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in 여관-44화 (44/352)

〈 44화 〉 43. 죽음의 물레가시

* * *

로리엘이라는 엘프는 수천 년의 무궁한 역사를 자랑하는 엘프 사회에서도, 몇 안 되는 괴짜 엘프이다.

애초에 세계수에서 태어난 요정인 엘프들은, 정령계와 인간계를 반반씩 걸치고 있는 존재였고, 때문에 육체적인 강인함을 가지기 힘든 특징이 있었다.

육체 단련을 아무리 하더라도, 다른 종족에 비해 노력의 반이 사라지는 것과 같아서, 육체능력으로 대성 할 수 없는 것이다.

엘프들이 활을 사용하는 것도, 순수한 힘으로는 마물이나 몬스터를 상대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고, 많은 엘프들이 활을 주 무장으로, 부 무장으로 단검이나 나이프, 레이피어 따위들을 선택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엘프들의 신체적, 종족적 특성이 아닌.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주 무장을 단검 부 무장을 활을 사용하는 특이한 엘프가 있으니. 그것이 로리엘이다.

긴 엘프 역사에 활을 쏘지 못하는 엘프가 몇이나 있었던가?

과연 그런 엘프가 있기나 한가?

있었다! 그것이 로리엘이라는 엘프였다.

물론 엘프들의 기준으로 보면 못 쏜다는 거지 인간의 기준으로는 훌륭한 궁수인데, 수 백 보 밖의 고블린의 눈알을 꿰맞추는 다른 평범한 엘프들에 비해서, 로리엘은 활에 처참한 재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부모들은 그녀에게 긴 시간이 허락된 엘프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좋아진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의 부모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는데, 로리엘은 재능이 없는 것이 아니라 활에 흥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미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까 말이다.

로리엘은 비교적 어린 엘프일 때 사냥을 나갔다가 오크 세 마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두 마리는 해치웠지만, 활과 화살은 부러지고 남은 무기는 하나도 없어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남겨진 것은 달랑 화살 한 대 로리엘은 그것을 가지고 숲 그늘로 숨었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놈의 뒤로 접근해 기회를 보다가 손에 잡은 화살을 놈의 목덜미에 꽂아 넣었다.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 없다.

놈의 뒤를 밟아가는 두근두근함, 놈의 목덜미를 찌를 때 느껴지는 감촉, 파고드는 화살을 통해 전해지는 놈의 떨림과 단말마.

그녀는 그것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짜릿한 즐거움을 말이다.

몰래 숲 그늘과 어둠에 스며들어 접근해,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는 것을 즐기는 것은, 엘프보다는 다크엘프의 소양이다.

하지만 엘프임에도 그것을 즐기는 자가 생겼으니. 그 독특함을 가진 엘프가 로리엘이었던 것이다.

로리엘은 러셀의 여관 2층에 그녀의 오랜 벗이며 위대한 높은 엘프인 이실리엘과 벨 둘과 함께 묵게 되었다.

처음에는 러셀이 벨, 이실리엘과, 로리엘에게 각각 방을 주려고 했지만, 이 여관에는 검은 것들이 두 마리나 있었기에 로리엘은 이실리엘의 보호를 위해서 러셀에게 같은 방을 달라고 했다.

로리엘은 그것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처음 본 순간, 이실리엘을 보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어대면서도, 묘하게 승리감에 취한 얼굴로 이실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년의 검둥이를 보며, 언젠가는 찾아가서 서열을 알게 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는데, 언젠가? 아니 그냥 오늘 당장! 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로리엘이었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로리엘은, 그래서 한밤중 단검을 하나 쥐고 어둠에 숨어 복도를 조용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때 저 앞 계단에 불빛이 비치면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리엘은 화급하게 그림자 그늘에 숨었다.

계단으로 올라온 것은 자신의 높은 엘프 이실리엘의 반려감 러셀이었다.

그는 한 손에 랜턴을 한손에는 김이 올라오는 물이든, 작은 나무통과 수건을 가지고 있었다.

로리엘은 그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리고 호기심에 조용히 러셀의 뒤로 따라붙었다.

러셀이 한 방문에 노크하자 문이 열리고 러셀이 안으로 들어갔다.

로리엘은 재빠르게 내부 인원과 시야를 파악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방으로 스며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방의 한쪽에 존재감을 지우고 자리 잡았다.

“러셀님 제가 할게요 그냥 두세요...”

“아니 내가 할 게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방안에서 러셀은 우울한 목소리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여자의 얼굴과 이마를 따듯한 수건으로 닦더니. 어깨와 상체까지 닦는 게 아닌가!!!

“러셀님 오늘은 이실리엘님도 오셨는데 일찍 주무세요. 언니는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요.”

“그래...”

“멀리서 러셀님만 보고 오신 분 앞에서, 리젤다 언니 때문에 슬픈 모습 보여 드리면 안돼요. 아셨죠?”

“그래...”

로리엘은 대화를 듣고 경악하고 말았다.

높은 엘프의 반려감! 새신랑이! 결혼도 하기 전에 다른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로리엘은 구석에서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인간 남자는 믿을 것이 못 된다더니. 자신의 높은 엘프가 저런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니!

