이 떠오른다.
가죽을 못 구해 졸이던 가슴까지 풀어진다.
이젠 뭐 다 어쩌랴 하는 생각까지...
그때 좀 헤픈 듯 한 인상의 밤색 머리 여급이 탕으로 들어왔다.
“새로 온 손님 두 분 때밀이와 오일 마사지 신청하셨다고요?”
“네 저희요.”
여급은 날 기다란 테이블 위에 눕혔다.
그리고 때밀이라는 게 시작되었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아... 괜찮아요... 좋네요...”
‘뭘까? 이 청량감은 피부가 아주 시원하다. 온몸이 찬물에 들어간 것처럼...’
발레리는 생각했다. 훌륭한 음식, 깨끗한 객실 그리고 이 따듯한 물 목욕...
자신이 이곳까지 오면서 묵었던 여관은 이곳이 여관이라면 거긴 그 유명한 성국 지하 감옥이 아닐까?
악랄한 이단들만 가둔다는...
시원한 때밀이가 끝날 때쯤, 조금 전에 엘프가 들어왔다.
“앗 마님!”
여급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발레리는 깜짝 놀랐고 말았다.
마님이라고? 엘프가 무슨 귀족도 아니고?
보통 마님이라면 결혼한 귀족 여자를 호칭하는데, 엘프에는 귀족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 마님의 목소리가 들려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마음에 드시나요?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어 이 목소리는 아까 그 엘프인데?’ 발레리는 왠지 몰려드는 부끄러움에 떨며 말했다.
“네.. 넷! 아주! 아주! 만족하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그때 엠마가 발레리의 등위로 오일을 주르륵 부어냈다.
“흐웃...”
입에서 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 없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후 여급이 자신의 등에 오일을 바른 후 부드럽게 움직여주는데.
자신의 입은 참지 못하고 연신 신음을 흘려댔다.
“흐읍... 헤엑...”
그 목소리를 주체 못해 얼굴과 귀가 붉게 물들자
탕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거 참기 힘들지... 훗”
“맞아요... 헤헤 좀 부끄럽긴 해 근데 뭐 여긴 다 여자니까~”
발레리는 붉게 물든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부들부들 거리며 마사지를 받았다.
그러자 그 마님이라는 엘프가 발레레의 양쪽 어깨에 손을 대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 긴장을 푸셔야 해요.”
발레리는 그대로 육체와 정신의 무장을 해제당하고 말았다.
한참 후 자신의 마사지가 끝나고, 흐트러진 정신을 주어 모은 발레리가 정신을 차렸다.
여 용병이 마사지를 받는 사이 탕 옆에 앉은 채로 말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자, 아까 엘프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서 마사지에 열중인 여급에게 물었다.
그... 아까 그 엘프분이 여기 마님이신가요?
“옛 여기 주인님의 청혼자분이시죠.”
여급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마님은 그 결혼한 귀족 부인한테만 붙이는 호칭인데 엘프는 귀족이 없지 않나?
“아 그 기사님들이 무슨 엘프 귀족이라고 하시던데요?”
“네엣? 아니 무슨 높은 엘프도 아니고...”
“앗 맞아요! 높은 엘프 그거랬어!”
여급의 말을 들은 발레리는 생각했다.
아니 생각을 할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 서부를 떠나기 전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발레리야~ 세상에 나가보면, 너의 머리로는 이해 못 할 신비한 일들이 많단다.
이번 상행에서 보고 느껴 보아라...”
'아... 이게 그 이해 못 할 신비한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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