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45. 앞치마를 두른 이실리엘
* * *
벨은 어두운 밤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잠을 깨고 말았다.
“응...? 누구... 흡?”
어둠속에서 로리엘이 벨의 입을 재빨리 막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벨 통역이 필요하다. 아주 급한 일이다!”
로리엘의 화급한 말에 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잠옷 위에 로브만 걸친 채 로리엘에게 끌려가듯 따라간 그곳에는, 자신의 친구의 반려인 러셀이, 온몸을 포박당한 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벨이 두 눈을 부릅뜨고 로리엘을 바라보자.
로리엘이 두 눈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했다.
“이... 이 나쁜 놈이 다른 여자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벨의 첫 느낌은 ‘그런데? 그게 왜?’ 였다.
북부 공작 집안의 영애인 벨에게는 첩이나 애인 같은 이야기는, ‘뭐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였기 때문이다.
여러 첩을 거느린 남자들은, 보통 북부에서 강한 무력을 상징했다.
그렇기에 아 저 남자는 많은 여자가 따를 만큼 대단한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더군다나 러셀은 아까 잠깐 보긴 했지만, 꽤 괜찮은 남자로 보였다.
다친 엘프들을 돌보는 세심한 손길이라든지..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다친 엘프들을 위해서 따듯한 물을 준비해 종업원을 시켜 몸을 씻겨주게 하기까지...
부엌에서 요리하는 모습도 슬쩍 봤는데, 걷어붙인 팔뚝이 남자답고 좀 멋지기까지 했다.
자신도 공작 집안 영애만 아니라면, 러셀 같은 남자와 맺어지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들은 엘프 그들에게 그것이 슬픈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렇다! 더군다나... 이자가 몰래 만나던 여자는 죄책감에 죽어가고 있었다!”
로리엘은 두 눈에 눈물이 한 줄 흘렀다.
벨은 당최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배우자가 있는데 말도 안 하고 다른 여자를 만난 러셀은 좀 혼내줄 필요가 있겠다 싶어, 일단은 로리엘의 편을 들기로 했다.
북부에서도 정실의 허락 없는 첩은 비난의 대상인 것이다.
“좋아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그... 통역을 해줘...”
벨이 주변을 보니 엘프들이 하나둘 몰려들고 있었다.
“어...? 엘프들이 다 모여드는데?”
“내가 엘프 소의회를 소집했다. 모든 엘프가 모여 그를 심판할 것이다!”
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러셀을 한번 바라봤다.
혼이나 한번 내주고 말려고 했는데, 로리엘의 분위기를 봐서는 이거 좀 큰일 날 것 같았다.
'러셀 내일 살아서 뜨는 태양을 볼 수 있으려나?'
로리엘이 러셀을 깨우기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로리엘과 같은 세계수의 수호자 엘프가 보이기에, 벨이 조용히 다가가 뒤로 슬쩍 불러냈다.
“러셀의 잘못이 명백하다 한들 이실리엘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앞의 엘프의 눈빛이 흔들린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큰일이 벌어진다면 이실리엘은 저희에게 큰 실망을 하겠죠?”
엘프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흐른다.
“분위기를 지켜보다가 러셀이 위험하다 싶으면, 슬쩍 빠져서 이실리엘을 데려오세요. 러셀의 잘못은 이실리엘이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북부 공녀는 생각보다 당찬 소녀였던 것이다.
앞에 엘프는 불안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재빨리 행동해주세요. 친구의 소중한 사람이 다쳐서 이실리엘이 슬퍼하는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벨은 그리고 나서 결심했다.
이실리엘 몰래 러셀이 첩을 들인 것 같은데, 이실리엘에게 첩을 들일 때의 주의점을 교육해야겠다고 말이다.
엘프들의 의회가 이실리엘의 난입과 러셀의 고백으로 흐지부지되고, 엘프들은 러셀의 숨은 연인을 끌고(?) 나왔다.