자신의 소중한 높은 엘프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있었다.

분노에 단검을 꾹 말아 쥐었다.

한참 후 러셀이 나가고 엠마도 잠이 들었다.

구석에 숨어있던 로리엘은 천천히 걸어 나와 리젤다를 바라보았다.

‘인간 따위가 감히! 얼마나 아름답기에! 아니 음란! 아니지! 아무튼! 어떻게 높은 엘프의 반려를 꼬여내다니! 얼굴이나 봐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리젤다 앞에 섰을 때 로리엘은 경악하고 말았다.

아니, ‘가시?’ 그녀의 정령안(Eye of Spirit)에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저것은 분명 가시였다. 엘프나 인간들 중 아주 선한 존재들이 깊은 자책감에 빠지면 걸린다는 가시.

선한 인간은 드물고 걸리면 무슨 병인지 모르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기에 인간들은 가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정령안을 가지고 있는 엘프들은 저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자책감이 심해 마음에 병을 얻으면 죽음의 정령이 마음 안에 자리 잡아 생긴다는 그것이, 그녀의 안에 그녀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기로 자라나 있었다.

그 크기로 보아 이 여자는 명백히 엄청난 자책감에,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인간 여자가…. 자신의 자책과 고통에 잠겨 익사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가엽게도….

무엇 때문일까?

로리엘은 샌드맨을 불러내 잠든 그녀의 꿈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의 꿈속에서 진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원치 않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 그녀의 고통을 말이다.

러셀…. 그 인간….

높은 엘프의 명예를 더럽히고 인간 여자의 마음을 농락하다니.

로리엘의 손이 덜덜 떨렸다.

“러셀 이 인간이!”

로리엘의 호통에 잠에서 깬 엠마가 비명을 질렀다.

“누? 누구? 히…. 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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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젤다의 걱정에 잠 못 이루던 내가 잠을 깬 곳은, 여관 밖 마을 안에 마련된 엘프들의 야영지 한가운데였다.

엘프들이 불러낸 빛을 뿌리는 정령들이, 스산한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고, 나는 꽁꽁 묶여 수많은 엘프들의 원망과 분노에 찬 눈빛을 마주하며, 잠에서 깬 것이다.

“어...?”

내가 상황을 이해 못 하고 있자, 이실리엘을 딱 붙어서 따라다니던, 로리엘이라고 했던 엘프가 앞으로 나서더니 입을 연다.

“러셀 네놈 감히 높은 엘프를 두고 부정을 저지르다니! 감히!”

그 소리에 주변 엘프들의 눈이 살기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엘프어로 조용히 여러 말들을 쏟아내자, 갑자기 로리엘이라는 엘프 옆으로 파란머리 여자아이가 나선다. 그... 벨이라고 했던가?

“높은 엘프의 명예를 더럽힌 저자의 죄를 물어야 합니다!”

“감히 높은 엘프를 두고 불륜을 저지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엘프들의 율법에 따라 다스려야 합니다!”

“그에게는 정화가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라고들 하시는군요. 러셀씨!”

­꿀꺽...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 어느 정도 이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엘프들이 이렇게 과격한 종족이었나?’

그때 로리엘이 나서서 엘프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벨이 통역을 시작했다.

“아직 그의 죄를 다 말하지 않았다! 내가 저놈과 불륜에 빠진 여자를 보았다!”

“그게 누구냐! 높은 엘프를 모욕한 여자가!”

“이건 다른 분들의 외침입니다.” 벨이 중간중간 얄밉게도 해설까지 해주었다.

“끝까지 들어라. 자매들이여!”

“그 불쌍한...”

로리엘은 참을 수 없는지 눈물을 한 방울 흘리더니 이어서 말했다.

“여자는 명백한 피해자였다! 그녀는 ‘죽음의 물레가시에’ 죽어가고 있었다!”

“하물며 인간이 말이다! 저놈 때문에 얼마나 마음에 고통을 느꼈으면, 선하디 선한 인간이나 엘프만 걸린다는 죽음의 물레가시에 고통받고 있느냔 말이다!”

“엘프만큼 선한 인간이 어디 흔한 일인가?”

“그런데 저놈! 저놈!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선한 인간 여자를 꼬여내 높은 엘프 몰래 불륜을 저지르게 한 사실에 그녀는 죽음을 선택했다!”

‘아니 그거 진짜였어? 엘프 말고는 안 걸린다면서….’

마음이 약한 몇몇 엘프들은 마구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다른 과격한 엘프들은 로리엘의 그 말에 광기에 차 외치기 시작했다.

벨이 비장한 말투로 통역한다.

“높은 엘프의 명예를 되찾아야 한다!”

“감히 높은 엘프의 반려임에도 불륜을 저질러 높은 엘프를 모욕하는 금기를 범하다니!”

“모욕당한 높은 엘프의 명예를 어찌 회복해야 한단 말인가!”

분노한 엘프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갑자기 아름답지만,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벨이 소리치며 통역했다.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요정이 나타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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