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39. 지옥을 보았다.
* * *
리젤다는 요즘 불안함과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한밤중 자다가 깨기도 여러 번 했고... 지금도 한밤중에 깨버리고 말았다.
오빠와 같이 왔던 기사들이 이실리엘이라는 높은 엘프를 데리러 수도로 떠난 것 때문이다.
그녀는 아마 얼마 되지 않으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러셀과 만나겠지?
그 생각에 쉬 잠이 들 수 없고 밤에도 수십 번 잠을 깨거나 뒤척이게 된다.
지금은 이름만 아는 존재지만 이실리엘이라는 엘프는 높은 엘프이며 동시에 세계수의 수호궁수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리젤다의 모든 것 자신이 열망하던 존경하고 사랑하던...
자신도 되고 싶었던 그것...
사람이 엘프는 될 수 없기에 자신도 그런 궁수가 되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런 자신이 자신의 우상인 세계수의 수호궁수에 반려 감을 꼬여내고 만 것이다.
하... 내가 뭘 한 걸까?
요즘 러셀의 행동을 보니 자신에게 무척이나 다정하고. 포옹이라든지, 키스라든지, 애정 표시도 자주 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 준 것이 명백했다.
아니 모르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아... 생각했더니 볼이 다시 불타는 것 같다...’
물론 러셀이 자신을 받아준 것은 엄청나게 기쁜 일이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배불뚝이 상인이나 비리비리한 귀족가 2세도 아닌. 유머 있고 잘생긴 러셀이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야 할 것인데...
하지만 이실리엘이라는 엘프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그 이실리엘이라는 엘프가 오면 뭐라고 해야 하지?
분명 자신은 그녀가 러셀에게 청혼한 것도 알고 있었고 러셀의 의도는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청혼을 받아들여 청혼선물까지 받은 사실도 알고 있었는데.
도둑고양이가 주인 몰래 생선을 훔쳐 먹은 것처럼, 그녀가 없는 틈에 러셀을 차지하고 만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그녀의 고백을 러셀이 거절한다면, 한 사람만을 평생 사랑하는 엘프의 특성상 자살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은 식도 올리지 않은 본처 몰래 남편을 꾀어내어, 본처를 자살에 이르게 한 희대의 악녀가 될지 모르는 것이다.
식은땀이 흐른다...
엠마가 속한 순결의 교단 같으면 화형을 당할 일이다.
설마 엠마가 날 종교재판에 회부하진 않겠지... 침대에 잠든 엠마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
불안감과 불편함이 밀려온다.
자신은 어쩌다 러셀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녀가 오기 전에 몰래 도망갈까?
아니 오빠를 따라 북부로 갈까?
러셀을 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아니 안 된다. 엘프 들처럼 자신도 죽어버릴 거다.
만약 육체는 살아있더라도 영혼은 그날로 죽어 버릴 거다.
자신은 러셀을 만남으로 구원받았는데 러셀과 떨어진다면 자신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어찌해야하지?
한밤중 잠들지 못하는 리젤다였다.
엘프가 화가 난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과 같이 감정의 표현이 격하지 않은 엘프 들은 외부로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데, 그래서 엘프 들이 화가 난 것을 모르고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그렇기에 북부의 엘프 들과 접하는 기사라면, 대수림 주변에서 활동하는 기사라면, 반드시 엘프의 문화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한다.
보통 그래서 초보 기사들은 선임 기사들에게 그런 교육을 받게 되는데...
브라한은 초보 기사 시절이 떠올랐다. 그의 선임기사가 농담처럼 했던 말.
“너, 엘프가 화난 걸,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아냐?
“소리를 지르나요? 뭐 아니면 우나?”
“아니, 화가 난 엘프는 활을 쏜다.”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하핫”
“엘프는 화가 나면 경고 따위는 하지 않고 바로 화살을 날린다. 그러니까 네가 갑자기 화살에 꿰이면, 아 저 엘프 화났구나 하고 생각하면 되는 거다 알겠냐?”
“그러니까, 절대로 엘프를 특히 고위 궁수나 고위 레인저 같은 애들을 화나게 하지 마라”
분명 말도 안 되는데...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 선임기사에게 꼭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아니 임무 복귀하면 찾아가서 술이라도 한잔 사야겠다. 브라한의 앞에 저분들이 맹렬하게 화가 난 것 같으니깐 말이다.
마차가 이틀을 달려 파텔 영지에 이르렀다.
파텔이라는 놈의 영지는 넓은 평지와 작은 숲으로만 이루어진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처음 마주친 것은 영지를 순찰하던 기사 둘과 사병 스무 명이었다.