벨이 본 그녀는 깊게 잠든 환자의 모습이었는데, 로리엘의 말과 러셀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이실리엘 몰래 러셀을 만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 저런 모습이 된 거라니, 어쨌든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착한 엘프가 걸린다는 병에 걸린 것도 안심이 가고 말이다.
진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귀족영애나 몸 파는 년들이 첩으로 들어오면, 자신의 유약한 친구 이실리엘은 첩에게 꼼짝도 못하고 시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벨은 마음먹었다. 이실리엘이 저 여자랑 이야기하기 전에 교육을 끝내기로 말이다.
“잠깐! 뭘 하려는 건지 물어봐도 괜찮아? 이실리엘?”
“응 지금 샌드맨을 불러서 꿈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가서 데리고 나와야 하니까...?”
“흠... 그럼 나랑 잠깐 이야기 좀!”
그렇게 이실리엘을 한 천막 뒤로 끌고 갔다.
“벨 아픈 사람이 있어서 빨리 가야 하는데...?”
이실리엘이 리젤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이면 되니까 내 이야기 잘 들어!”
“지금 저 사람이 러셀의 다른 여자란 말이지?”
“응...”
“그럼 꿈속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깨우는 거야?”
“어.,. 꿈속에 빠져있으니까. 설득해서 데려 나와야지?”
“그래 그러니까 저 여자랑 이야기를 해야 한단 말이지? 그러면 내 말 잘 들어 알았지?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으... 응...”
결연한 표정의 벨의 기세에 리젤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인간 여자들은 백마탄 왕자들을 아주 좋아해 그게 결혼한 남자라도 말이지!”
“백마탄 왕자님은 흔한 게 아니거든?”
“그리고 남자 처지에서도, 예쁜 여자들이 자꾸 달려들면 참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그건 사랑이랑 별개거든, 인간 남자라면 말이야.”
이실리엘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지... 진짜?”
“러셀이 널 아무리 사랑해도,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이실리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간인 자신의 친구가 하는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로리엘이 모르는 인간 남자와 또 부끄러운 일에 대한 전문가(?)였으니까 말이다.
“지금처럼 인간들은 본처를 정실이라고 하고, 그다음에 남자가 데려오는 여자를 후처 또는 첩이라고 하거든?”
“저 여자는 첩이야 첩은 본처의 말을 안 듣거나, 잘못된 일을 하면 본처에게 쫓겨날 수 있어!”
“너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고 이실리엘!”
“하지만 너를 모함해 쫓아내고 자신이 정실이 되려 할 수도 있으니까. 초반에 확실히 말을 해 두어야 해!”
이실리엘은 벨의 이야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자를 두고 싸움이라니... 쫓겨난다니...
“그치만 러셀이야기를 들어봐도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고,,, 또 가시는 나쁜 사람은 안 걸리니까...”
“이실리엘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어! 다만 나빠질 뿐이지!”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실리엘이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만나면 내가 해주는 말을 기억했다가 정신 못 차리게 단호한 모습으로 말해 알았지?”
“네년! 감히 내가 없는 틈에 내! 남편을 꼬여내려 하다니!”
“지엄한 북부의 율법대로 창녀의 낙인을 찍어 추방함이 마땅하나!”
“감히 정실의 위엄에 도전하지 않고 첩으로서 의무를 다한다면! 너의 지위를 보장할 것이야!”
그렇게 이실리엘은 잠시 벨에게 표정과 할 말을 교육(?)받은 후 이시리엘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소란과 소동 덕분에 여관의 아침은 조금 늦게 시작했다.
나도 늦잠을 자 버려 식사 준비에 좀 늦었고 말이다.
내가 홀로 내려가니 벌써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배고픕니다!”
벨릭이 나를 보자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른다.
“아 미안미안 바로 준비해줄게. 늦잠을 자 버리고 말았네...”
부엌에 한나 부인과 애니가 보인다. 한쪽 구석에서 재료를 손질하던 토끼수인 자매도.
