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42. 이실리엘 파랑새처럼 날다.
* * *
러셀을 사랑하는 리젤다의 마음은, 이제 가시가 되어 리젤다를 찌르고 있었다.
러셀을 원했지만 그렇다고 이실리엘의 파멸을 바라진 않았는데, 자신이 한 여자의... 한 엘프의 삶을 파멸의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생각에, 리젤다는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는 한 엘프가 벼랑으로 떨어져 내리며, 리젤다를 피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난다.
이런 일이 몇 번 계속되자, 잠드는 것이 무서워 침대에서 웅크리고 덜덜 떨다가 잠이 든다. 하지만 잠이 들면, 다시 피눈물의 엘프가 눈앞에 떠오른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
아침에 초췌해진 모습으로 눈을 뜨고 밥을 먹었지만, 입맛이 없어 남기게 된다. 저녁식사 후에는 밖으로 나가 먹은 것을 다 토해내었다.
그렇게 벌써 열흘 넘게 이어진 리젤다의 마음의 병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음속의 가시가 이제 자라날 대로 자라나, 리젤다의 육신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리젤다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자라난 가시에 찔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러셀의 여관은 지금 아주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있다. 리젤다가 잠에 빠져 벌써, 삼 일째 깨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몸과 입술이 말라간다. 피부가 생기를 잃고 죽어가고 있다. 리젤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아주 심각한 병에 걸린 환자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어제 벨릭과 마틴, 브릴다, 에브리나는 게들이 사라진 늪으로 검은 연꽃을 찾겠다고 나섰다.
리젤다의 목숨을 붙여두기 위해서, 죽음의 사제인 아우로나가 리젤다에게 흘러나오는 죽음의 기운을 조금씩 빨아들이고 있다.
사제인 엠마가 이후에 생기를 불어넣어 간신히 목숨을 붙여놓고는 있지만 언제 악화할지 모른다는 것이 두 사제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서 죽음의 기운을 빨아들이며 자란다는 검은 연꽃은, 옆에 놓아두기만 해도 치료방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리젤다를 충분히 몇 달간 이 땅에 붙들어 놓을 수 있을 거라는 아우로나의 말에, 다 같이 달려간 것이다.
러셀은 그런 리젤다를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십오 년 모험인생에서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질병으로 리젤다가 죽어가고 있었다. 전생에서의 지식도, 하나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말이다.
리젤다의 방안 엠마와, 다크엘프인 아우로나, 러셀이 리젤다의 상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고 있다.
“다들 잘 기억해봅시다. 혹시라도 이런 병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러셀이 침대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슬픈 표정을 가리며 말했다.
“저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잠이 빠지는 병이라니...”
엠마가 말했다.
그때 아우로나가 뭔가 생각난다는 듯 손을 짝 치면서 말했다.
“그래... 아냐... 말도 안 되는데. 애초에 그게 나약하디 나약한...”
“왜?! 뭔데? 뭐가 기억났는데?
“아우로나님 뭔데요? 이상해도 뭔지 말해보세요 혹시 모르니까요?”
아우로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헛웃음까지 지으며 말했다.
“그... 깊은 잠에 빠지는 병에서, 들어보기는 했는데... 그게 말이 안 되는데...”
“아니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데?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말을 해봐!”
“증상대로라면 이건 엘프의 저주다.”
“엘프의 저주? 엘프가 저주를 건 건가요? 설마... 설마... 자신의 반려를 넘보는 언니를...”
러셀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눈을 부릅뜨며 경악한다.
“아 아니다. 그게 아니다... 흰둥이 놈들이 저주한다니. 그놈들은 그렇게 담이 크지 못한 놈들이다.”
“그 다크엘프들이 비웃으면서 부르는 게 엘프의 저주. 그러니까 엘프들만 걸리는 저주라는 게 있다.”
“그... 그게 뭔가요?!”
엠마가 아우로나를 탈탈 흔들어대며 흥분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 이게 진짜 말이 안 되는 게, 그건 흰둥이들만 걸리는 저주이기 때문이다.”
“나도 죽음의 성녀님에게 우스갯소리로 들은 거긴 한데 말이다.”
“흰둥이들은 정령을 사용하지 않느냐?”
“근데 정령에는 불의 정령이 있다.”
“우리 다크엘프들은 불의 정령을 아주 사랑한다.”
“화상 자국도 나름 자랑거리이지. 문신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약한 흰둥이들은 불의 정령을 사용하다가 잘못해서 나무나 숲을 태워 먹으면, 자신의 잘못을 견디지 못해서, 시름시름 앓다가 깊은 잠에 빠진다고...”
“그 얼마나 웃긴 말이더냐, 나무 한 그루 태웠다고 시름시름 앓다니...”
“그리고 이 아이는 흰둥이도 아니고, 인간이 아니냐?”