기사와 사병들은 영지로 들어온 우리들에게 저 멀리서 다가와 말을 걸려고 했는데, 얼마 다가오지도 못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엘프들의 활을 맞고 쓰러졌다. 아니 그냥 쓰러졌다고 라고 하기보다는 전부 사망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비명한번 못 지르고...
브라한이 깜짝 놀라 이실리엘에게 달려가 말했다.
“아... 아니 왜! 그 무고한 사람들이... 저들은 도적 떼가 아니지 않습니까? 영주가 나쁜 놈일 수도 있지만, 저 중에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무고한 사람일 수도 있고 영주만 벌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로리엘이 나서서 말했다.
“저자들은 전부 죄인이야.”
“아니 저들이 죄를 저지른 것을, 직접 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보았다.”
“예? 아니 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말입니까?”
브라한은 로리엘이 또 이상한 소리로 입을 열자 불안감에 휩싸였다. 브라한은 엘프들 중 이 엘프가 가장 난해하고 가장 무서운 엘프라고 생각한다. 이 엘프가 활을 쏠 때마다 자신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은, 이상하게 반사적으로 항문에 힘을 움찔하고 줄 수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자신이 그녀를 부르는 별명이 대수림 광대버섯 먹은 엘프 아닌가?
그러니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까 걱정이 된 것이다.
“엘프가 가진 정령력이 무엇인지 알아?”
“예, 그야... 자연이 가진 힘 같은 것 아닙니까?”
“세상 만물에는 정령이 깃들어있고 그 정령의 기운이 정령력이다. 엘프는 세계수에서 태어났기에, 사람과 다르게 절반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 정령이 깃들기 좋아. 그래서 엘프들이 정령에 사랑받는 거다.”
“그런데, 그런 정령에 사랑받는 엘프와 가까이 지내면 어떻게 될 것 같지? 엘프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들어가고 나가는 정령력을 접하게 되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바로 이렇게 되는 거다.”
로리엘은 그 말을 하고 브라한의 양쪽 눈에 손을 슥 가져다 댔다 뗐는데 브라한은 양쪽 눈에 맹렬한 통증을 느끼며, 눈을 부여잡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악...”
동료들이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춤의 칼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데, 주저앉은 브라한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짓 그만두게들! 죄송합니다! 동료들이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음... 신경 안 쓰니까. 괜찮아 어차피 위험하지도 않고...”
그 말에 기사들이 다시금 허탈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브라한이 두 눈에 맹렬한 통증이 끝나고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본 것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세상이 여러 가지 정령의 기운과 정령들이 뒤섞여있는 총천연색의 세상.
그리고 죽어 자빠져있는 저들의 무채색인 시체의 손, 입 주변 그리고 하체 중앙, 발, 가슴 등에 진하게 묻어나는 정령의 반짝이는 기운을...
맹렬한 구토감이 엄습했다.
브라한은 주저앉아 구토를 시작했다.
‘우욱... 우욱...’
저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저것만 봐도 명백하지 않은가?
정령의 세상은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던가?’
잠깐 전에 자신이 말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자신을 베어 넘기고 싶었다.
북부5왕국의 맹세 인간을 수호하고자 기사가 되었고, 북부의 대산맥의 혹한과 대수림의 수많은 독충, 마물, 몬스터와 와 싸우면서도 결코 한 번도 자신의 결정은 잘못되지 않았음을 믿었다. 자신이 명예롭고 영광된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결코 의심치 않았는데, 인간이... 자신이 수호하고자 했던 인간의 문명이... 인간의 행위가... 이토록 추악하고 추잡한 것이었다니...
브라한은 지옥을 보았다. 엘프들에게 쏟아졌을 악의가 피부 저릿하게 느껴질 만큼 말이다.
고개를 들어 로리엘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브라한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어 로리엘을 향해 가슴 앞에 검을 들어 기사의 맹세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부디... 제게... 아니... 저희에게 기회를... 인간이 저지른 잘못은 인간의 손으로...”
브라한이 처음에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던 기사들은 로리엘에게, 잠시의 정령안을 허락받자 누구 하나 빠짐없이 기사와 사병들의 시체를 보고 구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들은 조용히 일어나 갑옷을 챙겨 입고 마차에서 말을 풀러 무장을 마쳤다. 그리고 파텔 남작의 성이 있다는 마을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날 파텔 남작령은 광기에 미쳐 날뛰는 스무 명의 북부 기사들의 심판을 받아 처절하게 찢어발겨 졌다.
* * *