“러셀씨 피곤하셨나 봐요? 그 일단 빵은 따듯하게 만들어 두었고 말린 채소 가지고 수프를 일단 끓여두었어요. 혹시 더 준비할 게 있나요?”
창고에 전투식량 만들려고 채소는 틈틈이 말려두었는데, 이번에 게 때문에 신선한 채소들을 구하기 힘들어져서 그런지, 한나 부인이 그걸 사용하셨나 보다.
역시 우리 한나 부인 내가 늦게 일어난다고 음식을 미리 준비해두셨다.
“그러면 인단 오늘은 베이컨이랑 소시지 치즈 버터랑 찐 게살 정도로 준비하죠!”
“아 그리고 마크에게 오늘은 성에 가서 물자를 좀 많이 구매해 와야 한다고 알려 주세요.”
“품목은 제가 적어서 글 읽을 줄 아는 마을 주민이나, 기사 두 분 정도 같이 가달라고 할 테니까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부엌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뒤를 돌아보니... 앞... 앞치마를 입은 이실리엘이었다!
“헉...”
그 모습에 잠시 내가 얼어붙은 사이에 한나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아침 일찍 마님께서 뭐 도와줄 건 없으시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냥 계시라고 했는데 러셀씨를 돕고 싶다고 하셔서요.”
‘마님이라니... 마님이라니...' 무척 부끄러웠다.
“마님요?!”
내가 깜짝 놀라서 되묻자 한나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 물어보니까 기사님들이 엘프 귀족이시라고 러셀씨 부인이 되실 거라고... 그러면 여관 주인마님이시니까 그냥 마님이라고...”
그게 그렇게 되나? 한나부인 생각보다 합리적이고 똑똑한 분이셨구나.
그나저나 아까 구석에서 뒤돌아 테이블 닦고 있는 게 이실리엘이었단 말인가...
급하게 부엌으로 들어오느라 확인을 못 했는데...
“옷은 내 옷을 빌려 드리려고 했는데 가슴이 좀 커서 그냥 옷에다가 앞치마만 입혀 드렸어”
애니가 옆에서 말했다.
헐... 메이드복 엘프라니... 그건 확실히 심장에 위험할 뻔했다.
“그... 이실리엘 엘프들 아침 식사도 준비해야 할 건데?”
“아 어제 러셀이 준비해준 재료랑 게로 수프를 만들고 있는 걸 확인했어... 요.”
“그... 그래 그럼 잠시 쉬고 있어 아침 준비해 줄게”
“그... 저도 돕고... 싶은데요...”
부끄러워하는 이실리엘에게 한나 아주머니, 애니와 같이 뷔페 준비를 같이 해 달라고 부탁했다.
베이컨을 굽고 치즈랑 버터 잘라서 준비하고, 있는데 한나 아주머니 이실리엘이 홀로 빠진 틈에 애니가 다가왔다.
“흠... 러셀?”
애니의 음성에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왜... 왜?”
불안감이 먹구름 처럼 밀려온다.
애니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마님은 참 좋은 분인 것 같아 그치?”
“그런데 위층에 누워있는 리젤다도 그렇고 러셀이 둘에게는 마음을 써주는 것 같은데... ”
“나는 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까나?”
“흠... 내 알몸을 홀딱 벗겨놓고, 엄마 앞에서 기름을 발라 주무르던 이야기를 들으시면, 마님이 뭐라고 하실까?”
내가 깜짝 놀라 두 눈을 부릅뜨고 애니를 바라보자.
애니가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러셀이 자꾸 나를 소홀하게 대하면... 나도 앞으로 참을 수 없을지도?”
그리고는 구운 베이컨을 들고 홀로 나가버렸다.
뒤쪽의 식재료를 준비하면 토끼수인 자매의 귀가 쫑긋거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제발... 애니야 나 어제도 엘프 소의회 끌려갔다 왔다고... 이번엔 소의회 아니고 대의회 끌려가는 거 아냐?’
여관의 평범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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