“나무를 태우지도 않았고...”
“또 흰둥이들처럼 자신의 잘못에 가책을 느낄만한 짓을, 한 것도 아니지 않으냐...”
“했다고 해도 인간이 그 때문에 쓰러진다니.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결국 절대 걸릴 수 없는 것이다.”
아우로나는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말을 끝냈다.
엠마가 이야기를 다 듣고는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말을 들어보니 그렇네요. 언니가 숲을 태운 것도 아니고 말이죠...”
“엘프의 반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그런 걸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에 병이 들어 깊은 잠에 빠졌다?”“
“리젤다 언니는 그렇게 순수한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엘프 머리끄덩이 잡고, 원래 내 것이라고... 하시지...”
엠마가 입을 자신의 말에 놀라 입을 가렸다. 그리고 멋쩍게 웃어버린다.
“하아...”
그래, 엘프만 걸린다는 병을 리젤다가 걸릴 리도 없고, 양심의 가책은 쓰레기인 내가 느껴야지 왜 리젤다가 느낀단 말인가.
그녀는 나에게 이실리엘의 사랑이. 부채 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 고마운 사람인데 말이다.
죽음의 앞에선 리젤다의 고백을 들을 때 알아버리고 말았다.
아 그녀는 나를 너무나도 좋아하는구나...
그리고 그 마음을 지금에서야 고백하고 있지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녀에 마음의 시위를 살짝 놓아 버린 것뿐, 이미 시위는 당겨질 대로 당겨져 끊어지기 직전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건 이실리엘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나의 죽음의 위기 앞에 그녀는 쥐고 있던 시위를 놓아버린 것일 뿐, 나를 향한 당겨진 시위 같던 마음은 이미 한계였었다는 걸...
내가 리젤다의 고백을 듣고 쓰레기가 되고자 마음먹은 것은, 둘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버린 이상, 리젤다를 선택해 이실리엘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이실리엘을 선택해 리젤다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에 그저 허락된다면...
둘 앞에 대가리라도 박고 '부디 처분을 바랍니다.' 하면서 전생의 도게자라도 박을 수밖에... 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사죄의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틀이 지난 뒤 날 울어버리게 한 사람은 리젤다도 이실리엘도 아닌 남자인 벨릭이었다.
이틀이 지나고 리젤다의 상태가 계속 나빠지고 있을 때, 여관 문이 열리고 늪으로 갔던 용병들이 여관으로 복귀했다.
다들 비교적 상태가 멀쩡했는데, 벨릭이 내 앞으로 와 내 손에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검은 연꽃 한 송이를 넘겨주었다.
벨릭의 손에서 검은 연꽃을 넘겨받고,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벨릭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의 얼굴에 깊은 상처와 함께 눈알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어...?! 너!!!”
그다음은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놈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있었다.
“이! 머저리 같은 새끼! 너 내가 그따위로 싸우면 언젠간 뒤진다고... 그렇게 훈련도 시켰는데...
어... 어디 가서 흑... 크흑... 눈알을... 이 새끼가... 크흑...”
“아니 형님 그래도 형수님 일인데... 뭐... 그래도 형님 훈련 덕분에 목숨은 건졌으니까...”
이 털북숭이 새끼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다니...
아리따운 이실리엘과 리젤다를 향한 사죄와 감사의 눈물이 아닌 벨릭따위에게...
‘하... 인생...’
리젤다의 꺼져가던 목숨을 벨릭이 눈과 맞바꿔 이 땅에 간신히 붙잡아 놓았다.
아침부터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전생이라면 까치가 떠들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소리였는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 마차 행렬이 보인다.
이상한 느낌에 목책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이실리엘이 준 지팡이를 짚고 여관 밖으로 나왔다.
목책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멀리서 마차 행렬이 다가온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저 멀리 점같이 보이던 마차가 이젠 주먹만 해진다.
그리고 마차가 수박만 해졌을 때 첫 번째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쏟아지는 빛 속에 마차에서 뛰어내린 엘프의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물결친다.
그리고 평원에 부는 바람에 황금빛 금발을 휘날리며 한 엘프가 달려온다.
나뭇잎으로 만든 무릎 아래까지 오는 부츠
세계수의 꽃잎으로 만든 파란 치마와 윗도리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티아라를 쓰고 나를 향해 바람같이 달려온다.
바람의 요정인 듯 사뿐사뿐 한 걸음씩 그렇지만 엄청난 속도로...
저 북부에서 나를 찾아 이 먼 곳까지...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녀는 날개가 있는 요정이 아닌데...
파란 옷을 입고 한 마리의 파랑새처럼 단숨에 내 품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그녀를 받아내고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내 위에 앉은 그녀가 나를 붙잡고 열광하며 말한다.
“러... 러셀... 보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